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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직시] 최고 코미디쇼 ‘유미 유니버스’

돌팔이 성형외과 의사·싫은데 하는 스타일리스트 등 디테일한 ‘ASMR 1인극’
등록 2020-10-31 09:24 수정 2020-11-02 02:00
코미디언 강유미는 자신의 유튜브 <좋아서 하는 채널>에서 관찰력, 취재력, 상상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ASMR 1인극’을 펼친다. 유튜브 ‘좋아서 하는 채널’ 갈무리

코미디언 강유미는 자신의 유튜브 <좋아서 하는 채널>에서 관찰력, 취재력, 상상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ASMR 1인극’을 펼친다. 유튜브 ‘좋아서 하는 채널’ 갈무리

만약 2020년 말 유튜브 콘텐츠를 포함한 연예대상 시상식을 연다면 코미디 부문 최고 연기자상은 강유미가 받아야 한다고 외치고 싶다. (강력한 경쟁자로 김신영의 ‘둘째 이모 김다비’가 있지만, 이쪽은 가요대상으로 보내도록 하자.) 그리고 최고의 캐릭터 후보에는 강유미의 ‘도믿걸’이 꼭 들어가야 한다. 혹시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면 지난 6월 강유미의 <좋아서 하는 채널>에 올라온 ‘도를 아십니까 롤플레이’ 영상을 재생해보길 권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울 강남역 1번 출구에서 ‘도나 기를 믿으십니까?’라는 문장으로 대표되는 사이비 종교 전도인에게 붙들린 채 20분이 사라져버리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눈 깜박임조차 없이 은은하게 광기 어린 시선, 기능적 용도 외에 어떤 미감도 찾아볼 수 없는 패션, 일단 말을 한번 섞고 나면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 화법 등 속칭 ‘도쟁이’들의 특징을 완벽하게 연기한 강유미는 “베풀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에 새 장르 개척

2017년 4월 유튜브를 시작한 강유미는 먹방, 패션, 여행, 뷰티 등 다양한 주제의 영상을 선보였고 ASMR(자율감각 쾌락반응. 특정 자극으로 심리적 안정이나 쾌감 등을 느끼게 하는 음향이나 영상) 역시 그중 하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팅 사운드’(Eating Sound·먹는 소리)나 ‘태핑’(Tapping·사물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 영상보다 ‘전 남자친구 결혼식에 가는 손님을 만난 피부관리실 직원’ 등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설정한 롤플레이(역할연기) 영상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5월 ‘싫은데 하는 메이크업 샵’에 이어 ‘도를 아십니까’ 영상이 대박 난 뒤, 강유미는 6개월 동안 무려 37개의 ASMR 영상을 올렸다. 이 영상들의 누적 조회수는 10월29일 기준 2693만 건이 넘는다.

KBS <개그콘서트>에서 ‘GO GO 예술 속으로’ ‘사랑의 카운슬러’ ‘분장실의 강 선생님’ 등 수많은 코너를 히트시켰던 강유미는 공개 코미디 시대가 저물고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를 맞이하며 다소 부침을 겪었다. 그러나 ASMR 1인극은 그가 만들어낸, 그를 위한 장르다. 여중, 여고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며 남자 배역을 도맡았던 경험과 데뷔 전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기른 관찰력은 강유미가 폭넓으면서도 디테일한 연기를 펼치는 바탕이다. 그는 여성 환자에게 능글맞게 웃으며 무례한 말을 툭툭 던지는 ‘돌팔이 성형외과 의사 롤플레이’에서는 이른바 ‘개저씨’라고 할 만한 중년 남성의 특징을 완벽하게 재현해 풍자하고, ‘09년생 5학년 초등학생 유튜버’를 연기할 때는 “요즘에 저학년들 화장이 점점 두꺼워지는 것 같다”는 우려를 통해 고학년의 치기 어린 자부심을 표현한다.

피로 찌든 서비스노동자들의 “안-녕하쉽니까↗”

무엇보다 강유미의 장기는 서비스업 종사자 혹은 여성 노동자를 그려내는 디테일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싫은데 하는 스타일리스트’나 ‘세일 기간에 바쁜 화장품 매장 직원’ 등 달갑지 않은 노동을, 그럼에도 성실하게 수행한다는 설정이다. 식사 중에 찾아온, 혹은 바빠 죽겠는데 말 시키는 고객을 향해 귀찮은 시선을 던지면서도 기계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이들에게서는 피로에 찌든 친절이 배어나온다. 음성을 한 톤 높여 “안-녕하쉽니까↗ 퓌료(필요)한 것이 있으시며언~ 말-씀해주십시오↗”라는 영업용 멘트를 외치는 동시에 동료에게 낮고 빠른 말투로 업무를 지시하는 직원의 캐릭터는 방금 ‘올리브영’ 매장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다.

강유미는 이들이 실제 느끼는 감정과 겉으로 드러내는 감정의 간극을 정확히 포착해 ‘자본주의 미소’와 함께 보여준다. 그래서 ‘마감 시간 커피숍 알바’는 동전을 잔뜩 내밀며 계산해달라는 손님에게 차분한 체념을 담아 “집에 있는 돈을 다 꺼내오셨나봐요”라고 말하며 동전을 하나하나 세고, ‘세븐 세컨즈 매장 직원’은 암내 나는 옷을 환불해달라는 손님을 응대하며 “백 번을 빨아도 천 번을 빨아도 지워질 것 같지 않다”고 조용히 웅얼댄다.

15~30분의 영상이 지루하지 않으면서 입체적인 인물의 서사를 풍부하게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연기자이자 작가이며 연출자인 강유미의 관찰력과 취재력,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다시 심각해지던 9월 말에 올라온 ‘음압병동 간호사 롤플레이’에서 그는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음압병동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단호하면서도 노련한 태도로 환자들을 돌보고, 고된 업무 사이에도 맛있는 도시락 반찬 하나에 즐거워하는 평범한 생활인이자 헌신적 의료인을 연기했다. 이 영상에는 전·현직 음압병동 간호사들의 감탄과 고마움이 어린 댓글이 줄줄이 달렸고, 강유미는 최근 유튜브 수익금을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취약계층과 위기가정 아동을 위해 기부했다.

나른한 ASMR 뚫고 나오는 ‘쇼쇼쇼’

놀라울 만큼 성실하고 과로가 걱정되는 속도로 ASMR 영상이 쌓여가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유미 유니버스’다. 이 세계는 ‘배우병 심하게 걸린 여자 배우’가 ‘용화도령 무당’을 만나고 와서 ‘개념 없는 메이크업 샵 막내’와 ‘싫은데 하는 스타일리스트’ 때문에 짜증을 내다가 ‘돌팔이 성형외과 의사’의 연락을 받는 식으로 연결된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영상은 세계관 최강자 ‘도믿걸’의 소개팅이다. 한 구독자는 “팅글(Tingle·ASMR를 들었을 때 기분 좋게 소름 돋거나 나른해지는 느낌)은 이제 무의미해졌다. 나에게 이 채널은 이제 <코빅>(tvN <코미디 빅리그>)이다”라고 말했지만, 역시 구독자의 한 사람인 나에게 이 채널은 그냥 2020년 최고의 코미디쇼다. 그러니까 여러분, 천재 코미디언 강유미의 끝없는 도전을 위해 ‘구독’과 ‘좋아요’ 좀 베풀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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