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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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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직시] 왜 어른의 마음을 자막에 넣나요

어린이 출연 예능에서 보고 싶지 않은 것들
등록 2020-05-02 06:25 수정 2020-05-03 01:43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KBS)에 출연 중인 가수 개리의 아들 하오는 촬영 중에 “카메라 꺼요”라고 말한 뒤 “껐다”는 제작진의 확답을 받고 배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방송으로 나갔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화면 갈무리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KBS)에 출연 중인 가수 개리의 아들 하오는 촬영 중에 “카메라 꺼요”라고 말한 뒤 “껐다”는 제작진의 확답을 받고 배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방송으로 나갔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화면 갈무리

모니터 속 어린이의 귀여움이 ‘공공재’가 된 사회가 어린이에게 좋은 사회일 수 있을까? 어른의 시선에서 ‘재미있고’ ‘익숙한’ 어린이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어린이에게는 어떤 영향을 줄까? 8년째 인기리에 방송 중인 <슈퍼맨이 돌아왔다>(KBS)부터 최근 방송된 <어서와~한국은 처음이지?>(MBC에브리원) 벨기에 편에 이르기까지, 한국 예능이 어린이를 다루고 비추는 것에는 비슷비슷하게 문제가 되는 방식이 있다. 어린이 출연자 당사자는 물론 우리 사회에서 자라는 어린이를 위해서도,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른이 생각해볼 문제다. 어린이날을 맞아, 어린이가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른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리했다.

어린이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세요

‘국민 손주’가 된다는 게, 자신의 배변 교육 과정까지 온 국민 앞에 공개해야 하며 심지어 그것이 (아마도) 평생 영상으로 남는다는 것을 아는 어린이가 있을까? 육아 예능에서는 유아가 목욕하거나 대소변을 보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신체 일부를 모자이크 처리하거나 컴퓨터그래픽으로 가리기는 하지만, 당사자인 어린이가 자라면서 자신의 사적 영역이 침해당했음을 알고 느낄 수 있는 수치심 등의 감정을 고려한다면 이는 훨씬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이다.

영국 방송 제작 가이드라인의 ‘어린이·청소년 출연자 보호를 위한 사후 영향 관련 조항’에는 “비록 부모의 동의를 얻었다 해도, 는 제작 과정과 출연한 프로그램이 방송된 뒤 어린이 출연이 가져올 영향과 예상 가능한 결과를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다. 물론 한국 방송사에도 가이드라인은 있다. 문제는 방송이 우리 사회와 누군가의 미래에 끼칠 영향을 충분히 ‘주의 깊게’ 고려하지 않는 데 있고, 아직 이 문제에 책임을 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성역할 고정관념을 지워주세요

예능에서 성별로 어린이 캐릭터를 정의할 때 가장 흔히 쓰이는 표현은 ‘상남자’와 ‘천생 여자’이다. 전자는 활달하거나 잘 먹기만 해도, 후자는 외모를 꾸미거나 장난감을 정리하면 듣는 말이다. 출연자가 남아에게 여아의 옷을 물려주며 “누나라서 여자 옷 같아”라고 말하자, “누나는 핑크색 좋아해”라고 ‘초월 번역’한 자막을 달기도 한다.

남성이 자기 아이를 돌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성평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프로그램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들을 가리켜) 여성스러운 면이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든 남자답기를 바란다”거나, “딸이다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아빠들의 성역할 고정관념이 그대로 드러난다. 남아들이 만나 노는 장면에선 남성 양육자가 “남자는 운동하면서 친해지는 거야” “남자끼리는 뭔가 따로 인사하는 거야”라며 ‘남자’만의 법칙이 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자막 역시 성별과 전혀 상관없는 상황에서도 ‘의리’ ‘사나이’ 같은 표현으로 이를 강조한다. 방송 바깥의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제작진 인식만 업데이트되지 않는 건 왜일까.

‘러브라인’ 연출을 그만두세요

드라마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첫사랑’에 집착할까. 예능에서는 여아와 남아가 얼굴만 마주치면 자막부터 난리가 난다. “부끄부끄” “두근두근” “핑크빛 첫사랑” “풋풋한 로맨스” 등 원래 같이 잘 놀던 아이들이든 지나가다 잠시 스친 아이들이든 커플로 엮느라 어른들만 북 치고 장구 친다. 그냥 함께 놀거나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데 애절한 배경음악과 호들갑스러운 내레이션 속에 어린이 사이의 친밀감이나 호기심 같은 감정은 몽땅 ‘로맨스’가 된다.

어린이의 사소한 언행을 성인의 전형적인 이성애 각본에 끼워맞춰 과잉 해석하다보니 여아는 수줍은 소녀나 도도한 누나로, 남아는 든든한 오빠나 ‘매너남’으로 연출되는 과정에서 성역할 고정관념도 다시 한번 고착된다. 정작 당사자인 어린이는 자신이 방송에서 어떤 식으로 비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고 반론하기도 힘들다는 면에서 보호자와 제작진의 책임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외모 평가를 멈춰주세요

어린이가 나오는 예능에서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찬사는 “귀여워”, 그다음은 “예쁘다”일 것이다. 남아에게는 외모에 관해 자주 언급하지 않는 것과 달리, ‘예쁜’ 여아에게는 내레이션과 자막으로 “예쁘다” “공주님 같다”는 찬사가 쉼 없이 쏟아진다. “지금도 예쁜데 더 예뻐지면 어떡하죠?” “세수하니까 더 예쁘죠?” 예쁘다는 말은 칭찬이니 괜찮은 걸까? 그렇다면 화장놀이를 하는 3살 여아에게 ‘치명’ 같은 자막을 넣는 건 어떨까? 가족과 함께 예능에 출연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8살 여아가, 최근 유튜브에 올린 영상에서 ‘살이 많이 쪄서 고민이다. 화장해야 할 것 같다’며 자기 외모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자매와 비교하는 모습은 어린이의 미디어 노출과 외모 강박 문제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한다.

영화 <우리집>의 윤가은 감독이 작성했던 촬영 수칙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어린이들의 외모나 신체를 어른의 잣대로 평가하는 단어는 신경 써주시기 바랍니다. (중략) 예쁘다, 날씬하다, 말랐다, 귀엽다 같은 외모적 칭찬 시에도 어린이들이 집착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셔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방송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어른이라면 누구나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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