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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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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반공국가의 탄생

4·3 진압 명령 거부한 14연대 군인들 봉기한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과 숙군, 국보법, 보도연맹 낳으며 분단체제 공고화
등록 2018-03-20 08:52 수정 2020-05-02 19:28
여순사건 때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주민들. 뒤편에서 있는 사람은 미 임시군사고문단원인 랠프 블리스 소령. 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한겨레

여순사건 때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주민들. 뒤편에서 있는 사람은 미 임시군사고문단원인 랠프 블리스 소령. 미 임시군사고문단은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지휘했다. 한겨레

역사의 도미노였다. 제주4·3은 여순사건을 낳았고 여순사건은 분단체제를 완성했다.

정부 수립 2개월 만인 1948년 10월19일, 4·3 진압을 거부하며 국군 제14연대가 봉기했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부는 가용 병력을 총동원해 초토화 진압 작전을 벌였다. 반란군과 민간인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차별 진압과 이른바 부역자 색출로 전남 동부권은 피로 물들었다. 이후 군내 남로당(남조선노동당)계만이 아니라 광복군계를 포함한 대부분의 반이승만계를 솎아내는 대규모 숙군 작업이 진행됐다. 그해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됐고 좌익 인사를 계도한다며 전국적 어용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됐다. 극우반공주의 국가의 탄생이었다. 남은 좌익 세력과 피란민들은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 투쟁을 벌였고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 직전까지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 1948년, 내전은 이미 시작됐다.

“동족상잔의 제주 출동 반대한다”

14연대가 육군본부로부터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하달받은 것은 10월15일이었다. 김지회 중위, 지창수 상사, 홍순석 중위 등 남로당 전남도당 소속 간부들은 출동 시각인 19일까지 나흘 사이에 진압과 봉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그들은 뒤쪽을 택했다. 이날 밤 9시, 14연대 소속 군인 2천여 명은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며 총구를 제주에서 여수로 돌렸다. 여순사건의 시작이었다.

전남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던 14연대는 1948년 5월 초 확군(擴軍) 작업의 하나로 광주 국방경비대 제4연대 1대대를 기간병력으로 창설했다. 이 연대에는 여순사건의 주모자가 될 좌익계 군인들이 사병에게 영향을 끼칠 주요 보직에 포진해 있었다. 게다가 경찰 수배를 받던 좌익 동조자들과 일반 범죄자들도 경찰 추적을 피해 쉽게 입대할 수 있었기에 경찰에 대한 적대감이 높았다. 여순사건을 좌익 군인과 친일 경찰의 충돌이라고 해석한 배경이다.

14연대 반군은 지창수 상사 등의 지휘 아래 차량을 동원해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리고 여수 시내에 진입했다. 10월20일 반군 주력 부대가 시내에 진입해 교전이 일어났다. 소수의 경찰 병력은 반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반군이 시내에 들어오자 여수 시민 600여 명이 반군에 합세했다. 이날 오전 9시 반군은 여수시를 장악했다. 반군은 주요 기관과 건물을 접수하고 체포된 경찰관, 기관장, 우익 청년 단원, 지역 유지 등을 여수경찰서 뒤뜰에서 집단 사살했다. 이어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인민공화국 깃발이 주요 건물에 걸렸다.

여수를 장악한 반군 2개 대대는 10월20일 오전 9시30분께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여수역에서 통근열차를 이용해 전남 순천으로 북상했다. 순천역 앞에서 대기하던 홍순석 중위 휘하 순천 파견 2개 중대가 즉시 반군에 합류했다. 광주에서 급파돼 순천교와 순천역에 배치됐던 제4연대 1개 중대도 반란에 반대하는 일부 사병을 사살한 뒤 반군에 가담했다. 20일 오후 3시께 순천 시내를 완전 점령한 반군은 병력을 3개 부대로 재편성했다. 주력 1천여 명은 구례·곡성·남원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학구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일부는 광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보성·화순 방면으로, 나머지는 경상도 지방 진출을 위해 광양·하동 방향으로 진격했다. 남원·구례·보성 등지에서는 반군이 도착하기 전에 지방 좌익 세력이 지역을 점령해 14연대가 무혈 입성하는 일도 있었다. 그동안 비합법 상태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지역 남로당원 등이 사건에 적극 가담했다.

이승만 “아동이라도 불순분자 제거”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이를 즉각 반란으로 규정해 진압에 나섰다. 육군총사령부는 10월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관에 육군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을 임명해 제2여단과 제5여단을 지휘하게 했다. 또한 제2여단장에 원용덕 대령, 제5여단장에 특별부대사령관 김백일 중령을 임명해 진압작전을 맡겼다. 같은 날 육군 5개 연대, 비행대, 수색대를 뼈대로 한 진압부대가 편성됐다. 반군의 대응이 예상외로 강력해지자, 10월22일에는 부산에 주둔한 제5연대가 추가로 진압작전에 동원됐다.

이와 함께 정부는 10월22일 여수·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군법에 의해 사형 등에 처한다고 밝혔다. 대통령 이승만은 10월23일 ‘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여, 반역적 사상이 만연하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발표했다. 사건의 원인이 공산주의, 좌익세력에 있다고 본 것이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와 같은 이 대통령의 경고문이 진압작전 지휘관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승인대로 군경은 진압 과정에서 반군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민간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살했다. 미군 관계자가 “정부군은 공산주의 봉기에 협력했다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드는 사람은 사살하고 다녔다”고 본국에 보고할 정도였다.

봉기는 진압군이 23일 순천을 점령한 데 이어 27일 여수를 탈환하면서 종결됐다. 곧바로 피의 보복이 이어졌다. 이적행위자 색출은 손가락으로 지목하는 1단계와 심문·재판의 2단계로 진행됐다. 경찰·청년단원·학련생·우익인사 등이 머리가 짧거나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등을 가려냈지만 개인적인 원한 관계로 억울하게 지목당해 목숨을 잃은 이도 많았다. 말 그대로 ‘손가락 총’이었다. 반군의 즉결처분에 가담하거나 반군 점령 기간에 인민재판에 앞장섰다고 지목된 자는 그 자리에서 곤봉·개머리판·체인 등으로 맞아 죽거나 총살당했다. 2단계 심사를 거친 이들은 즉석에서 총살되거나 군경에 넘겨졌다. 이 과정이 수개월간 계속됐다. 1949년 11월 전남도는 여순사건의 인명 피해를 1만1131명으로 집계했다.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반군과 지방 좌익들은 산에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에 토벌대는 빨치산의 보급로가 된다는 이유로 지리산과 조계산, 덕유산 인근의 마을을 초토화했다. 살기 위해 빨치산에게 식량과 편의를 제공한 주민들은 부역자로 몰려 즉결처형됐다. 피아 식별이 어려운 게릴라전의 특성에 일본 전체주의의 유산,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유사인종주의가 더해져 극도로 무자비한 방식의 학살이 자행됐다.

한반도 방방곡곡 피로 물들여

반군의 여수·순천 지역 점령 기간에 이뤄진 경찰과 그 가족, 공무원들에 대한 처형과 진압 이후 이른바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 벌어진 대규모 보복 학살은 지역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조정래 대하소설 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이 비극은 비단 여수·순천만의 일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종전까지 공권력이 벌인 잔인한 보복은 한반도 방방곡곡을 피로 물들였다. 대한민국은 무덤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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