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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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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에 타들어간 타향살이

일터는 땡볕 숙소는 찜통, 온열질환에 더 취약한 외국인 노동자…

건강권 사각지대에서 신음
등록 2018-08-07 13:51 수정 2020-05-03 04:29
강원 화천군의 한 오이밭에서 캄보디아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원 화천군의 한 오이밭에서 캄보디아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 국적의 알렉세예프 바지르(당시 25살)는 지난해 7월27일 인천공항에 내렸다. 무비자로 입국한 바지르가 한국에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최대 90일. 다시 말해 관광을 하지 않고 ‘몰래’ 일하면서 돈을 번다고 하더라도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10월24일까지였다.

바지르는 세종시로 갔다. 세종시에 아는 사람이 먼저 일하고 있어서다. 입국 6일째인 8월1일 바지르는 세종시의 한 공사장에 나갔다. 가설 울타리 안전 보호막 해체팀에 들어간 바지르는 오전 6시부터 밖에서 공사 자재를 정리했다. 오후 5시까지는 보호막에 고정된 핀을 제거했다. 오전 간식 시간 30분과 점심시간 2시간을 거칠게 빼도 8시간30분쯤 바깥에 있었던 셈이다.

폭염에 쓰러진 25살 러시아 청년

이튿날인 8월2일 오후 3시40분께 2층 통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바지르를 동료가 발견했다. 이날도 바지르는 오전 10시30분까지 밖에서 자재를 옮겼다. 오후에는 보호막을 해체했다. 기상청 지역별 상세관측자료를 보면 그때 세종시 온도는 33.8도를 치솟았다. 병원으로 옮겨진 바지르는 이튿날 새벽 5시35분께 숨졌다. 바지르가 한국에 온 지 8일째 되는 날이었다.

바지르의 사인은 열 손상, 다발성 장기 부전, 심폐 정지였다. 열사병으로 몸속 장기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멈췄다는 뜻이다. 바지르의 일당은 10만원이었다. 이를 2일 기준 환율로 단순 계산하면 5605루블이다. 올해 러시아 한 달 최저임금(9489루블)의 절반이 넘는 액수였다. 바지르는 한국에서 이틀만 일해도 꽤 큰돈을 벌었던 셈이다. 바지르는 목숨을 잃고서야 유족급여와 장례비를 ‘목숨값’으로 보상받았다. 그나마도 근로복지공단에서 업무상 사유로 숨졌다는 사실을 인정해 산재 보상이 가능했다.

당시 바지르의 산재 보상 신청을 위임받았던 안건수 이주민노동인권센터 소장은 과 한 인터뷰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은 불법 체류자가 많아 단기간에 목돈을 만들기 위해 더워도 참고 일해 폭염에 장시간, 반복적으로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며 “바지르는 공사금액이 2천만원이 넘는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열사병으로 숨졌고, 고용주가 조사에 협조적이어서 산재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최근 외국인 노동자의 온열질환 발병률이 한국인의 4배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채여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지난해 발표한 ‘국가 리스크 관리를 위한 기후변화 적응역량 구축·평가’ 보고서를 살펴보니 외국인 노동자 대비 외국인 온열질환자의 비율은 2012년 0.10%, 2013년에 0.13%, 2014년에 0.09%, 2015년 0.12%였다. 같은 기간 한국인 온열질환자 발병률은 2012년 0.03%, 2013년 0.03%, 2014년 0.02%, 2015년 0.03%였다.

2015년 기준 외국인 노동자 1만 명 가운데 12명꼴로 온열질환에 걸렸다면, 한국인 1만 명에 3명꼴로 발병한 셈이다.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인 온열질환자의 연령대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외국인 노동자의 발병률이 한국인보다 2012~2015년 연평균 3.9배나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채 선임연구위원은 에 “등록 외국인과 외국인 온열질환자를 단순 비교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불법 체류 외국인까지 고려하면 온열질환 발병률은 더 높아질 수 있다”며 “한국 기후에 익숙하지 않은 불법 체류 외국인들이 공사장이나 논밭 등 열악한 실외 작업장에서 주로 낮은 임금으로 장시간 일하는데다 폭염 특보에 대한 정보 접근성도 떨어져 폭염에 취약할 것이다”고 했다.

온열질환 발병률 한국인의 4배

지난해 기준 건설업에 취업한 외국인 노동자는 9만300명, 농림·어업은 4만8300명으로 집계됐다. 광업·제조업(38만2900명)과 도소매·음식·숙박(15만4700명), 사업·개인·공공서비스(14만8400명)에 이어 4~5번째로 많다. 하지만 1월 기준 법무부가 추산한 25만9955명의 불법 체류 외국인까지 고려하면 건설업과 농림·어업에 일용직으로 취업한 외국인 노동자의 비중은 더욱 높을 것이다.

실제 지난달 23일 충북 괴산군의 한 담배밭에서 담뱃잎을 따다가 숨진 베트남 국적의 일용직 N(57)씨도 90일짜리 관광 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조사됐다. 기상청 지역별 상세관측자료에 따르면 그날 괴산군의 낮 최고기온은 33.6도였다. 괴산경찰서 관계자는 과 한 통화에서 “어지럼을 호소해 일을 멈추고 일찍 귀가시키려 했지만 그늘에서 쉬고 다시 일하던 중 쓰러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폭염에 긴 시간, 자주 노출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지만, 이들의 건강권을 고려할 기초적인 자료도 부실하다. 질병관리본부는 2011년부터 온열질환 응급실 감시체계를 운영 중이다. 하지만 7년간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신고현황 연보’에도 외국인의 정보는 체계적으로 생산되거나 관리되지 않았다.

현재 질병관리본부에서 응급실에 제공하는 ‘온열질환자 신고 서식’을 살펴보면 외국인과 한국인을 분류할 수 있는 항목도 마련돼 있지 않다. 신고 서식에는 ‘환자에 대한 기타 의견’을 적을 수 있는 특이사항란만 있을 뿐이다. 외국인 사망자가 생겨도 응급실에서는 외국인 여부를 의무 신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빠지거나 적게 집계될 가능성이 크다.

질병관리본부가 2013년부터 공식 집계한, 폭염으로 사망한 외국인 노동자 수는 모두 3명이다. 하지만 실제 외국인 노동자 사망자 수는 공식 집계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올해 사망한 베트남 국적의 N씨도 질병관리본부가 발표한 ‘2018년 온열질환자 사망 사례’에 외국인이라고 따로 표시돼 있지 않았다. 질병관리본부에 공식 집계되지 않은 N씨까지 포함하면 외국인 노동자 사망자 수는 기존의 3명에서 4명으로 늘어난다.

하루 평균 작업량도 한국인의 1.5배
폭염에 더 취약한 외국인 노동자의 건강권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7월31일 충남 부여읍의 공사장에서 한 직원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폭염에 더 취약한 외국인 노동자의 건강권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7월31일 충남 부여읍의 공사장에서 한 직원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외국인 사망자에 대한 과거 자료가 부실하게 관리되면서 전반적인 외국인 온열질환자 현황은 파악조차 안 된다. 채 선임연구위원은 “앞으로 여름철 건강권 보장 측면에서도 외국인 노동자의 취약성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며 “노동환경이 더 열악한 불법 체류 외국인의 건강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과 한 통화에서 “그동안 폭염이 재난 수준의 위험이 아니어서 단순히 누가, 어디서, 언제 폭염을 주의해야 하는지 파악하는 수준이었다”며 “온열질환자 현황 정보를 질병관리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려해 앞으로 외국인 여부 등에 대한 특이사항도 별도로 분류해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외국인 노동자 상담자들은 외국인 노동자가 폭염에 긴 시간 노출돼 목숨까지 잃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공사장에서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 노동자들은 일명 ‘성과급 팀’ 등에 들어가 팀 단위로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숙련 단순 노무 일용직인 외국인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작업량은 한국인보다 1.5배쯤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안전 기준을 무시하고 작업하도록 요구하는 관행과 공사 기일에 쫓긴 긴 시간 노동 등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건강권을 보장받기 어려운 노동환경에 처해 있다.

표순동 전국건설산업노동조합 건설현장분과 충청·세종지부장은 에 “소규모 영세 공사장은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안전관리자를 의무적으로 배치하지 않아도 돼 외국인 노동자들이 안전·보건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며 “특히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은 안전보건공단이 위탁한 교육기관에서 하는 4시간짜리 건설업 기초 안전보건 의무교육을 받을 기회도 거의 없어 폭염에도 스스로 몸을 지키기 더욱 힘들다”고 지적했다.

법정 근로시간과 휴식을 보장받지 못하는 농림·어업도 사정은 비슷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 쉼터를 운영 중인 김이찬 ‘지구인의 정류장’ 대표는 에 “농림·어업에 취업한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법정 근로시간과 휴식 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행 근로기준법 제63조에는 농림 사업·축산·양잠·수산 사업은 근로시간, 휴게와 휴일에 관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다. 일률적인 근로시간을 적용하기 어려운 농림·어업의 특수성 등을 이유로 예외를 인정해준 탓이다.

주 52시간 근무는 ‘딴 나라’ 이야기

김 대표는 “농림·어업이 주 52시간 근로시간과 휴게 시간 보장에서 ‘합법적’으로 제외되면서 일부 외국인 노동자는 한 달에 이틀꼴로 쉬고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는데도 불과 40분의 점심시간만 주어진다”며 “논밭에서는 참도 밖에서 먹고 잠깐 쉴 만한 그늘도 없는데다 열대야에 컨테이너나 비닐하우스에서 선풍기 1대에 의존한 채 잠을 설치며 건강권을 침해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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