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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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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의심 과정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
등록 2019-10-03 12:49 수정 2020-05-03 04:29
2차 피해를 당한 성폭행 피해자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2차 피해를 당한 성폭행 피해자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의 내용이 있습니다.
18살 소녀 마리가 강간당한다. 경관에게, 형사들에게, 병원에서, 경찰서에서 그리고 자필로, 공포와 충격과 피로에 휩싸인 채 마리는 피해 사실을 말하고 또 말한다. 하지만 마리의 말은 어느새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경찰은 “허위 진술은 범죄”라며 피해자를 위협한다. 결국 마리는 눈앞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진술을 번복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된 마리에겐 비난이 쏟아지고, 경찰은 다시 그를 허위신고죄로 기소한다. 살아남았을 뿐인데 범죄자로 몰리고 만 여성, 넷플릭스 (원제 Unbelievable)는 이 믿을 수 없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다.

거짓말쟁이로 몰린 피해자

마리가 미국 워싱턴주 린우드에서 강간당한 지 2년5개월이 지난 뒤, 콜로라도주 골든의 스테이시 갤브레이스 형사는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성폭행 사건을 맡고, 인근 웨스트민스터에서도 유사한 방식의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해당 관할서의 에드나 헨더샷 형사와 함께 연쇄강간범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추적한다. 5주 뒤, 그들은 범인을 체포한다. 범인의 메모리카드에서 마리의 신상이 담긴 사진이 복원된 뒤에야 마리는 피해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언론인 T. 크리스천 밀러와 켄 암스트롱은 이 사건을 취재해 쓴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라는 기사로 2016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최근 국내에도 발간된 동명의 저서에서 이들은 “우리는 강간 피해자가 자주 마주치는 의심의 역사를 따라가보고 싶었고 형사들을 잘못된 수사로 빠지게 하는 편견과 가정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두 사람의 책을 바탕으로 각색된 는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잘못된 방식과 적절한 방식을 마치 교본처럼 보여준다. 마리(케이틀린 디버)를 담당했던 남성 형사들은 절차에 따라 업무를 수행할 뿐 정작 피해자의 진술과 반응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이 신경 쓰는 것은 진술이 ‘사소하게’ 어긋나는 지점뿐이다. 2화에 등장하는 캐런 듀발(메릿 위버) 형사가 또 다른 피해자 앰버(대니엘 맥도널드)의 진술을 듣는 과정 역시 절차에 충실하나 린우드의 형사들과 대조적이다. 캐런은 모든 수사 과정에서 그것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피해자의 동의를 구하며, 그의 파트너인 그레이스 라스무센(토니 콜렛) 형사 역시 피해자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성폭행 피해자라면…’이라는 왜곡된 시선

성폭력 교육에서는 ‘피해자다움’이라는 상(이미지)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성폭력 생존자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인해 외부 관찰자가 된 듯한, 즉 사건이 자신과 유리돼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겉으로 보이는 정상적인 자신과 외상으로 인한 압도적 감각과 정서를 체험한 자신으로 분리되기도 하고, 사건 직후 부정적 감정을 느끼거나 드러내지 않다가 시간이 흐른 뒤 감정을 폭발시키는 경우도 있다. 파편화한 기억이 맥락과 논리 없이 떠오르기도 하고, 놀랍게도 웃음이 강력한 회피 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피해 사실을 직시하며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반응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기에, 같은 ‘강간’ 피해자라 해도 ‘같은’ 강간 피해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과거 성폭력 피해자였던 마리의 위탁모 주디(엘리자베스 마블)조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리를 재단하며 의심하고, 그로 인해 마리를 향한 경찰의 시각은 왜곡된다. 강간범들이 ‘강간 과학수사 가이드’로 공부해가며 ‘완전범죄’를 꿈꾸는 세상에서, 피해자를 향한 낮은 이해도가 2차 피해를 부른 것이다.

는 강간범을 세상과 동떨어진 악마로 그리는 대신, 여성 대상 범죄가 만연한 사회에서 경찰마저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이 이 시스템의 빈틈을 비집고 나와 ‘강간문화’ 속에서 태연히 범행을 저질러온 남자들의 얼굴을 드러낸다. 신앙심이 깊고 완벽주의자인 캐런과 냉소적이고 터프한 그레이스의 팀워크는 물론 인종, 연령, 외모가 다양한 피해자들과 여성 수사관들이 각자 유의미한 역할을 하는 과정은 여성 서사로서도 장르 드라마로서도 뛰어나다. 여덟 편의 에피소드 중 다섯 편을 여성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유치장에서 복면도 무기도 없이 나신으로 서 있는 범인의 초라하고 굴욕적인 모습을 카메라가 찬찬히 비추는 장면이다. 강간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여성 피해자의 몸이 반복적으로 전시될 때와 전혀 다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끝낼 때가 된 이야기

이제 드라마에서 현실로 돌아와보자. 범인 마크 오리어리는 법정 최고형인 ‘327년 6개월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그가 체포되고서야 삶의 출구를 찾은 마리는 형사들에게 감사 전화를 걸었다.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돌아보자. 최근 전국 200여 개 여성인권단체는 강간죄 개정을 위한 총궐기에 나섰다. “형법 제297조 (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에서 강간죄 구성 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을 촉구했다. 지난 9월25일 10살 아동에게 술을 먹인 뒤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35살 남성에게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징역 3년의 확정판결을 내렸다. 1심에서는 가해자가 피해 아동의 몸을 누른 혐의가 ‘폭행·협박’에 해당한다고 보고 징역 8년을 선고했지만, 항소심 재판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미성년자의제강간죄를 적용해 징역 3년을 선고한 것이다. 성인이 초등학생에게 소주를 먹이고 강간해도 ‘폭행 또는 협박’을 ‘증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끝낼 때가 됐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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