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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정치인은 어디에 있나요?

정치인과 시민사회·학계·문화계 인사 52명의 2차원 정치 성향 좌표…
독자 여러분도 ‘정치 성향 자가진단’ 서비스 통해 직접 비교해보시길
등록 2010-03-05 16:48 수정 2020-05-03 04:26
당신의 정치인은 어디에 있나요?

당신의 정치인은 어디에 있나요?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비슷한 질문에 다른 결과가 나오면 당혹스러워한다.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정치 성향 조사에서 ‘좌파-우파’를 물으면 우파로, ‘진보-보수’를 물으면 진보로 쏠린다. 성장보다는 분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진보는 사실상 좌파의 다른 표현인데도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 좌파가 설 땅이 없었기 때문이다.

좌-우 개념 정립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가능한 조사

2006년 11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대통령 선거 1년여를 앞두고 벌인 조사 결과가 사람들의 입길에 오른 적이 있다.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 9명을 한 명씩 불러주면서 “정치적 이념 성향에서 진보와 보수 중 어느 쪽에 가깝다고 보는지”를 물었다. 응답자(20살 이상 성인 남녀 700명)의 54.7%가 지지도 면에서 선두를 달리던 대선주자 이명박을 “진보에 가깝다”고 꼽았다. 보수에 가깝다는 응답자는 34.5%였다. 이명박은 강금실·정동영·김근태·손학규·한명숙을 제치고 ‘진보 1등’을 차지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당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어 ‘진취적’이라고 받아들일 여지는 있었다. 하지만 정치 성향상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는데도 응답자의 과반수가 진보적이라고 받아들인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진보는 좋은 것, 따라서 내가 지지하는 후보는 진보적이라는 개념의 혼란이 겹쳐진 탓”으로 분석한다.

이런 개념 혼란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교과서적인 의미의 ‘좌-우’(진보-보수)는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갈린다. 진보는 국가의 개입과 기회 평등을 중시하는 반면, 보수는 자유방임적 시장주의를 지향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러시아에서 보수(conservatives)는 누구를 의미할까? 여전히 스탈린주의를 고집하는 사람들일까, 아니면 자본주의식 개혁·개방을 추구하는 사람들일까?

이 지령 800호를 맞아 P&C정책개발원과 공동으로 한국의 여론주도층 52명의 정치 성향을 조사하면서 접촉한 영국 조사전문기관 ‘폴리티컬 컴퍼스’(정치 성향 나침반·www.politicalcompass.org)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좌-우, 진보-보수의 개념 정립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이런 개념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정치 성향을 알아볼 수는 없을까? 경제적 가치만으로 상대적 입장을 구분짓는 틀 외에 복잡하고 풍부한 현실을 보여줄 좌표는 없을까?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진보-보수 세력의 의회 좌석 배열에서 출발한 고전적 좌우 모델을 보완할 장치는 없을까?

정치인과 시민사회·학계·문화계 인사 52명의 2차원 정치 성향 좌표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정치인과 시민사회·학계·문화계 인사 52명의 2차원 정치 성향 좌표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오바마·히틀러·간디와 비교한다면

미국과 영국 등 주요 정치 선진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경제적 태도에 따른 전통적 좌우 구분 축(x축)에 개인의 자유에 관한 새로운 축(y축)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를 보완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미국의 자유주의자인 데이비드 놀란이 고안한 ‘놀란 차트’와 이를 여론조사로 발전시킨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이 대표적이다. 이번에 이 정치 성향 조사에서 적용한 폴리티컬 컴퍼스 모델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이 폴리티컬 컴퍼스 모델을 주목하게 된 이유는 인터넷에서 구현되는 개방성 때문이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해 62개 설문 문항에 응답을 하면 바로 자신의 정치 성향을 좌표 위에 드러내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나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등 미국과 유럽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과 정치 성향상의 거리를 측정해볼 수 있다. 스탈린·히틀러·간디 등 역사적인 인물과의 비교도 가능하다.

은 이 모델을 활용하면 독자와 시민이 자신의 성향과 가장 잘 맞는 정치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계획은 이랬다. 먼저 올 6월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 중인, 2012년 대통령이 되려는,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의 성향을 설문조사 방식으로 조사한다. 이들의 정치 성향을 폴리티컬 컴퍼스 좌표에 표시해 보도한다. 이를 본 독자와 관심 있는 시민들이 인터넷 사이트(h21bbs.hani.co.kr/politicalcompass)에 접속해 정치인들이 한 것과 동일한 설문에 응한다. 주요 정치인들과 자신의 정치 성향을 비교한 뒤 자신과 맞는 정치인을 찾는다.

사람들이 어떤 정치인을 지지하는 데에는 갖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각계각층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빚어내는 갈등과 대립을 대화와 협상을 통해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정체성이나 계급·계층적 이해를 잘 알고 이를 대변하는 노선과 정책을 가진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친서민 실용주의’ 같은 말과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과 정책을 보고 정치적 결정을 할 수 있다.

설문 응답자

설문 응답자

이 기대한 부수적인 효과는 주요 정치인들의 ‘커밍아웃’이다. 정치는 정치인이 자신의 정체성과 노선을 뚜렷하게 밝혀 다른 이들과 구분짓고 설득과 동의의 과정을 통해 지지자를 모으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광폭의 지지’를 기대하면서 뚜렷한 노선과 정체성을 밝히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번 조사에서 여야의 주요 정치인 30명은 개별 문항에 대한 답변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을 달아 설문에 응했다. 비슷한 수의 정치인들이 설문조사를 부담스러워하면서 답변을 고사했다. 조사전문가이자 정치컨설턴트인 김헌태 전 한국사회여론연구소장이 에서 “보수를 찍었는데도 보수 같지 않고 진보를 선택했는데도 진보 같지 않으면 정치에 대한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정치권에서 곧잘 사용하는 실용주의나 중도 노선은 갈등과 대립이 심화된 한국 사회에서 쓸모없는 비실용적 정치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이 독특한 작업은 또 다른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폴리티컬 컴퍼스 사이트에는 세계 주요 정치인을 비롯해 역사 속 주요 인물들의 정치 성향도 좌표에 표시돼 있는 만큼,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정치 성향과 비교 분석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이 부수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상자 기사 참조). 한국과 정치 선진국 간의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배경이 달라 양쪽의 정치 성향을 동일한 좌표 위에 표시할 경우 이번 설문에 응한 모든 정치인이 좌파(진보)로 분류되는 ‘좌파 공화국’이 돼버린다.

과거 지역주의 행태보다 진일보한 정당 특색

그럼 본격적으로 의 정치 성향 나침반을 읽어보자. 여기엔 약간의 사회과학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가로축(x축)은 시장의 자유를 얼마큼 보장할 것인가에 따라 좌우가 갈린다. 왼쪽으로 갈수록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관여를, 오른쪽으로 갈수록 시장의 자유를 중시한다. 따라서 왼쪽의 끝은 국가가 경제의 모든 것을 틀어쥐고 계획에 따라 시장을 조정하는 공산주의(혹은 집산주의)에, 오른쪽 끝은 ‘완전한’ 시장 자유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에 가닿는다. 여기까지는 기존 좌우 모델과 동일하다. 세로축(y축)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다. 위쪽 끝은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권위주의 정치 체제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파시즘이다. 아래쪽으로 갈수록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 끝은 어떤 형태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던 넬슨 만델라는, 시장의 자유 면에서는 좌파이면서 국가의 통제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해 ‘자유주의 좌파’로 분류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국가의 개입보다는 시장의 자유를 중시해 우파에 속하면서 만델라보다는 개인 자유 축에서 국가의 통제를 우선해 권위주의 우파로 분류됐다.

폴리티컬 컴퍼스 모델은 두 축으로 나뉘는 4개의 면을 각각 권위주의 우파, 권위주의 좌파, 자유주의 좌파, 자유주의 우파(오른쪽 위부터 시계 반대 방향)로 분류했다. 이 네 영역은 정치 용어로는 각각 보수주의·권위주의·사민주의·자유지상주의로 표현되기도 한다.

전체 좌표에서 이번 조사의 응답자들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접어두고 응답자들의 조사 결과만을 비교하면, 대선주자군을 포함한 정치인과 시민사회·학계·문화계 인사 52명의 정치 성향이 뚜렷하게 대비됐다. 특히 정치인들은 소속 정당의 이념에 따라 비슷비슷한 좌표상 위치에 무리지어 나타났다.

정몽준 대표, 김문수 경기도지사,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등 한나라당 쪽 의원·정치인들은 응답자 전체로 볼 때 대체로 오른쪽 윗부분을 차지했다. 권위주의 우파(보수주의) 영역을 향하고 있다. 이는 상대적으로 시장의 자유를 중시하며 다른 응답자들보다 권위주의 쪽에 가깝게 자리잡는다는 말이다.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등 진보 성향의 정당 소속 정치인들은 왼쪽 아랫부분에 있다. 자유주의 좌파(사민주의) 영역을 향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시장에 대한 국가의 관여를, 그리고 다른 응답자들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쪽으로 볼 수 있다.

국회는 각계각층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빚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는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국회는 각계각층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빚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는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정세균 대표와 손학규·정동영·김근태 전 대표(의장), 천정배 전 법무장관 등 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두 정당의 사이에 위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장 자유, 개인 자유 두 축 모두에서 진보와 보수의 중간 영역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국민참여당)의 경우 민주당 인사들보다 왼쪽 아래에 치우쳐 있지만 큰 차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주요 정치인들이 소속 정당별로 무리지어 분포하는 현상은, 정치 성향과 관계없이 출신 지역에 따라 정당에 몸담았던 과거 지역주의 행태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주요 정당들이 정치 성향, 이념과 노선, 정책에 따라 분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등 주요 정당들은 여전히 지역주의에 기대는 측면이 있지만, 적어도 주요 정치인들의 정치 성향은 유의미하게 구분돼 있고 노선 차이에 따라 정책을 달리하는 정당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서울시장 후보군, 왼쪽부터 노회찬-유시민-오세훈-원희룡-나경원

몇몇 ‘개성’이 강한 정치인도 눈에 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변호사와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영재영입위원장을 맡은 남경필 의원의 위치다. 이들은 민주당(열린우리당 포함)과 한나라당 정치인의 밀집 지역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 두 사람이 좀더 자유주의 좌파 쪽으로 치우친 반면,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는 권영길 전 대표와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보다 권위주의 쪽을 향하고 있다.

이런 차이가 드러나는 이유는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관한 세로축(y축) 때문이다. 경제적 태도에 따른 좌-우(진보-보수) 모델에서는 보이지 않던 차이가 2차원 좌표상에선 드러났다. 사실 시장 자유에 관한 입장을 묻는 문항에는,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뜨거운 쟁점이 된 사형제나 낙태 문제가 끼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성 문제나 교육·종교 문제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회 현안에 대한 정치적 태도에 관한 문항을 넣어 조사하자 ‘권위주의자(authoritarian)-자유주의자(libertarian)’로 구분되는 세로축에 그 차이가 반영돼 나타나는 것이다.

강기갑 대표와 권영길 전 대표의 경우처럼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도 y축에서 차이를 보였다. 경제적 태도에 관해서는 노동운동가 출신인 김 지사나 경제학자 출신의 유 의원이 엇비슷했지만, 개인의 자유에 관한 사회적 척도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손학규 전 대표와 정동영 의원도 비슷한 차이를 보였다.

은 이번 조사를 통해 차기 대선 후보군, 서울시장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정치인들의 정치 성향을 비교 분석하려 했으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설문조사를 고사하는 바람에 직접 비교는 어렵게 됐다. 대선주자군의 경우 자유주의 좌파 영역의 문재인에서 유시민-정동영·김근태·손학규-정세균-정몽준 순으로 권위주의 우파 영역을 향했다. 서울시장 후보군은, 왼쪽 하단의 노회찬에서 유시민-오세훈-원희룡-나경원 순으로 오른쪽 상단을 향했다.

자, 폴리티컬 컴퍼스 모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면 독자들도 시도해보길 권한다. 3월1일부터 인터넷 주소 h21bbs.hani.co.kr/politicalcompass에서 서비스를 시작한다. 그리고 좌표에 등장하는 주요 정치인들과 자신의 좌표를 비교해보시라. 다만 이 모델 역시 복잡한 현실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여전히 보완 중이다. 그리고 설문에 응한 정치인들이 대부분 생각하고 느끼는 대로 답을 했겠지만, 간혹 대중에게 어떻게 비칠지를 신경 쓰느라 실재와 다르게 답변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이 밖에 폴리티컬 컴퍼스 모델과 같은 뿌리의 블런델-고스초크 모델이 있는데, 그 한국판 설문은 P&C정책개발원 홈페이지(www.pncreport.com/) ‘정치 성향 자가진단’ 코너에서 할 수 있다.

▷ 자신의 정치 성향 알아보기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한국은 좌파 공화국인가
박정희도 왼쪽?


이 시도한 이번 ‘폴리티컬 컴퍼스’ 조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한국의 정치 성향과 서구 정치 선진국의 정치 성향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설문 응답자의 정치 성향을 좌표로 표시한 그래프를 보면, 한국은 ‘좌파 공화국’으로 보인다.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에서부터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유승민·나경원 한나라당 의원에 이르기까지 전체 좌표상 모두 왼쪽 아래에 있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배경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이 필요한 대목이다.
유럽은 좌우 양극단에 이르는 폭이 매우 넓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야경국가(국가는 국방과 치안, 즉 사유재산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막는 정도의 최소한의 임무만을 맡아야 한다는 자유주의 국가관)로 대변되는 완벽한 시장 자유를 주장하는 쪽이 오른쪽 끝에 있었다면, 마르크스의 이후에는 그 반대편 끝이 등장했다. 유럽의 정치 지형은 시장 자유와 국가 관여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치열한 대립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정치의 기본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각각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당이 있고, 이런 논쟁 구도에 익숙한 사회 구성원은 논쟁의 연장선에서 지지할 정당과 정치인을 찾아왔다.
하지만 한국 정치에서 유럽식의 전통적 좌우 구분은 그동안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박창수 P&C정책개발원 전문위원은 “우리가 ‘시장 자유’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박 위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관여는 당연시됐고, 현재도 국가의 관여와 개입의 필요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드물다”고 말했다.
서구 보수(우파)의 경우 시장 자유를 중시하는데, 한국 대중에겐 박정희식 국가 주도의 일체형 성장주의가 오히려 보수의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평소 완벽한 시장 자유를 주창해온 공병호 소장이나 좌승희 경기개발연구원장 정도만 유럽의 관점에서 볼 때 우파로 분류될 뿐, 보수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들조차 유럽식의 폭넓은 스펙트럼에 비춰보면 왼쪽으로 치우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폴리티컬 컴퍼스의 기준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 성향을 분석하면 그도 좌파의 영역에 표시될 수 있다는 얘기다.
개인 자유에 관한 y축에서 김문수 경기도지사(한나라당)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인이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아래 쪽에 나타난 점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는 빠른 속도로 확장됐고, 이에 따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요구도 강해졌다. 이젠 권위주의적 통치나 국가기관을 동원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의 권력 행사는 어떤 이유를 갖다 대더라도 대중적 지지를 얻기 힘들게 됐고, 정치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이런 점이 ‘권위주의-자유주의’ 축에 관련된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한국과 서구의 정치 성향 차이점을 해석하는 데 고려할 점이 두 가지 더 있다. 우선 조사 방식의 차이다. 폴리티컬 컴퍼스는 직접 응답하지 않은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연설, 정책 공약, 인터뷰, 의회에서의 투표 행위 등을 분석해 좌표를 설정한 반면, 은 정치인들 스스로 문항에 답하는 방식을 택했다. 폴리티컬 컴퍼스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사형, 총기소유,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대한 입장에 바탕해 권위주의 우파(온건 보수)로 분류했지만, 오바마가 직접 설문에 답할 경우에는 다른 위치에 찍힐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설문 문항의 차이다. 이 막판까지 고민했던 대목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익숙한 정치·사회적 쟁점일지라도 우리에겐 생소하거나 아직 본격적인 논쟁으로 부각되지 않은 주제가 일부 있다. 이는 폴리티컬 컴퍼스 쪽의 좌표와 편차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가 다문화사회로 진입했다고는 하나 인종 문제(문항 4)가 사회 통합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며, 서구와 달리 대마초가 마약류로 매우 엄격하게 금지돼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 이용 허용 여부(문항 30)를 묻는 것이 우리 여건에 맞지 않을 수 있다. 성적 다양성과 관련해 보수적 흐름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동성 커플의 자녀 입양 허용 여부를 묻는 문항 58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 들어 표현·집회·결사의 자유 등 자유권에 속하는 기본적인 헌법적 가치마저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관련 문항들이 한국과 서구의 정치 성향 차이로 나타났을 수도 있다.
세계의 주요 정치 지도자와 한국 정치인들의 좌표상 차이를 좁히려면 보정 작업이 필요하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나 윤여준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을 좌표의 중심으로 삼아, 설문 응답자 전체의 위치를 좌표의 오른쪽 윗부분으로 끌어올리면 ‘좌파 공화국’의 착시 현상을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정치 성향조사 설문 문항

폴리티컬 컴퍼스의 정치 성향조사 설문 문항은 다음과 같다. 답변은 ①매우 동의 ②동의하는 편 ③반대하는 편 ④절대 반대 중에서 선택한다.

국가·국제 분야
1. 경제적 세계화가 불가피하다면, 세계화는 초국적기업의 이익보다는 인류에 대한 기여에 우선적으로 도움이 돼야 한다.
2.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나는 언제나 우리나라의 입장을 지지한다.
3. 자신이 태어날 나라를 고를 수 없는 만큼, 자신의 국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태도는 어리석다.
4. 내가 속한 인종은 다른 인종에 비해 우수한 부분이 많다.
5. 적의 적은 우리 편이다.
6. 군사적 행동이 국제법을 위반한 경우라도 정당할 때가 있다.
7. (미디어 정보통신 분야에서) 정보 전달과 오락 기능이 뒤섞이는 정도가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경제 분야
8.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속한 국가보다는 자신이 속한 계층(계급)에 따라 나뉜다.
9.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은 상충관계에 있는데) 물가 안정이 일자리 창출보다 더 중요하다.
10.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환경을 보호할 것이라고 믿기 어렵기 때문에 규제가 필요하다.
11.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좋은 생각이다.
12. 마시는 물처럼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마저 상품으로 팔리는 것은 비참한 현실이다.
13. 토지는 사거나 팔 수 있는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
14. 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으면서 단지 돈을 굴리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5. 보호무역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16.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은 이익을 남겨 주주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17. 부자들은 현재 너무 많은 세금을 내고 있다.
18. 지불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더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19. 정부는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을 처벌해야 한다.
20. 독점을 하려는 약탈적 초국적기업을 규제해야 진정한 의미의 자유시장이 구현될 수 있다.
21. 시장이 자유로울수록, 사람들도 더욱 자유로워진다.

사회 분야
22. 낙태는 산모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23. 모든 권위는 반드시 그 정당성에 대한 근거를 따져봐야 한다.
24. 눈에는 눈, 이에는 이.
25. 자립적 기반이 없는 극장이나 박물관 등을 세금으로 지원해서는 안 된다.
26. 학교는 출석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
27. 모든 국민은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각자의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다.
28. 좋은 부모는 때때로 자녀에게 체벌을 가해야 한다.
29. 아이들에게 부모가 모르는 비밀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30. 개인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대마초(마리화나)를 소유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31. 학교 교육의 기본 기능은 미래 세대의 취업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32. 심각한 유전성 장애가 있는 사람은 2세를 갖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33. 아이들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규율을 습득하는 것이다.
34. 야만인이나 문명인은 없다. 단지 다른 문화가 존재한다.
35. 일할 능력이 있는데도 일자리를 거부하는 사람은 국가적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36. 사회적으로 부조리한 문제에 몰두하기보다는 밝고 즐거운 일들로 바쁘게 움직이는 편이 낫다.
37. 성인이 되어 이민을 가거나 온 사람은 (이민 2·3세와 달리) 그 나라에 완전히 융화될 수 없다.
38. 성공한 기업들에 좋은 것은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39. 방송사들은 아무리 콘텐츠의 독립성이 확보된 경우라 해도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
40. 국민의 자유는 테러 방지를 위해 때로는 제한될 수 있다.
41. 일당 지배 국가는 민주적 국가보다 의사 결정을 빨리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42. 기술의 발달로 개개인을 감시하기가 더욱 쉬워졌지만 보통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43. 사형제는 최악의 범죄를 다스리기 위해 유지해야 한다.
44. 현대사회에는 자신이 복종해야 할 상관과 자신의 명령을 따를 부하들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
45. 추상예술은 아무것도 상징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예술이라고 볼 수 없다.
46. 형사사건의 경우 교화보다 처벌이 더 중요하다.
47. 일부 범죄자들에게는 교화를 시도하는 것이 시간 낭비일 뿐이다.
48. 기업가나 제조업자가 작가와 예술가보다 더 중요하다.
49. 여성이 직업을 가질 수는 있지만, 첫 번째 의무는 가정을 돌보는 것이다.
50. 다국적기업은 개발도상국의 자원을 비윤리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51. 기성 사회의 제도·문화 등에 잘 조응하는지 여부가 개인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다.

종교 분야
52. 점성술(우리의 경우 사주·역학) 등은 나의 운명을 잘 설명해준다.
53. 종교를 갖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살 수 없다.
54.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는 개인의 자선 활동이 국가의 사회 보장보다 더 낫다.
55.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좋지 않은 운명을 타고난다.
56. 학교에서 내 아이에게 종교적 가치를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 분야
57. 혼외정사는 일반적으로 부도덕하다.
58.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나라도 있는데) 서로 사랑하는 동성 커플이 자녀 입양을 원할 경우 이를 허용해야 한다.
59. 성인에게는 포르노그래피가 법적으로 허용돼야 한다.
60. 서로가 동의하는 성인 사이의 성생활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61. 선천적인 동성애자는 없다.
62. 요즈음 성 개방 정도는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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