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판(오사카)이오, 대판!”
제주 민요 가락이 흐르는 가운데 푸른 대양을 가르며 배 한 척이 앞으로 나아간다. 까만 굴뚝에서 새까만 연기를 내뿜는 배의 선수에는 ‘君が代丸’(기미가요마루)라는 이름이 새겨 있다. 재일동포 작가 양석일의 동명 소설을 같은 재일동포인 최양일이 영화로 만든 (2005)의 첫 장면은, 한 마리 괴물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재일동포 1세 김준평이 1923년 제주와 일본 오사카를 잇던 정기연락선 기미가요마루에 실려 일본에 도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에서 일본에 도착한 이들이 보이는 반응이다. 저만치 뿌연 연기를 내뿜는 오사카 공장지대를 보며, 치마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은 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격하게 반긴다. 찐빵모자를 쓰고 정면을 응시하던 소년 김준평도 자신 앞에 펼쳐질 미래의 가능성을 떠올리듯 희미하게 웃는다. 식민지 때 처절한 가난에 시름하던 제주도인들에게 일본은 말 그대로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는 ‘기회의 땅’이었다.
기회의 땅, 오사카제주도인의 본격적 일본 도항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이후였다. 이들은 오사카의 이카이노나 도쿄의 아라카와 근처에 모여 집단 커뮤니티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22년 오사카~제주도 사이에 개설된 정기연락선 기미가요마루였다. 오사카에서 동포 노인들이 “부모님이 군대환 타고 일본에 왔어”라고 말하는 것을 이따금 들을 수 있는데, 그 ‘군대환’이 다름 아닌 기미가요마루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도 사람들은 커다란 물건을 비유할 때 “군대환 같다”는 말을 쓰곤 했다.
조경희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의 논문 ‘불완전한 영토 밖의 일상’(, 2017)을 보면, “제주도인들의 도일의 가장 큰 배경은 궁핍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빈곤층의 확대”라는 계급적 요인이 가장 컸다. 실제 육지의 다른 지역보다 일본에 도항한 제주도인들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컸다. 2009년 일본 법무성 자료를 보면, 일본에 사는 조선·한국 국적자 57만8495명 가운데 제주 출신은 9만882명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주도 전체 인구 52만8411명의 20%에 육박하는 수치다.
1945년 8월 해방으로 한반도는 독립됐다. 이로써 대일본제국의 일부를 구성하던 내지(일본)와 조선 사이에 전에 없던 ‘국경’이 만들어진다. 제주4·3이라는 커다란 비극을 겪은 제주도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밀항이라는 위험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재일동포 시인 김시종은 2006년 일본 연구자 오구마 에이지와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가 함께 펴낸 인터뷰집 에서 자신의 일본 도항 배경을 설명한다. 1929년 12월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시종은 어린 시절 제주에서 자랐다. 일본의 철저한 식민지 교육을 받은 김시종은 ‘일본은 신국이며, 천왕은 신’이라 믿었던 군국 소년이었다. 해방은 그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의 패전 소식을 듣고 충격에 못 이겨 일주일 넘게 식음을 전폐하던 군국 소년은 새 조국에서 우리 말과 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에 눈을 뜬다. 그러나 해방 이후 제주도의 상황은 일제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섬의 주인이 “조선총독부에서 미군정으로 바뀐 것일 뿐, 법령도 조선총독부가 만든 것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피 끓는 젊은이들에게 이같은 현실은 혁파해야 할 타도 대상이었다.
젊은 김시종이 남조선노동당의 말단 당원이 된 것은 1947년 2월이다. 그해 말 그는 제주도 학무과의 촉탁 직원으로 취직한다. 김시종의 업무는 학교용 교재를 만들어 우체국을 통해 섬 전체에 배포하는 일이었다. 4·3이 시작되자, 폭력의 광풍 속에서 1948년 5월 동지가 총에 맞아 참살당한다.
제주4·3, 망명이 된 밀항그는 당으로부터 “복수를 위해 (평소 출입하던 우체국) 우편물에 불을 질러라”는 임무를 받는다. 일을 저지른 김시종은 목숨을 부지하려고 숙부 집에 숨어든다. 남로당원 조카를 숨겨주던 숙부는 애꿎게도 배신자로 오해받고 남로당 무장대에 죽창으로 살해됐다.
이런 살기등등한 상황에서 김시종의 부모는 1949년 외아들을 일본으로 밀항시키기로 결심한다. 떠나는 김시종에게 부모는 말했다. “돌아오지 마라. 우리 눈앞에서 죽지 마라. 부모보다 먼저 죽지 마라. 이게 네 운명이니 일본에서 살아라.” 그가 부모의 묘를 찾아 성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별 후 5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1998년이었다.
4·3이 끝난 뒤에도 제주도인의 밀항은 계속됐다. 단, 목적이 돈벌이로 변했다. 그와 함께 밀항자의 절대 수가 크게 줄었다. 4·3 직후인 1949년엔 밀입국을 했다 검거된 한국인이 8302명이었지만, 국교정상화 직후인 1966년 검거자는 767명에 그쳤다.
제주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인구 이동은 끊이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은 한-일 국교정상화로 들어온 청구권 자금과 베트남전쟁 특수로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기로 접어드는 초입이었다. 농촌에 살던 젊은이들은 1960~70년대 서울로 몰려들었다. 소설가 이호철이 에 라는 소설을 연재한 것은 1966년 2월이었고, 40년 전 이미 만원으로 꽉 찬 서울의 인구는 380만 명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인들이 목표로 삼은 도시는 육지 사람들과 달리 서울이 아닌 오사카였다. 그곳에 자신들의 오랜 가족·친족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조경희 교수의 논문을 보면, 1960~70년대 밀항을 시도한 이들의 다양한 사연을 만날 수 있다. 논문에 등장하는 78살 남자와 69살 남자는 “농사짓는 것 외에 제주도에서 돈 벌 길이 없었던 청장년층에게 밀항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고 했다. “배는 작은 똑딱선에서 30명이 타는 무역선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부산 경찰도 브로커와 밀항 희망자들의 거래를 묵인하는 분위기였다. 돈만 주면 경비정이나 경찰이 선착장까지 안내해주기도 했다.”
제주를 떠받친 자이니치들재일동포의 애환을 그린 또 다른 일본 영화 (2004)를 보면, 밀항으로 일본에 건너와 주인공 안성의 집에서 일하게 된 한국인 청년이 등장한다. 어리바리한 그에게 사람들은 “너도 부자가 되고 싶은 거지, 열심히 일해”라고 말한다. 밀항해서 일본에 뿌리내린 이들은 고생해 번 돈을 보따리장사를 통해 제주의 가족에게 전했고, 이 돈은 1980년대까지 제주 경제 발전의 탄탄한 밑거름이 됐다. 이것은 어찌 보면, 그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지울 수 없는 한-일 교류사의 한 부분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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