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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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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로 폭염과 싸우는 사람들

최악 더위에 시험대 오른 ‘에너지 빈곤층’ 대책…

장기적으론 주거 환경 개선이 근본적 해결책
등록 2018-08-07 07:05 수정 2020-05-02 19:29
8월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후암동의 한 쪽방촌. 온도계가 37도를 가리키고 있다. 류우종 기자

8월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후암동의 한 쪽방촌. 온도계가 37도를 가리키고 있다. 류우종 기자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저서 에서 쓴 표현이다. 이는 기후변화, 재난, 핵발전소의 사고 등 현대사회의 위험은 계층과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는 통찰이다. 하지만 2018년 여름 한국 사회에 한정해 이 명제는 수정된다. “빈곤은 위계적이고, 폭염 역시 위계적이다.” 계속되는 폭염에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지만,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제대로 켤 수 없는 ‘에너지 빈곤층’ ‘기후변화 취약계층’의 고통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겨울철 한파에만 초점을 맞춰온 우리 사회의 에너지 복지 대책이 사상 최악의 폭염 앞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전기료 아깝다” 선풍기도 못 켜

“올해가 특히 힘드네요.” 김정민 서울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은 올해로 3년째 서울 종로구 돈의동·창신동 등의 지하방, 옥탑방 등을 다니며 에너지 빈곤층 실태 조사에 참여했다. “3년 연속 같은 대상들을 찾아갔는데, 일단 실외와 실내 온도가 똑같죠. 어두운 방에서 대부분 거의 옷을 안 입고 그냥 계세요.” 그가 만난 사람들은 부채가 주 냉방수단이라는 이도 있고, 사용량이 거의 없는 전기요금 고지서를 내미는 이들도 있다. 선풍기도 “전기료 아깝다”며 손님이 와야 켜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어르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주민의 연락을 받고 찾아갔다가 탈진 상태로 쓰러진 노인을 발견한 적도 있다. 대부분 통풍이 잘되지 않는 낡은 집에 살고, 거동이 불편해 ‘무더위 쉼터’에 가기도 힘들어 집에서 시간을 주로 보내는 사람들이다. 정부의 에너지 복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 주민센터와 사회복지사들이 날마다 이들의 상태를 점검하지만 역부족이다.

물론 정부와 국회, 지방자치단체도 에너지 빈곤층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문제는 정부의 지원 대책은 겨울철 한파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중위 소득의 40% 이하인 생계급여와 의료급여 수급자 가운데 추위에 약한 만 65살 이상 노인·영유아·장애인 등(2017년 겨울 54만 가구)은 전기·도시가스·연탄 등을 살 수 있는 에너지 바우처(이용권·8만4천~12만천원)를 받을 수 있다. 연탄 쿠폰, 가스요금 할인·열요금 감면 등도 지원받는다. 하지만 에너지 바우처(11~5월)를 비롯해 각종 지원제도는 겨울에만 이용할 수 있다. 여름에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차상위 계층 등을 대상으로 하는 전기요금 할인(1만~2만원)과 생계급여에 광열비(냉난방비·취사비·전기요금)가 포함되는 것에 그친다. 냉난방비 지원은 경로당과 홀몸노인에게만 이뤄진다.

가난할수록 커지는 냉방비 부담

가스·등유·석탄 등을 쓰는 겨울철 난방비가 전기를 주로 사용하는 여름보다 비용이 더 들지만 저소득층에게는 여름철 냉방비 역시 부담이 크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에너지 빈곤층 추정 및 소비특성 분석’(2016년) 보고서를 보면, 최빈곤층인 소득 1분위(소득 하위 10% 이하) 계층의 8월 소득 대비 광열비 비중(2015년)은 14.50%로, 2분위(4.90%)와 3분위(3.49%), 10분위(1.09%)에 견줘 부담이 컸다. 폭염이 계속될수록 저소득층의 에너지 비용 부담은 커질 수 있다. 보고서는 에너지 빈곤층을 8.7%(약 160만 가구)로 추정한다.

게다가 현재 에너지 빈곤층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합의가 없기 때문에 ‘잠재적 빈곤층’도 있다고 봐야 한다. 현재 정부와 학계는 광열비가 경상소득의 10% 이상 차지하는 가구를 에너지 빈곤층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는 영국 기준을 가져온 것으로, 에너지경제연구원의 보고서도 “10% 기준은 가장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는데, 왜 10% 기준을 설정해야 하는지 논리적 근거는 찾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영국은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데 드는 에너지 비용을 기준으로 10%를 산정하지만, 한국은 적정 온도에 대한 고려 없이 단순 에너지 비용 지출로 에너지 빈곤층을 정의한다. 10% 기준은 냉난방비 부담으로 에너지 비용 지출을 꺼리는 저소득층 가구를 에너지 빈곤층에서 제외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이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에너지 빈곤의 실태와 정책적 함의’(2015년) 보고서는 “10% 기준은 에너지 비용이 많이 드는 고소득 가구를 포함하는 단점이 발견된다”며 “에너지 비용 과부담이나 적정 난방 미달로 중위 소득 50% 이하의 가구가 에너지 빈곤층이 될 위험이 크므로 점진적으로 중위 소득 50% 이하로 에너지 복지 지원 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과 한파가 해마다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전기요금, 연료비 지원 등의 ‘공급형’ 정책뿐만 아니라 장기적 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냉난방 효율이 떨어지는 낡은 집을 고치고, 전력 소비가 적은 가전제품으로 교체하는 등의 ‘효율형’ 정책과, 소규모 태양광 발전처럼 신재생에너지 설비를 보급하는 ‘전환형’ 정책이 같이 가야 한다는 시각이다.

비용 지원 정책에서 효율형·전환형으로

2000년 ‘주택 난방 및 에너지 절약법’을 통해 에너지 빈곤 해소를 정부의 역할로 규정한 영국은 연료비 지원을 기본으로 주택 에너지 효율 개선에 많은 예산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영국 저소득층 에너지 복지제도의 현황과 시사점’(2017년)은 “연료비 지원 제도와 요금 할인 제도가 소득 향상과 비용 감소를 통해 에너지 빈곤을 완화할 수 있지만, 주택 효율 개선이 가장 근본적 차원의 해결책이라는 시각이 영국 에너지 복지 제도 변화의 저변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노력은 장기적으로 온실가스 배출 감소 등 기후변화 대응력을 높이는 결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이정필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은 “에너지 빈곤의 일차적 원인은 저소득이다. 여기에 에너지 효율이 떨어지는 낡은 주택 거주, 정부의 에너지 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 부족, 에너지 가격 변동 등 원인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며 “에너지 복지 프로그램의 효과를 면밀히 검토해 에너지 비용 지원 위주의 정책에서 효율형·전환형 패키지 정책으로 확장해나가야 할 시점이다”고 말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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