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고문, 이런 고씨 돌림은 죽음의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라, 죽음의 핵심 정수인 것입니다. 저 칠흑같이 어두웠던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불구자가 되고 목숨을 잃어가고 윤동주 시인이나 이육사처럼 옥사했던 이유가 이 참혹한 고문이었습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한마디로 불고문이었습니다. 외상을 남기지 않으면서 치명적으로 내상을 입히는 것이고 극도의 공포와 고통을 수반하는 고문입니다. 물고문과 불고문의 조화라 할까요. 물고문이 밑바닥이 닿지 않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질식해가는 것이라면 불고문은 단근질해서 뜨거운 불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라뜨리고 돌을 말려서 불에 튀기는 그런 것입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렸습니다.”
최근 개봉된 영화 의 토대인 김근태의 수기 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김근태는 자신이 고문당한 남영동을 ‘인간도살장’,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으며,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버린 저주의 세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국어사전에서 고문(拷問)은 “죄를 진 혐의가 있는 자에게 자백을 강요하기 위해 육체적인 고통을 주며 신문함”이라고 말한다. 즉, 죽이는 것은 고문의 목표가 아니다. 피의자가 생명을 유지하며 극한의 고통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 고문은 중세 유럽이나 과거 중국, 조선에서도 존재했는데, 조선시대에는 모반(謀反) 대역죄(大逆罪)인들의 죄를 추궁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중세 독일에는 날카로운 쇠못을 촘촘히 박은 철의(鐵衣)를 피고문자에게 입혀 조여들게 하는 고문도 있었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하여 나무 침대 위에 팔다리를 고정시켜 사지를 찢는 고문도 있었다. 전세계에서 사용된 고문의 종류는 대략 320여 종이라고 한다. 일제가 조선 독립운동가들을 심문할 때 사용한 고문은 이들 전세계 고문의 종합판이었다. 손가락 사이, 배꼽, 귀, 코, 입, 성기, 항문 등에 전선 전극을 갖다 대서 고통을 주는 전기고문, 추운 겨울에 옷을 벗겨놓고 찬물을 끼얹거나 거꾸로 매단 다음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물이나 고춧가루를 끼얹는 물고문, 수갑을 채운 양손 사이에 무릎을 집어넣고 쇠파이프를 꽂아 대롱대롱 매달아놓는 통닭구이 고문, 손톱 뽑기 고문 등 우리의 상상력으로 떠올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고문 방법이 사용되었다.
박정희·전두환 시절 고문은 바로 일제 시기 고문의 후속편이자 확대판이었다. 그 방법 역시 김근태의 수기에 나온 것처럼 일제의 것과 거의 동일했으며, 그 시절 고문기술자들은 해방 직후 일제의 고등경찰로부터 고문 방법을 배운 선배들에게서 대대로 기술을 전수받았다. 잠 안 재우는 고문, 집단으로 주먹과 각목으로 사정없이 폭행하는 고문, 통닭구이 하듯 손과 발을 묶어 매달아 주전자로 얼굴에 물을 붓는 고문, 시멘트 바닥에 알몸으로 무릎 꿇게 하고 얼음물을 부어대는 고문, 알몸뚱이로 다리를 벌리게 한 다음 생식기를 줄로 때리는 고문,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구둣발로 짓이기는 고문, 볼펜으로 머리털을 감아 당기는 고문,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짓이기는 고문…. 죽도, 대나무관, 5자 정도의 곤봉, 사람을 채찍질하기 위해 사용된 로프, 사람을 찌르기 위해 사용하는 우산 꼭지, 부젓가락, 사람의 몸을 밟아 뭉개기 위한 도구, 하복부에 찔러넣는 곤봉 등 이루 셀 수 없는 종류의 향연이 서빙고의 보안사 사무실, 남산의 중앙정보부(안기부), 남영동 경찰 대공분실 등에서 질펀하게 펼쳐졌다.
아마 가장 극심한 경우는 1975년 인민혁명당 재건위 관계자들이 당한 고문이었을 것 같다. 당시 감옥에서 김지하가 이들에게 “고문 많이 당했습니까?” 물으니까 이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하재완은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탈장이 되어 한 손으로 항문으로 흘러나온 창자를 집어넣으며 재판을 받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도 일어났다.
개인이나 세력 향한 복수이고 화풀이그런데 고문이 “자백을 받기 위해 심문”하는 것이라는 사전적 정의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고문은 권력이 자신에게 대드는 저항자의 손발을 묶어놓은 다음 마음껏 화풀이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완전히 무력화된 상대방을 조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권 시절 ‘유럽 거점 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은 다음과 같이 고문 사실을 기억한다.
“조사실로 걸어가는데 수사관들이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잡혔는데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느냐며 마구 때렸다. 조사실에서는 모○○이 내 구두를 벗겨 그 구두로 분풀이하듯이 때렸다. …물에 젖은 수건을 손과 발에 묶고 전깃줄에 엮어서 전기고문을 했다. 계속 고문을 하는데 살점이 모두 떨어지는 고통이었다. 옷을 벗기고 손과 발을 묶어서 다리 사이에 막대기를 끼워 대롱대롱 매달리게 하고는 물을 붓는 고문을 당하였다. 그 고문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옷 입은 사람 앞에 옷을 다 벗고 있는 것이 수치스럽고 모멸스러워 내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발로 차는데 그때 맞은 후유증으로 지금도 왼쪽 허리 쪽이 시큰거린다.”
즉, 폭력과 고문은 자신에게 대드는 개인이나 세력을 향한 복수이고 화풀이기도 하다. 특히 고문은 상대방을 완전히 감금하고 무장해제시킨 다음 자신만이 무기를 들고 일방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이므로 가장 비열하고 심각한 불공정 게임이다. 고문은 유죄 사실, 반란세력의 전모를 파악해서 유죄를 입증한다는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폭력이 그렇듯이 그 과정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고, 그것을 통해 만들어질 권력자와 백성들 간의 관계 정립의 구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폭력으로서 고문은 가장 야만적인 현상으로 보이지만, 사실 인간들의 세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TV 에서 사자가 도망가는 얼룩말을 잔인하게 물어뜯어 죽인 다음 유혈이 낭자한 주검 더미 위에서 걸쭉하게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본 시청자는 그것을 ‘야만의 세계’라고 부른다. 그러나 핵무기를 떨어뜨려 수만 명의 육신을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게 만들고, 피폭자 수십만 명을 평생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사자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얼룩말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는 것 이상으로 야만적인 일이 아닌가?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후자의 폭력은 동물의 폭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인간 사회의 폭력은 바로 권력 행사의 일환이며, 그것을 통해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동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만 일단 욕망이 충족되면 그 이상의 폭력을 가하지는 않는 데 비해,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충족되거나 불안이 제거돼도 폭력을 계속 사용한다. 인간들이 대역죄인의 사지를 찢어서 죽이거나, 반역자를 처형한 다음 목을 잘라 네거리에 걸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게 만드는 것은 폭력 행사를 가시화함으로써 권력의 위세를 만천하에 선포하는 행위다. 인간은 정치적 목적을 이끌어내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고, 또 폭력을 통해 상대방이 완전히 굴복하는 것을 즐긴다.
조작간첩 사건의 희생자 신귀영은 “고문을 당할 때는 경찰관이 사람으로 안 보이고 작은 짐승을 잡아먹으려는 큰 짐승이자 저승사자로 보였다”고 증언한다. 김근태는 고문에 못 견뎌 “두 눈이 가려진 채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항복한다고 용서해달라고 두 손으로 빌었다”고 그날의 악몽을 기억한다. 처참한 처지에 빠진 피의자는 때리지 말라고, 살려달라고, 원하는 대로 다 말하겠다고 싹싹 빈다. 인간은 미물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 수사관은 거의 신의 경지에 오른다. 자신이 그렇게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생명을 구걸하는 존재가 되는 경험을 가졌다는 것은 치욕 중의 치욕이다. 그래서 고문 피해자나 학살 현장의 생존자들은 누구에게도 이 부끄러운 경험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고문 현장은 바로 저승사자 앞의 피라미처럼 가쁜 숨을 헐떡이며 거의 처분에 몸을 맡긴 인간이 마주 선 적나라한 권력 현장이다. 즉, 고문은 평소의 생각과 신조를 의심과 처벌의 대상으로 삼거나 그것을 의도적으로 조작해 권력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중세적 방법의 폭력이고, 폭력에 굴복해 원하지 않는 말을 하거나 동료의 이름을 댄 피해자들에게 치욕과 수모를 가져다줘서 이들을 정신적으로 파괴해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단절시키는 이중적 폭력이며, 고문당한 사람들의 초췌한 얼굴, 절뚝거리는 발걸음, 망가진 신체를 목격하거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체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권력을 두려워하고 그들에게 복종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삼중의 폭력이다.
집단학살이 사람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라면 고문은 피해자들을 천천히 죽이는 것이다. 고문 피해자 중에는 김근태처럼 수십 년 동안 고통받다가 병에 걸려 원래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죽은 경우도 있지만, 고문 이후 1개월 혹은 1년 뒤는 죽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고통에 신음하며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다.
고문 현장의 ‘미시정치’는 바로 절대 권력의 행사와 절대 복종이다. 고문 이후의 ‘거시정치’는 서서히 죽어가는 피해자를 모든 사람들이 듣거나 보게 만들고, 이런 주변 사람들이 그 권력의 무서움을 깨닫고 움츠러들도록 한다. 수사관, 즉 고문자로 표상되는 권력은 바로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람을 이렇게 완전히 굴복시키고 항복을 받아내 위세를 과시한다. 피의자가 폭력 앞에 굴종하는 것을 바라보는 권력자는 무한대의 자기만족을 느끼고, 자신의 권력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계속 향연을 즐기고 싶은 그들김근태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인간백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백정에게 칼을 휘두르라고 지시한 사람들은 지금 시퍼렇게 살아서 요직에 있고, 피해자가 아무리 고문을 호소해도 못 본 체하며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판사들이 아직도 현직에 있거나 정치권, 재야 법조계에서 호의호식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고문당한 사실보다는 그들이 간첩이었다는 것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던 언론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1·2등 신문이다. 이제 그들은 고문이라는 방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됐지만, 자신이 가진 권력 기반을 활용해 앞으로도 계속 향연을 즐기고 싶어 이번 대선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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