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가난한 자를 위한 한 평은 없다

전통적인 노동자 동네 삼수이포를 통해 본 홍콩 주거 문제… 싱글맘을 위한 집 만들어 민간 차원 대안 모색하는 라이트비
등록 2015-05-28 08:30 수정 2020-05-03 00:54

4억6600만원(약 3330만9천홍콩달러).
지난 4월 매매된 홍콩섬 미드레벨 지역 아파트 ‘39콘딧로드’의 평당 가격은 아시아 최고치를 경신했다. 면적 4664제곱피트(약 130평)인 이 아파트의 총가격은 610억8800만원(약 4억3380만홍콩달러)이었다. 고가 주택만이 아니다. 지금 아시아에서 아파트 평당 평균가격이 가장 비싼 도시는 도쿄가 아니라 홍콩이다. 금싸라기 땅에 사는 홍콩 서민의 주거 문제는 심각하다. ‘극단적 양극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만달러를 넘는 홍콩에서 가장 자주 들었던 말이다. 홍콩이 중국에서 빌린 ‘신계지’는 홍콩이 700만여 명 인구가 살기에 얼마나 좁은지를 역설한다.


기획 연재


아시아의 사회적 경제



①인도: 집, 가난한 자의 최전선☞기사보기
②홍콩: 삼수이포에서 바라본 마천루
③필리핀: 마법에 걸린 농장
화요일 교회의 무료 도시락
삼수이포 교회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도시락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민자들의 정착지였던 삼수이포는 세월이 흘러 고령인구가 많은 지역이 됐다. 신윤동욱 기자

삼수이포 교회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도시락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민자들의 정착지였던 삼수이포는 세월이 흘러 고령인구가 많은 지역이 됐다. 신윤동욱 기자

지난 5월12일 저녁 7시, 섹킵메이 지하철역에서 만난 팍차이는 길가에 즐비한 공공주택을 보며 말했다. “1950년대 초 이 지역에서 대형 화재가 나서 주민 수천 명이 집을 잃었어요. 마침 크리스마스이브였죠. 그것이 홍콩 공공주택의 시작이에요.” 퇴근길을 서두르는 직장인,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30층이 넘는 공공주택 입구로 빨려 들어가는 풍경이 보였다. “홍콩이 자유시장도시라고요? 사실은 아니에요. 300만 홍콩인이 공공주택에 살아요.” 잠시 그가 멈춰서 말했다. 30년 이상 된 공공주택 면적은 4인 가구 기준으로 26㎡이고 방 2개와 거실, 부엌, 화장실로 구성된다. 홍콩인 3명 중 1명 이상은 7~8평의 좁은 곳에서 잔뜩 짐을 쌓아두고 산다. 한 달에 내는 임대료는 보증금 없이 1천홍콩달러(약 14만원). 같은 수준의 민간임대주택에 살려면 공공주택 임대료의 5~10배를 지불해야 한다. 이렇게 공공주택에 사는 것도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한다.

이날 저녁 7시30분, 붉은 간판을 내건 음식점 사이를 지나자 교회가 나왔다.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사람을 멍하게 보는 눈빛들. 줄을 맞춰서 앉은 노인들 사이에 고개를 숙인 청년도 있었다. 매주 화요일, 교회에서 나눠주는 무료 도시락을 기다리는 이들이다. 교회가 위치한 삼수이포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중국에서 건너온 이들이 정착한 곳이다. ‘수심 깊은 부두’를 뜻하는 이곳에 내린 이들은 나무로 판잣집을 짓고 인근 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던 이곳은 ‘홍콩 드림’을 꿈꾸는 이민자의 첫 정착지. 성공한 이들은 떠나고 탈락한 이들이 남아 도시락을 얻으러 온다. 삼수이포 지역을 연구해온 사진가 팍차이가 말했다. “홍콩 저소득층은 수입의 절반을 식비에 쓰고 절반을 주거비에 써요. 식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1시간을 걸어오는 이도 있죠.” 저녁 8시, 줄을 늘어선 이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갈 무렵에 도시락 하나를 더 받으려는 백발의 노인과 더는 못 준다는 교회 청년이 눈을 치켜뜨며 실랑이를 벌였다. 팍차이는 “가족을 위해 도시락을 하나 더 받아가려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홍콩의 현실에 대해 말을 이었다. “공공주택에 들어가려면 길게는 10년을 기다려야 해요. 1997년, 2003년 금융위기를 홍콩 정부는 부동산 부양으로 극복하려 했어요. 사람들이 집을 사면 경기지수가 좋아지니까 주택 대출에 돈을 쏟아부었죠. 공공주택 짓기는 거의 중단됐어요.”

감춰진 가난, 붕괴된 건물

그렇게 작동하던 안전장치는 21세기 이후 붕괴됐다. 홍콩 경제지표는 최상을 달리지만 서민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중국 정부가 돈을 쏟아붓고 본토의 부자들이 자식 교육을 위해 홍콩에 집을 사면서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하나의 아파트를 조각조각 나누어 2층 침대를 놓은 큐비클(Cubicle), 옥상에 여러 명이 거주하는 옥탑방(Roof-Top) 등 비주택에 사는 이가 2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런던정경대가 2011년 발간한 보고서 ‘홍콩의 주거 수치’(Hong Kong’s Housing Shame)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요리사로 일했던 50대 차우캄추엔은 2003년 홍콩을 덮친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유행 이후 악화된 경제 상황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주거비를 줄였다. “전에는 1만홍콩달러(약 140만원)를 벌어서 2천홍콩달러(약 28만원)를 집세로 냈는데 실직 뒤에는 1500홍콩달러(약 21만원)를 내는 큐비클로 옮겼어요. 집세가 올라서 다음엔 900홍콩달러(약 13만원)를 내는 새장집(Caged House)에 갔죠. 불법인 새장집은 0.7평에 불과해요.” 웨이터로 시작해 요리사로 승진하며 1980~90년대 황금기를 누렸던 차우의 주거 빈곤은 21세기에 극에 달했다. 삼수이포 지역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그는 공용화장실을 쓰려면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한다.

역시 삼수이포에 사는 우씨 가족은 1.5평 큐비클에 산다. 몸을 돌리기도 힘든 방에는 침대를 제외한 가전제품이 없다. 여름엔 극도로 덥지만, 하나뿐인 창을 열면 쓰레기 냄새가 진동한다. 그는 “30℃가 넘으면 매일 옥상에 가서 잔다”고 말했다. 그의 이웃에는 16살 윙이 부모, 여동생과 함께 산다. 윙의 가족은 한 달에 4천홍콩달러(약 56만원)를 벌어서 1500홍콩달러(약 21만원)를 집세로 낸다. 학교가 끝나면 윙은 여동생과 함께 의자 두 개를 들고 옥상에 가서 숙제를 한다. 의자는 책상 대신으로 쓰인다. 가족이 매일 저녁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는 곳도 옥상이다. 이들은 밤 11시가 넘어 잠을 자러 큐비클로 내려온다. 윙은 “옥상에도 쓰레기가 널려 있지만 어깨도 돌리기 힘든 방보다는 낫다”고 말했다.

5월11일 오후 4시, 홍콩 청사완의 사회혁신공간 굿랩(Good Lap)에서 만난 리키 유 ‘라이트비’(Light Be) 대표는 A4용지를 세 번 접으며 큐비클을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8번 나눈 큐비클 1㎡당 임대 수익은 고급 아파트보다 비싸다”며 “가장 가난한 지역의 10㎡짜리 큐비클 월세가 90만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몇 해 전에는 너무 많은 사람과 가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건물이 무너졌고 많은 이들이 숨졌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도심에 감춰진 슬럼은 건물 밖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구 700만 명 중 100만 명이 빈곤선 이하에서 사는 아시아 부자 도시 홍콩의 속살이다.

싱글맘을 위한 한 줄기 빛
홍콩 사회적 기업 라이트비(Light Be)가 운영하는 라이트홈(Light Home)은 싱글맘을 위한 집을 제공한다. 월세는 형편이 닿는 대로 내면 된다. 라이트홈에서 아이는 안정을 찾고 엄마는 일자리를 얻는다. 라이트홈 제공

홍콩 사회적 기업 라이트비(Light Be)가 운영하는 라이트홈(Light Home)은 싱글맘을 위한 집을 제공한다. 월세는 형편이 닿는 대로 내면 된다. 라이트홈에서 아이는 안정을 찾고 엄마는 일자리를 얻는다. 라이트홈 제공

정부가 가난한 자의 주거를 점점 돌보지 않는 홍콩에서 라이트비가 운영하는 ‘라이트홈’(Light Home)이 주목받고 있다. 2012년 9월에 시작된 라이트홈은 아이가 있는 싱글맘을 위한 주거 서비스다. 하나의 아파트에 싱글맘 두 가족이 함께 사는데, 1인당 7㎡ 이상의 공간이 제공된다. 거주자는 각자의 방에 살면서 거실과 주방과 화장실을 공유한다. 공공주택에 입주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라이트비는 당장 도움이 필요한 싱글맘에게 집을 제공한다. 임대료는 형편이 닿는 대로 낸다. 3년까지 거주할 수 있는 이곳에서 싱글맘은 자립을 위한 토대를 닦는다. 라이트비는 주거뿐 아니라 일자리 교육, 건강 상담 등을 시민단체, 복지기관과 연결해 제공한다. 일과 양육의 병행에 어려움을 겪을 뿐 아니라 고립 상태에 있던 저소득층 싱글맘들은 함께 살면서 ‘좋은 이웃’이 되는 법을 배운다. 유 대표는 “큐비클에 사는 아이가 엄마한테 ‘왜 우리 집에는 매일 많은 아저씨가 오나요?’라고 묻기도 하는데, 같은 집에 매매춘을 하는 여성이 공간을 나눠서 살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주거 빈곤은 아이들 교육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고 전했다.

남자친구가 떠난 뒤 비혼모 체리는 아들 벤을 키우며 살았다. 체리는 생계를 위해 경비원으로 장시간 노동을 했다. 부모님 집에 살면서 벤을 어머니에게 맡겼는데, 2013년 벤이 언어장애 판정을 받았다. 할머니가 입에 달고 사는 욕을 벤이 따라해 문제가 생겼다. 결국 체리는 따로 집을 빌렸다. 벤을 돌보려 직장도 그만뒀다. 그러나 홍콩의 집세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위기에 처했던 체리는 다행히 사회복지사를 통해 라이트홈을 소개받았다. 벤이 유치원에 가 있는 시간에 체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라이트홈에서 그녀는 원하던 일을 배울 기회를 얻었다. 체리는 신부화장을 배우는 견습생으로 일했고,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됐다. 소심했던 벤도 쾌활한 아이가 됐다. 그렇게 3년을 살면서 체리는 사회적 관계망을 만들었다. 그의 변화를 눈여겨본 친구는 체리에게 자신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무기력했던 체리는 일과 양육을 동시에 해내는 엄마가 됐다.

베티의 남편은 농부였다. 두 해 전에 남편이 세상을 뜨면서 베티의 이름으로 빚이 남았다. 두 아들을 둔 베티는 살던 곳에서 쫓겨났고 살아갈 의욕마저 잃었다. 실의에 빠진 베티에게 사회복지사가 라이트홈을 소개했다. 베티는 라이트홈에서 서서히 심신을 회복한 뒤 접시 닦는 일을 시작했다. 고등학생인 두 아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건설일용직으로 일했다. 라이트홈에 입주한 지 6개월, 베티 가족은 정부 보조금을 끊었고, 지난 3월 독립했다. 유 대표는 “라이트홈은 싱글맘들이 자존감을 회복해 인생의 다음 단계로 가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비싼 빌딩을 가난한 이를 위해”

사회적 기업 라이트비는 그들의 사업이 이윤만 추구하는 부동산 산업을 바꾸는 자극제가 되기를 바란다. 가진 자가 일방적으로 돕는 시혜가 아니라 서로 돕는 비즈니스 모델을 지향한다. 저렴하게 집을 빌려주거나 투자를 하는 이들에게 수익과 함께 사회적 기여를 했다는 자부심을 돌려준다. 정부의 복지 공백을 메우는 라이트홈은 주목을 받는다. 유 대표는 “언론을 통해 라이트홈이 알려지면서 외국에 살면서 비워둔 집을 라이트홈으로 써달라는 이들의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라이트비는 자원이 있지만 참여할 방법이 없었던 이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잇는 플랫폼 구실을 한다. 그렇게 마련한 30개 라이트홈에 60가족이 산다. 이들의 활동은 정부의 관심도 자극했다. 라이트비는 내년에 5층짜리 정부 건물을 1달러에 임대해 34개 라이트홈을 운영할 계획이다. 유 대표는 “우리는 아주 작은 조직이지만 아주 비싼 빌딩을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게 한다”고 말했다.

소셜벤처스홍콩(SVhk)이 없었다면 라이트비도 없었다. 소셜벤처스홍콩은 사회적 기업을 만들고 키우는 일을 한다. 2007년에 설립된 소셜벤처스홍콩은 20여 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거나 지원한다. 라이트비도 그중 하나다. 전문가 600여 명과 자원활동가 4만여 명이 참여한 소셜벤처스홍콩을 통해 라이트홈을 위한 자원을 마련했다. 프란시스 응아이 소셜벤처스홍콩 대표는 “다양한 사람과 집단을 잇는 ‘소셜 구글’이 되기를 바란다”며 “우리는 사회문제를 도시를 변화시킬 기회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올해 우산혁명(Umbrella Movement)이 증명했듯, 홍콩의 사회운동은 활발해졌다. 홍콩 시민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에이다 웡은 “2003년 사스 위기를 통해 홍콩 사람들이 정부가 무능력(useless)하다는 것을 절감했다”며 “당시 50만 명이 마스크를 쓰고 행진을 하면서 시민의 힘을 느꼈다”고 말했다. 우산혁명의 배경엔 청년 빈곤 문제가 있다. 에이다 웡은 “홍콩인 700만 명 중 5만5천 명이 90% 세금을 낸다”며 “청년이 열심히 일하고 모아도 집을 마련할 희망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나무상자집, 스크린빌딩
마치 1970년대 한국의 청계천처럼 삼수이포 상가를 개조해 미싱을 놓고 작은 공장을 만들었던 역사가 홍콩에도 있다. 신윤동욱 기자

마치 1970년대 한국의 청계천처럼 삼수이포 상가를 개조해 미싱을 놓고 작은 공장을 만들었던 역사가 홍콩에도 있다. 신윤동욱 기자

“사스 사망자 대부분도 이 동네에서 나왔죠.” 5월12일 밤 10시, 삼수이포 주거지를 지나 시장으로 걸어가던 팍차이가 말했다. 노점상에 들러 완탕면을 먹으며 그는 “가장 오래된 노동계급 동네에 가장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역설”에 대해 말했다. 그의 말처럼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거리인 도심 침사추이에서 맛본 완탕면보다 훨씬 맛있고 훨씬 저렴한 음식이 그곳에 있다. 삼수이포 시장을 거닐면 전자제품, 의류, 공예품, 재활용품을 파는 골목이 잇따라 나온다. 팍차이는 “저기서 1990년대까지 사무실 공간을 공장으로 개조해 미싱을 여러 대 놓고 옷을 만들었다”며 쇠락한 건물을 가리켰다. 그의 얘기를 들으며 주변 풍경을 보는 순간, 전태일의 청계천이 떠올랐다. 삼수이포의 역사와 오늘은 20세기 청계천, 21세기 안산이 하나의 공간에 있는 듯했다. 여전히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이곳에 밀집한 식당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그와 걷는 거리에 중고 냉장고를 쌓아놓은 상점이 즐비했고, 피부가 검거나 아랍 전통 의상을 입은 이들이 지나갔다. 가게들이 문을 닫은 자정 무렵이나 이른 새벽에는 20세기 황학동, 21세기 동묘역 근처처럼 벼룩시장이 선다. 경찰 단속이 느슨해지는 시간에 서는 중고 시장이다.

팍차이는 시장 골목 어귀에 있는 ‘티하우스’를 가리키며 “60년 된 건물”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은 이른 새벽에 차를 마시고 허기를 채우며 일감을 주러 오는 이들을 기다렸다. 삼수이포 경찰서와 보건소는 식민지 양식 건물로 100년이 넘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홍콩의 역사가 담긴 삼수이포 지역을 홍콩 정부는 21세기에 재개발지구로 선정했다. 골목마다 건물마다 켜켜이 쌓인 홍콩의 역사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이미 새 빌딩은 오래된 건물과 뒤섞여 있다. 2006년부터 삼수이포 주민들은 이 지역의 역사성을 보존하는 운동을 벌였다. 재활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저소득층 주민도 돕는다. 이렇게 활성화된 도시재생운동은 개발정책에 저항하는 상징이 됐다.

팍차이는 “1990년대 초반 홍콩 정부의 수입 절반이 땅을 팔아서 나왔다”며 “정부는 개발의 주체”라고 말했다. 그를 따라간 삼수이포 거리 끝에는 나무상자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이들이 있었다. 허리춤을 조금 넘는 높이의 사각형 집이 몸을 누이는 곳이다. 고가도로 아래로 늘어선 판잣집에서도 향을 피우는 냄새가 번졌다. 삼수이포 공원 너머로 40~50층은 돼 보이는 고급 아파트 서너 채가 나란히 서 있었다. 팍차이는 “시야와 바람을 막는 저런 건물을 ‘스크린빌딩’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극단적 양극화는 고개를 들면 보였다.

홍콩=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