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저출산·고령화와 청년실업 등 한국이 겪고 있는 문제를 먼저 맞닥뜨린 나라다. 그동안 이 소개한 인도와 홍콩 등의 사회혁신가들이 빈곤에 집중했다면, 이번 일본 사례에선 한국 미래의 단면을 미리 만나볼 수 있다. 저출산·고령화와 일자리 부족은 작게는 방부터 크게는 공동체까지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체의 노력을 살펴봤다.
“건축학도로서 지역과 교류하는 방법을 고민했죠.”
나오토 후카사와는 일본 규슈대학 건축학과 대학원생이다. 나오토는 한때 한국에서 유행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의 한 장면처럼 오래된 집을 어떻게 고쳤는지 소개하기 시작했다. “원래 현관이 있던 자리인데 목재 기둥은 놔두고 원목 바닥을 깔고 공간을 넓혔어요. 부엌은 싱크대를 새로 만들어 다 같이 이용하기 쉽게 했죠.” 거실과 부엌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셰어하우스의 핵심 공간이다. 이렇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면 ‘고시원’과 다를 게 없다.
5월20일 일본 후쿠오카시 옆의 작은 도시 이토시마시의 한적한 주택가를 찾았다. 이곳에는 규슈대학 건축학과 학생들이 ‘아키야’(빈집) 프로젝트를 통해 만든 셰어하우스가 있다. 이 프로젝트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나오토는 “대학에 입학해 이 지역으로 온 학생들이 맨션에 혼자 살게 되면 지역사회와 교류하기 어렵다. 졸업하면 또 대도시로 떠난다”며 아키야 프로젝트가 시작된 계기를 설명했다. 지역사회와 청년이 교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셰어하우스를 고민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한국보다 일찍 시작된 일본의 저출산·고령화는 ‘빈집’이라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낳고 있다. 노인들이 집을 옮기거나 세상을 떠나면서 빈집이 늘고 있지만 이 집을 채울 젊은 세대가 없다. 특히 비정규직 등 불안정 노동과 청년실업의 증가는 젊은 세대가 집을 인수할 경제적 능력을 앗아갔다.
아키야 프로젝트는 이렇게 늘어나는 빈집을 개조해 집이 필요한 이들에게 방을 저렴하게 제공하는 셰어하우스로 바꾸는 사업이다. 2010년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현재까지 4개의 집을 고쳐 셰어하우스로 탈바꿈시켰다. 이날 방문한 곳은 집으로만 쓰이지만, 또 다른 곳은 카페와 방과 후 학교로 운영된다. 셰어하우스에 입주한 대학생들이 지역주민의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직접 관계를 맺어나간다.
이토시마 셰어하우스에 사는 아키미 니시지마는 “주변에 사는 어르신들이 가끔 찾아와서 ‘셰어하우스 덕에 마을이 밝아졌다’고 말한다”고 했다. 젊은이들이 와서 청소도 도와주니 마을에 활력이 돈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장점은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에게 경제적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셰어하우스 입주자들의 월세는 2만5천엔(약 22만4천원)이다. 여기에 전기료·수도료 등 공과금을 합쳐 1만500엔을 더해 낸다. 대학 기숙사의 월세가 5만~6만엔이고, 우리나라 원룸과 같은 수준인 맨션의 월세가 6만~7만엔임을 감안하면 입주자들은 주택비용의 부담을 던다.
집주인 역시 좋은 반응을 보인다. 집주인 구가 사다코는 “집이 빈 지 오래돼 낡아서 무너질까봐 걱정했는데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드니 안심이 된다”고 했다. 구가는 “처음에 집을 개조하는 데 비용이 들어 연금생활자로서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젊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고 월세도 들어오니 좋다”고 덧붙였다.
오래된 빈집을 개조하는 데 드는 비용은 500만엔 정도였다. 대학생들이 직접 하기 힘든 전기나 수도 공사를 150만엔에 외부에 맡겼고, 나머지 집 개조에 필요한 재료를 사는 데 350만엔이 들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규슈대학 학생들은 인건비를 받지 않고 자원봉사로 일했다. 이렇게 들어간 비용을 집주인이 300만엔, 아키야 프로젝트 후원단체가 100만엔, 이토시마시가 100만엔씩 내서 분담했다. 빈집 등으로 마을 공동체가 무너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고 이토시마시도 아키야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나오토는 “늘어나는 빈집을 부숴 없앨 고민을 하는 지역이 많은데, 없애기보다 리모델링해 경제적 약자에게 제공하면 함께 살면서 세대 간 교류도 하고 지역사회도 활성화될 수 있다. 앞으로 빈집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마을 살리기에서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 정부는 빈집을 기초지방자치단체가 강제 철거할 수 있도록 하는 ‘빈집대책 특별조처법’을 5월26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로 2008년부터 인구가 감소 추세로 돌아서면서 빈집 증가는 골치 아픈 문제가 된 지 오래다. 일본 총무성 자료를 보면, 2013년 10월 기준으로 방치된 빈집은 820만 채에 이른다. 유산을 상속할 때 건물이 있는 땅에 대해선 세금을 덜 내므로 빈집을 허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끝나버린 종신고용 ‘마이 홈’빈집 증가는 저출산·고령화 문제만 보여주는 게 아니다. 집 사는 것을 포기한 일본 젊은 세대의 문제도 겹쳐 있다. 그동안 일본의 복지는 정부의 노력보다는 기업에 기댄 측면이 컸다. 정년퇴직 때까지 보장하는 종신고용 자체가 복지였다. 기업은 주거비와 교통비도 지원했다. 젊을 때 집을 사면 30년 동안 회사를 다니며 갚으면 됐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종신고용 신화가 무너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일부 젊은이를 제외하면, 취업문은 아르바이트·파견 등 비정규직으로만 열렸다. 청년실업률도 높아졌다. 청년들은 집을 사기는커녕 PC방과 쪽방으로 쫓겨나지 않으려 발버둥쳐야 했다. 한국 젊은이에게 밀려오는 문제가 일본에서는 이미 현실이었다.
일본 사회는 어떤 해결책을 찾고 있을까. 이토시마를 떠나 비행기를 타고 2시간 거리인 일본의 수도 도쿄로 향했다. 규슈대학 학생들의 노력이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면 도쿄에서는 일자리 사정 악화에 따른 주거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집이 아니라 창고, 사무실, 넷방에서 살고 있다.” 5월22일 만난 이나바 쓰요시는 청년들이 ‘탈법 하우스’로 내몰린 상태라고 했다. 일본 시민단체 ‘자립생활을 위한 모야이 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이나바는 20년 동안 일본의 주거빈곤 문제를 고민해온 활동가다. 이나바는 돈 없는 일본 청년들이 가는 탈법 하우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보여줬다.
“최근 확대되는 탈법 하우스는 건물 한 층을 빌려 완전히 쪼개는 것이다. 몸만 누일 수 있는 크기의 방만 만들어놓는다. 창문도 없고 화재에 강한 벽도 만들지 않으니 주택이 아니라 명목상 사무실이나 창고로 등록한다. 도심에서 가까운 곳은 방 하나의 월세가 5만5천엔이다. 월세를 내려고 두 사람이 좁은 방에서 같이 지내기도 한다.”
그가 보여준 설계도는 한국의 고시원과 비슷했다. 방이 아닌 직사각형 모양의 상자들이 모인 모습이었다. 이런 탈법 하우스에도 들어가기 힘든 이들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넷방(PC방)을 찾는다. 일본 도심의 한 넷방을 찾아갔더니 12시간을 보내는 데 2400엔이라고 했다. 우리 돈 2만2천원 정도다. 한 사람씩 들어가는 칸막이가 쳐진 공간을 들여다보니 몸을 간신히 누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좁은 집을 떠날 수 없다이나바는 청년들이 도심의 이런 ‘집’을 전전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도심 지역에 살지 않고 집값이 싼 외곽에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파견 노동자들은 몇 개월마다 일하는 지역이 바뀐다. 최대한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있어야 어디로 배치되든 접근성이 좋다. 계약직이나 임시직 노동자에게 교통비를 지급하지 않는 회사도 늘어나고 있다.” 도쿄 전철의 기본료는 190엔으로 한국보다 비싸다. 전철 간 환승할인도 없어 도심 외곽으로 나갈수록 교통비 부담은 커진다.
모야이 지원센터는 지난해 연수입이 200만엔(약 1780만원) 이하인 20~39살의 미혼 남녀 176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설문조사 대상자 가운데 77%가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부모와 함께 거주하지 않는 이들 가운데 13.5%는 넷방이나 24시간 운영되는 맥도널드 햄버거 체인점에서 머무는 등 홈리스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이나바는 “일본 젊은이들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거나, 부모와 떨어져 살 경우 홈리스가 될 가능성이 큰 상태인 것으로 결과가 나와 충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모야이 지원센터는 원래 노년층 홈리스(집 없는 사람)를 지원했는데, 2004년부터 이 센터를 찾는 젊은이들의 상담이 급증했다. 일본 정부가 1999년과 2003년 노동자 파견법을 개정하면서 파견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난 게 원인이라고 했다. 파견 계약이 해지된 노동자는 기업이 제공하는 기숙사를 바로 나와야 했다. 일자리가 집이었다.
모야이 지원센터는 이들을 위한 주거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주택 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홈리스뿐만 아니라 가정폭력 피해 여성, 장애인, 외국인 난민 등 사회에서 배제된 다양한 이들을 도왔다. 이들이 집을 구할 수 있게 보증을 서는 것이다. 일본은 보증인이 있어야 집을 빌릴 수 있다. 이나바는 “일본의 집주인은 빈집이 있어도 저소득층을 입주시키지 않는다. 월세로 다툼이 생길 바에야 그냥 빈집으로 놔두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집이 없어 살기 힘든 청년이 있는 반면 한편에서는 빈집이 늘어난다”고 했다. 모야이 지원센터는 14년 동안 2300여 명의 보증을 서 머물 곳을 찾아줬다.
모야이 지원센터가 살 곳을 간접적으로 지원한다면 ‘자유와 생존의 집’은 직접 빈집을 빌려 이들을 도운 경우다. 5월23일 도쿄 시내 요쓰야-산초메역에서 기쿠치 겐을 따라 골목길로 1분 정도 걸으니 ‘자유와 생존의 집’이 나왔다. 낡고 허름한 2층 건물이었지만 지하철을 이용하기에는 편한 위치였다.
기쿠치는 “부동산 경기가 좋을 때 부동산업자가 앞에 있는 건물과 이 건물을 합쳐 빌딩을 지으려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실행하지 못했다. 빈집으로 남게 된 것을 우리가 개조해서 사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프리터 노조(아르바이트나 파견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로 구성된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기쿠치는 뜻이 맞는 사람들과 2008년 ‘주택부회’를 만들었다. 월세를 못 내 상담하러 오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주거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뛰어든 것이다. 더구나 2008년 터진 리먼브러더스 사태는 일본 내 파견 노동자들의 대규모 해고를 예고하고 있었다. ‘자유와 생존의 집’은 이들에게 낮은 월세로 살 만한 곳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일본의 현실, 우리의 미래?공사 지연 등 우여곡절 끝에 2009년 문을 연 ‘자유와 생존의 집’은 17개 방을 만들었다. 이곳도 최대한 공간을 절약하는 셰어하우스 형태다. 문을 열자마자 방은 금세 동났다. 월세는 3만~6만엔으로 주변보다 싸다. 지금은 15가구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
“정부의 주택정책이 실패해 비싼 비용을 치러야 집을 구할 수 있고, 노동정책도 실패해 노동자가 집을 구할 만한 좋은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우리가 정부의 모든 실패를 해결할 방법을 찾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 비어 있는 건물을 빌려 개조하고 여기에 공간을 만들어 집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면, 우리를 따라 이런 모델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기쿠치가 만든 17개의 방은 지난 6년 동안 누군가의 보금자리가 되는 성공을 맛보았다. 그러나 ‘자유와 생존의 집’의 방이 텅 빌 만큼 세상은 좋아지지 않았다.
일본은 경기부양 사업으로 전국 각지에서 건설사업을 벌였다. 토건경제는 고속도로를 만들었을 뿐 이들을 위한 임대주택 등을 늘리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가 따라가려는 아베노믹스 역시 복지보다는 토건을 다시 늘리고 있다. 이나바는 “한국 경제가 (장기 불황을 겪은) 일본 경제를 따라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도 분명 주거빈곤 문제에 직면할 수 있어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토시마·도쿄(일본)=이완 기자 w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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