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배고픈 청년들은 노동자들을 팼다


경찰과 내통한 폭력 용역은 군사정권·해방공간에서 지겹도록 보아온 것
‘공산당’에서 ‘종북’ 때려잡기로 바뀌었지만 변함없는 건 배고픈 청년들
등록 2012-08-22 05:50 수정 2020-05-02 19:26

2012년 7월27일 경기도 안산의 자동차 부품회사 SJM에 컨택터스라는 용역회사 직원들이 투입돼 새벽 농성 중인 노동자들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했다. 용역 직원 300명이 소화기통과 작업장 내 쇳덩이 등을 던지며 노조원 150여 명을 공장 밖으로 내몰았다. 노조원들이 경찰에게 ‘사람이 다쳤다’ ‘살려달라’ ‘119를 불러달라’고 소리쳤지만 경찰은 들은 척도 안 했고, “부상자가 피를 흘리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것을 보고도 경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회사와 협의하에 이루어진 용역 직원들의 폭력은 국가기관이 자신의 편이라는 확신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 폭력을 행사한 컨택터스의 한 이사는 “종북세력 때려잡는다는 사명감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컨택터스 등 경비회사는 이번 SJM뿐만 아니라 상신브레이크·유성기업·KEC 등 노사분규가 일어난 여러 사업장에서 잔인한 폭력 행사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30일 오후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의 자동차 부품업체 SJM 회사 정문을 용역 업체 직원들이 지키고 있다. 안산/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30일 오후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의 자동차 부품업체 SJM 회사 정문을 용역 업체 직원들이 지키고 있다. 안산/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깡패에게 “이년, 저년에게 먹여라” 지시

이번처럼 세간의 비난이 거세지면 경찰이 이들 용역업체를 압수수색하는 등 처벌하는 시늉을 하고 곧바로 허가를 취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임원을 바꿔 새로 등록을 신청하면 다시 허가를 받아 활동한다. 정치권의 비호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컨택터스 홈페이지에는 자신들이 이명박 대통령을 경호했으며 법무법인 영포가 법률자문을 맡는다고 나와 있다. 이들의 투입을 요청하는 회사, 경찰, 그리고 용역회사 간의 유착 의혹도 있다. 폭력 사건 전후에 회사 사장이 경찰과 ‘딜을 본다’고 한다. 몇 명은 빼주고 몇 명은 벌금으로 나오게 해준다는 식으로 미리 판을 다 짜놓고 현장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역업체 허가 취소 가능성을 고려해 수억원대의 이면계약을 맺는다고 한다.

파업 현장에 폭력배들이 난입해 조합원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고 경찰은 못 본 체하고,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유야무야되는 이 장면들은 군사정권 시절 우리가 지겹도록 보아온 일 아닌가? 1978년 2월21일, 동일방직 노조 정기총회를 위한 대의원 선출일이었다. 노조원들이 투표하러 나갔을 때 고무장갑을 낀 괴한들이 나타나 똥 든 양동이로 들고 와서 조합 간부들의 머리에 뒤집어씌우고 입으로 쑤셔넣고 가슴에 집어넣고 걸레에 묻혀 얼굴에 문대고 있는데, 회사 쪽 어용 지부장 입후보자는 깡패들에게 “이년에게 먹여라, 저년에게 먹여라” 하고 지시했는가 하면 치안 유지를 위해 동원된 정복 경찰관들은 도와달라고 외치자 “야 이 쌍년들아 입 닥쳐”라고 욕설만 퍼부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며칠 뒤 강론에서 “치안 유지를 위해 나온 경찰이 이같은 만행을 보고 방관했다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 통탄할 만한 일입니다”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찰은 폭력 사태를 방관한 경찰을 입건하지 않았고, 거꾸로 그해 3월26일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단상에 뛰어올라 억울함을 호소한 여공 6명을 현장에서 체포·구속했다.

전체주의·독재 국가는 공식 경찰이나 군인 등 치안요원뿐 아니라 비공식 치안요원이자 준군사조직, 즉 폭력배들에 의해 지탱된다. 이들은 권력자에게 반대하는 세력이나 파업 노동자들에게 폭력과 학살을 자행하는 데 경찰과 군대 등 공식 조직보다 훨씬 더 잔인하다. 보스니아 사태 당시 세르비아 아르칸 민병대인 타이거, 르완다의 인테라함웨, 수단의 잔자위드, 스페인 내전기의 팔랑헤 등은 악명 높은 사설 테러조직이었다. 경찰 등 공식 치안조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대자본이나 극우세력이 공권력만으로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사적으로 테러세력을 고용한다. 그러나 사실 전근대 시절부터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대까지 각 나라에서는 사설 경비업체, 즉 자본이 고용한 사설 폭력조직이 정부의 치안 기능을 보완·대신해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사설 보안조직의 규모가 경찰의 4배나 되고, 세계적으로도 1990년대 이후 민간 보안산업이 매년 20% 이상 성장했다고 한다.

총파업에 동원된 ‘장군의 아들’ 부하들

한국에서는 아직 국가기관이 제 역할을 못하던 해방 정국이 그 전성기였고, 신자유주의 시대, 특히 이명박 정부 이후 사설 폭력조직이 더욱 활개를 치고 있다.

1946년 초 좌익의 세가 강했던 경성전기주식회사(경전) 노조원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이 일주일째 접어들자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청장이 우익 행동대장인 김두한을 은밀히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경찰은 구속된 조합원을 석방하고 김두한 부하들은 석방된 노조원을 체포해 남산의 ‘김두한 지하실’로 끌고 가 고문·폭행을 가한 뒤 전차 열쇠를 찾아내 전차를 가동시키고 파업을 진압했다. 그 무렵 서울 영등포 태창방직에서 파업이 발생하자 김두한의 부하가 여공을 성폭행하기도 했고, 곤봉 부대 500명은 파업 노동자들에게 매타작을 했다. 좌익계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파업을 주도했는데, 1946년 3월10일 이승만 계열의 우파 노동조합 단체인 대한노총이 이에 맞서 건설된 이후 대한노총은 대한민주청년동맹·서북청년단 등 우익 단체와 함께 경찰의 지원을 받아 파업을 저지하는 데 나섰다.

해방 뒤 서북청년회(이후 서북청년단)는 한국 우익 테러조직의 대명사였다. 해방 뒤 북한 공산화 과정에서 대량의 청년들이 남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이북에서의 친일 청산과 토지개혁으로 경제·사회적 지위를 상실했고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로 월남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남쪽에서 아무런 연고나 친척도 없었고 따라서 직장도 찾을 수 없었다. 실업 상태의 청년들에게 ‘좌익 때려잡기’의 그럴듯한 명분을 주고 먹고 잠잘 수 있는 곳을 제공하는 근거지가 바로 서북청년회였다.

서북청년회 산하에는 대동강동지회 등 여러 개의 동지회가 있었는데, 이들은 좌익 타도의 주요 행동대원 역할을 했다. 이북 출신 중 서울의 주먹계를 주름잡았던 청년들이 이 동지회의 주요 멤버였다. 당시 이 조직의 부회장을 했던 문봉제는 “피비린내 나는 살상, 그것이 서청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서북청년단은 입법·사법·행정의 3권 위에 군림하던 특권 부대였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도 이 조직의 간부였다. 안두희는 서북청년단 총무부장 시절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 한국지부에 포섭됐으며 김구 암살 당시 이 기관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서북청년단의 대활약

좌익 계열 노동자들의 파업에는 언제나 경찰의 비호·지원하에 이들이 출동해 파업 노동자를 마구 구타해 현장을 피로 물들이고 파업을 진압하는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의 최대 역할은 1948년의 5·10 선거와 제주 4·3 사건 진압 과정에서 발휘됐다. 미국의 한국 현대사 연구자인 존 메릴은 이렇게 지적하기도 했다. “그들(서북청년)이 부여받은 특별한 임무는 모든 주민을 방문하여 그들이 선거를 반대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서 그들로 하여금 투표장에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곤봉과 야구방망이를 들고 설쳐대던 이들 깡패들은 무고한 인민들을 잔인하게 두들겨팼으며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협박하면서 돌아다녔다”, “800여 명의 서북청년단이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4·3 봉기 직후 제주의 부락 요소요소에 투입됐다. 이 증강된 병력은 ‘붉은 섬’에 정착하는 대가로 돈을 받았다. 서북청년단원들은 적어도 이치적으로는 자신의 역할을 치안대로 한정시켜야 한다는 선조차 무시하고 활동하였으며 북쪽에 있던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올라 남로당에 대항하는 투쟁의 수단으로 테러행위를 채택하여 무자비하게 자행하였다. 제주도는 극단적인 두 집단으로 나뉘어져서 금품 갈취, 그와 유사한 범죄행위들이 판을 쳤으며 그들의 부정은 오히려 당국에 의해 보호받는 실정이었다.”

이들 상당수는 한국전쟁 직전 경찰·군 공식 조직으로 편입됐는데, 군 조직 내에서 이들의 위세는 공식 조직을 압도했다. 육사 5기의 3분의 2가 서북청년단 출신이었다. 포병대대에서 서북청년단 출신 병사들은 신참 장교를 구타하기도 했으며 다른 병사들을 사병 부리듯 했다. 병사들은 후환이 두려워 장교들의 말보다 서북청년단의 말을 더 듣기도 했다.

서북청년단의 배후에는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청장이 이끄는 군정경찰이 있었고, 이승만은 이들의 정치적 후원자였다. 조병옥과 장택상은 금전적으로 이들의 테러 행위를 지원했다. 좌익 소탕에 성과가 컸을 때 이들은 우익청년들의 합숙소로 은밀히 찾아가 잔칫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미군정의 하지 중장이 무차별적 테러로 문제가 된 이 조직을 해산시키라고 말하자, 조병옥은 이들의 행동에 다소 불법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열렬한 반공 우익단체를 해산한다고 하는 것은 미군정의 본래 임무와 사명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하며 서북청년단을 두둔했다. 결국 미군정과 서북청년단은 협력 관계를 맺게 됐다.

해방 직후의 우익 테러조직은 반공주의라는 이념에 따라 움직인 것처럼 보이나, 실제 개인들의 참가 동기는 바로 배고픔 해결이었다. 결국 그들은 끼니를 위해 반공 전위 역할을 한 셈이었다. 기업인과 전통적 특권층, 평안도 출신 유지들이 서북청년단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그리고 당시 정부였던 미군정은 식량 배급을 해주었고 경찰로 진출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때때로 이들은 부호들의 금품을 갈취하거나 후원금을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타나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과거의 우익 테러조직이나 오늘 파업 현장에 투입돼 농성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용역 직원들의 행동의 동기는 거의 동일하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앞의 용역업체에 들어왔다는 한 대학생은 “긴급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살기 위해 봉을 휘두른다”고 말하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떳떳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을 안 하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자신의 처지를 토로한다.

“이것 안 하면 달리 할 일이 없다”

해방 정국의 우익 테러세력은 먹고살려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가했고, 이승만이나 극우 세력은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오늘의 청년 실업자들도 먹고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고소득 ‘업무’에 나서고 있지만, 이들이 물리적 충돌 과정에서 신체를 다쳐도 정부와 회사는 이들을 버릴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우익 테러의 명분은 동일하다. 과거의 ‘공산당 때려잡기’가 오늘의 ‘종북 때려잡기’로 변한 것밖에 없다. 우익 테러세력이 이제 합법적으로 설치된 회사의 직원이라는 점이 과거와 달라진 점일까?

사설 테러조직이 공권력을 대신하는 나라에서 국가란 도대체 무엇일까?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