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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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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이름을 빌린 폭력의 반복

등록 2012-09-13 07:54 수정 2020-05-02 19:26
지난 8월10일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1954년 독도의용수비대가 바위에 새겨놓은 한국령 표시석을 살펴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8월10일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1954년 독도의용수비대가 바위에 새겨놓은 한국령 표시석을 살펴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올해는 샌프란시스코조약이 발효된 지 60년이 되는 해다. 일본이 옛 식민지 영토를 반환하고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것을 공식화한 1952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은 이름 그대로 ‘평화’조약이다. 이 조약의 당사자는 소련·중국 등을 제외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47개국과 일본이다. 즉 일본이 48개국 앞에 장차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식화한 동아시아 전후 처리 과정의 결정판이 바로 이 조약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평화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그런데 한국은 이 조약 체결 과정에 초대받지 못했다.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일본과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독도와 전후 보상 문제도 제외돼

즉 한국은 이 중요한 조약 서명 당사자의 자격을 갖지 못하게 되어 일본의 침략전쟁을 처리하는 국제적 협의 과정에서 주체가 되지 못했고, 그 이후 일본과 양자 협의를 통해 과거를 매듭짓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독도는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일본이 반환하는 영토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일본이 계속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이 조약을 실질적으로 주관한 당사자가 미국이므로 이 조약에서 독도가 빠진 것은 한국을 이 협정 당사자로 포함시키지 말도록 강력하게 요구한 영국과 일본, 그리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미국에 책임이 있다. 1945년 8·15 직후 영국의 지도에는 독도가 한국 영토로 포함돼 있었고, 애초 미국도 그것을 한국에 반환해야 한다는 의견도 갖고 있었으나 일본 총리와 미 국무부 주일 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 등이 강력하게 반대해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이 조약에서 독도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 바로 전후 보상이었다. 한국이 조약국에서 빠짐으로써 한국은 국제적으로 일본의 보상을 받을 지위를 박탈당했다. 1965년 당시 한국인 강제동원자를 비롯한 일본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에게 끼진 피해에 대해 보·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자금의 형태로 한국이 일본의 지원을 받게 된 것도 이 샌프란시스코조약 때문이었다. 당시 협의 과정에서 일본은 한술 더 떠서 한국에 남아 있는 일본인들의 재산도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이 평화조약에서 일본의 전후 부흥과 동아시아 안보 기지의 역할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책임은 전혀 거론조차 되지 않았고, 그래서 일본은 자신의 과거를 부인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즉 이 조약이 1939년 이후 일본이 연합국을 침략한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으므로 그 이전의 일본의 조선·중국 침략과 식민화 부분은 아예 내용에 포함되지 않았다.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열린 도쿄 법정에서 점령군인 미군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처벌할 당시, 바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사실만 범죄의 범위에 포함했고, 식민지 침략 범죄, 식민지 주민에 대한 학살, 731부대의 악명 높은 생체실험, 강제동원과 성노예화, 조선인의 언어나 문화에 대한 말살 등은 반인도적 범죄의 범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이 조약 체결 당사자인 미국·영국·일본 등이 말하는 ‘평화’는 2차 세계대전 교전 국가, 즉 식민지를 개척했던 옛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평화를 말하는 것이었고, 식민지 지배와 억압을 반인도적 범죄로 보지 않았다. 실제 이 조약 체결 과정의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영국과 프랑스는 당시 시점에 식민지를 유지하고 있었고,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들이 식민지 유지에 대해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고, 오직 그들끼리의 ‘평화’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

공산주의가 아닌 모든 건 ‘자유’의 편

그래서 유엔헌장과 유엔 인권선언의 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전제한 이 평화조약에서 ‘평화’라는 허울 아래 한국과 중국의 일본 제국주의 폭력의 최대 피해자들, 강제로 동원돼 노력에 종사하다가 사망했거나 성폭력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 보·배상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한국과 대만은 일본과 교전하지 않았고, 또 대다수가 식민지 지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완전 식민지, 즉 제국주의 폭력에 의해 완전히 굴복하면 ‘평화로운 사회’가 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말하는 평화 개념의 기만성을 엿보게 된다. 즉 폭력적 지배가 완벽해서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 노예는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존재이고, 그러한 지배는 폭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저항이 없는 한 식민지 지배나 인종차별은 곧 ‘평화’인 셈이다.

일본이 미국 등 연합국에 공격을 감행한 것은 ‘평화를 위반한 범죄’이므로, 이 전쟁 범죄자들을 처벌하자는 것이 애초의 도쿄 재판이었다면, 샌프란시스코조약은 그 재판의 결과를 수용해서 전후 처리를 매듭지음과 동시에, 침략으로 빼앗은 영토를 각 나라에 반환하고, 피해를 끼친 나라들에 대해서는 보상을 한 다음 일본을 평화국가로 다시 탄생시키겠다는 내용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 과도한 징벌을 가하면 1차 세계대전 뒤의 독일처럼 또다시 경제적 곤경에 빠져 이웃 나라를 침략할 위험성이 있으므로,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려고 징벌은 최소로 하고, 그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공산주의 전선의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조지 오웰의 에 나오는 당의 슬로건이다. 이 역설처럼,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관련 협의는 사실상 한국전쟁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수십만~수백만 명의 사람이 전투 현장과 제2전선에서 목숨을 잃고 있었고, 민족 구성원 간의 증오와 적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전쟁이 발생한 마당에 미국·영국·일본은 과거 전쟁(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고 일본은 ‘자유세계’로 복귀했다고 선언했다. 즉 공산주의가 아닌 모든 것은 곧 ‘자유’였고, 일본이 주변국과 연합국을 침략하지 않는 것이 곧 ‘평화’였으며, 자신들이 소련·중국·북한을 대상으로 전쟁을 하는 것은 곧 ‘평화’의 다른 면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대한민국 주권의 모든 것을 유엔, 즉 미국에 양도했다. 군사작전권, 미군에 대한 기지 제공에서부터 주둔군 미군이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에 대한 재판권도 포기했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은 전쟁을 수행한다는 이유로 특별조치령을 발표해 적에게 협력하리라는 의심만으로도 민간인을 체포해 재판 절차 없이 처형, 즉 학살을 자행했다. 전선이 불리해지자 길거리의 청소년까지 잡아서 전선으로 보냈고, 이들의 억울한 항변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그것은 일제 식민지 시절을 능가하는 폭력과 예속이었다. 그런데 미국과 한국 정부는 한국의 미국에 대한 예속, 한국인들의 이승만 독재에 대한 예속 상황을 ‘자유세계’라 불렀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은 자유를 위해 투쟁으로 공식화돼 있다.

이승만의 대마도 반환 요구, 평화선 선언이나 동해 조업 중인 일본 어선 나포 등의 행동은 겉으로는 대단히 강경한 대일 자세인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실효를 발휘할 수 없는 헛발질에 불과했다. 한겨레 자료

이승만의 대마도 반환 요구, 평화선 선언이나 동해 조업 중인 일본 어선 나포 등의 행동은 겉으로는 대단히 강경한 대일 자세인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실효를 발휘할 수 없는 헛발질에 불과했다. 한겨레 자료

아무 실효성 없던 이승만의 대일본 허세

샌프란시스코회담에서 한국 정부가 배제되자 이승만 정부와 존 무초 주한 미 대사는 한국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한국에 끼친 피해 보상 문제는 일본과 한국의 양자 간의 회담에서 해결할 수 없고, 오직 한국이 국제무대의 한 주체가 될 때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자신의 입지를 훨씬 좁혀놓은 상태였다. 우선 대한민국 정부 각 부처의 모든 구성원이 일본과 투쟁했던 독립운동가 출신이 아니라, 일본의 지배에 적극 협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일본에 과거 범죄를 성토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고, 일본의 지배가 조선인의 자발적 의사에 따른 것이었다는 미국·일본·영국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었다. 둘째, 이승만은 1950년 2월16일 일본에서 맥아더와 만난 자리에서 “공산주의 팽창으로 인한 위험하에서 한국과 일본은 단결해야 하며, 과거의 적대관계는 망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미국 주도의 반공정책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수용한다는 말이었다. 즉 미국의 안보전략은 일본 부흥 우선 정책이고 그것을 위해 한국과 일본을 묶자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일본 징벌 포기를 의미했다.

즉 이승만 정부는 일본을 강하게 불신하며 일본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으나, 실제로는 일본 위주의 미 안보전략에 심각한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일본과 반공동맹을 결성하자고 강조한 셈이었다. 이승만의 대마도 반환 요구, 평화선 선언이나 동해 조업 중인 일본 어선 나포 등의 행동은 겉으로는 대단히 강경한 대일 자세인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실효를 발휘할 수 없는 헛발질에 불과했다. 이승만 정부는 독도가 한국 영토인 근거, 일본에 강제동원된 한국인 수가 몇 명인지 그들이 입은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일본이 조선 지배 기간에 살해한 조선인이 몇 명인지, 물적·인적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조차 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에 의한 피해, 특히 제국주의 폭력에 의해 신음하고 있던 한국인들과 해방이 되었는데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재일조선인들의 고통에 대한 지식과 공감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스스로 폭력을 행사한 경찰국가였을 뿐 아니라, 폭력과 전쟁을 평화라고 강변하던 미국과 일본의 충성스런 동맹국이었다.

결국 한국 정부는 겉으로는 미국에 항의하는 모양을 취했으나. 실제로는 항의할 수 있는 어떤 힘도 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식민지 40년 동안 폭력의 피해자였던 조선인들은 해방이 된 뒤에도 계속되는 폭력에 노출되었다. 태평양 건너에서 평화의 노래가 합창되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은 또다시 죽어가고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 중에는 처음으로 지난 8월10일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일 강경 자세는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계속됐다. 제67주기 광복절 축사를 통해 이 대통령은 일본에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있는 조처를 촉구했다. “일본은 우리의 가까운 이웃이자 우방이며 동반자”라면서도 “과거사에 대한 사슬이 한-일 양국뿐 아니라 동북아의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지체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양국 차원을 넘어 전시 여성 인권 문제로서 인류 보편적 가치와 올바른 역사에 반하는 행위”라며 “일본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샌프란시스코조약 망각한 MB 돌출행동

이 행동과 발언에 대해 한편에서는 대통령이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박수를 쳤지만 다른 편에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려던 정부가 갑자기 그것과 전혀 상반되는 행동을 한 것을 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비판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조약과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인해 법적으로 한국이 일본에 요구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어졌다. 이명박의 독도 방문이나 대일 강경 발언 역시 이 평화와 자유의 이름을 빌린 한반도 전쟁 체제,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끼지도 못한 한국의 실제 처지를 바꾸기보다는 그것을 망각한 돌출행동에 불과했다. 전후 동아시아 체제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과 성찰이 있었다면 집권 초기부터 일관되게 행동해야 했고, 또 달리 행동해야 했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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