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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객 혹은 ‘홈리스’ 김진수

⑯ 주일본 쿠바대사관에 망명신청했다가 스웨덴으로 탈출한 베트남전 참전 한국계 미군병사 이야기
등록 2014-05-10 17:34 수정 2020-05-03 04:27

김진수(22·이하 괄호 속 숫자는 당시 나이)는 홈리스 신세였다.
1968년 1월1일, 그는 소파에 누워 쪽잠을 자다 눈을 떴다. 24시간 영업하는 도쿄 중심가 신주쿠 심야다방의 창문으로 새해 첫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화장실로 가 세수를 했다. 몸을 눕힐 거처를 찾지 못하고 헤맨 지 4일째다. 신분증을 요구하는 호텔은 위험했다. 오늘 밤에도 심야다방으로 돌아올 것이다. 3일 전의 행동은 무모했다. 사고를 치고 말았다. 1967년 12월29일, 대책도 없이 은신처인 쿠바 대사관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8개월 동안 자신을 보호해준 고마운 곳이었다. 그는 대신 일본 최대의 노동운동단체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를 찾았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연말연시 휴가철이란 점을 깜빡했다. 사람들이 출근할 때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길을 잃은 도망자

김진수가 쿠바 대사관에서 도망했다고 보도한 〈아사히신문〉 1968년 1월11일치 1면. 상단 머리기사는 베트남으로 가기 위해 일본을 경유할 예정이던 미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입항 반대 데모에 관한 일본 정부 입장을 다루고 있다(왼쪽). 쿠바 대사관저에서 나오지 못하고 생활하던 김진수의 근황을 전한 〈아사히신문〉 1968년 5월17일치 사회면. ‘갇힌 채 한 달 반’이라는 제목을 달고, 김진수가 쿠바 대사관저에서 대사관 직원과 탁구 치는 사진을 크게 실었다.

김진수가 쿠바 대사관에서 도망했다고 보도한 〈아사히신문〉 1968년 1월11일치 1면. 상단 머리기사는 베트남으로 가기 위해 일본을 경유할 예정이던 미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입항 반대 데모에 관한 일본 정부 입장을 다루고 있다(왼쪽). 쿠바 대사관저에서 나오지 못하고 생활하던 김진수의 근황을 전한 〈아사히신문〉 1968년 5월17일치 사회면. ‘갇힌 채 한 달 반’이라는 제목을 달고, 김진수가 쿠바 대사관저에서 대사관 직원과 탁구 치는 사진을 크게 실었다.

그는 다방에서 나와 신정 연휴를 만끽하는 신주쿠의 일본인들 틈에 섞였다. 낮엔 도쿄 거리를 정처없이 쏘다니며 시간을 때워야 한다. 미행당할지도 몰랐다. 경계하는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길을 잃은 도망자. 그의 집은 어디인가. 일본인가. 아니다. 망망대해를 건너야 한다. 한국인가. 역시 아니다. 미국이다. 합법적으로는 그곳에 닿을 수 없다. 빛이 없는 어둠의 미로 속에 그가 서 있었다.

1. 금 11일 조간 아사히, 산케이 및 요미우리는 대체로 3.4단(산케이는 사회면 톱)으로 ‘그릭스’가 지난해 12월29일 ‘쿠바’ 대사관에서 도망했다고 보도함.

2. 외무성의 니이세키 정무국장은 10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지난해 4월 쿠바 대사관에 정치 망명하고 있던 ‘그릭스’(한국명 김진수)가 지난해 12월29일 동 대사관 밖에 도망했다고 하고 이것은 도망한 29일 주일 쿠바 대사관으로부터 외무성에 연락이 있은 것이라고 했다고 함. 한편 외무성은 9일 ‘멘데스’ 주일 쿠바 대사를 초치하고, 유감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도망의 모양에 대해 사정을 들었다고 함. 지금으로서는 동 2등병이 자발적으로 달아난 것인지 어떤지는 불명이나, 멘데스 대사는 동 2등병에게 대사관 밖에 나가면 체포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외출을 금지하고 있었다고 함.

3. 산케이는 일본의 공안 당국은 이미 동 병사가 일본을 탈출해 북한에 있는 것 아닌가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함.(하략)

(1968년 1월11일 주일 한국대사가 외무부 장관 앞으로 보낸 착신전보)

일본의 한 잡지에 실렸던 김진수의 사진.

일본의 한 잡지에 실렸던 김진수의 사진.

김진수(金鎭洙, 케네스 그릭스, Kenneth C. Griggs)는 베트남에서 온 미군 탈영병이었다.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에서 미191병기 대대 타이피스트 특기병으로 근무하던 중 사이타마현 존슨 미군기지로 휴가를 왔다가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쿠바 대사관으로 들어가 쿠바 망명을 신청했다. 1967년 4월3일의 일이다. 쿠바는 피델 카스트로(42)가 1959년 친미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한 뒤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미국의 적성 국가였다. 외국 공관은 외교특권을 누렸다. 미국과 일본 정부는 쿠바 대사관에 김진수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지만, 대사관 내에 진입해 그를 체포할 수는 없었다. 김진수는 “월남에서 미국의 침략 전쟁을 눈으로 보고 전쟁의 증오를 느꼈다”고 망명 동기를 밝혔다. 쿠바 정부는 ‘제국주의 제국으로부터의 망명자에게는 최대한의 지지를 부여한다는 기본 정책에 의해’ 입국을 허락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출국을 허락하지 않는 한 실제로 그를 데려갈 뾰족한 수는 없었다. 하루이틀이 흘렀다. 김진수는 쿠바 대사관저에서 먹고 자고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스페인어 공부와 탁구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렇게 8개월을 지내다 쿠바 대사관 사람들도 모르게 밖으로 도망 나와 홈리스 생활을 자처한 셈이었다. 쿠바 대사관저에서 새장 속의 새가 되어간다는 자조감을 느꼈을까. 체포당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모험을 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을까.

서울 출생, 미군에 의해 입양 이민

김진수가 처음 쿠바 망명을 신청했을 때 한국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김진수가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 당국은 김진수의 인적사항과 사건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였다. 한국 외무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다음과 같은 이력의 소유자였다. ‘1946년 12월25일 서울 출생. 1956년 11월23일 주한 미38병기대 소속 미군에 의해 입양 이민. 한국 정부에 의한 여권 발급(번호 9679). 1957년 미국 시민권 신청 각하. 1961년 시민권 신청 자격 생겼으나 신청 안 함.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미성년 범죄 경찰기록 조회됨. 1963년 미 육군 지원 입대.’

다른 탈영병들과 함께 홋카이도 최동단 네무로에서 배를 타고 소련으로 간 뒤 비행기로 이동해 1968년 4월 말 스웨덴 스톡홀름 공항에 도착한 김진수(맨 왼쪽). 그 오른편으로 마크 샤피로, 테리 위트모어, 필립 캘리코트, 조지프 크메츠, 에드윈 아네트.

다른 탈영병들과 함께 홋카이도 최동단 네무로에서 배를 타고 소련으로 간 뒤 비행기로 이동해 1968년 4월 말 스웨덴 스톡홀름 공항에 도착한 김진수(맨 왼쪽). 그 오른편으로 마크 샤피로, 테리 위트모어, 필립 캘리코트, 조지프 크메츠, 에드윈 아네트.

김진수가 1967년 4월3일 쿠바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이후 한국 외무부와 주일 대사관이 1년간 주고받은 문서들. 외교부는 비밀 자료로 취급했던 이 문서들을 30년이 지난 1998년 이후 공개했다.

김진수가 1967년 4월3일 쿠바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이후 한국 외무부와 주일 대사관이 1년간 주고받은 문서들. 외교부는 비밀 자료로 취급했던 이 문서들을 30년이 지난 1998년 이후 공개했다.

한국 국적을 가진 미 현역 군인이 베트남에 파병됐다가 휴가지인 일본에서 쿠바 대사관으로 숨어버린 뒤 8개월 만에 잠적한 희대의 사건. 한국 정부는 김진수가 북한으로 갈까봐 노심초사했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과 남북한 간 체제 대결이 한창이던 시점에서 김진수가 북한 쪽의 선전 나팔수가 될 수도 있었다.

김진수의 홈리스 생활은 1월3일에 안정을 찾았다. 그날 밤 요시카와 유이치(37) 베헤이렌 사무국장을 만나면서부터다.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오다 마코토(36)가 대표로 있는 베헤이렌(べ平連·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은 일본 내 미군기지 병사들의 탈영을 부추기고 은닉과 밀항을 돕던 일본 최대의 반전평화 단체였다( 1000호 2014년 3월3일치 참조). 본래 김진수는 1월1일에 들어가지 못한 총평 사무실 문을 이틀 뒤에 다시 두드렸다. 그곳 관계자는 하룻밤을 묵고 나서 이야기하자며 알고 지내던 여주인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안내했다. 한데 김진수가 탈영병임을 눈치챈 여관 여주인이 베헤이렌에 전화 연락을 취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 방침에 어긋나는 베헤이렌의 탈영병 지원운동이 그 정도로 일본 대중의 믿음과 지지를 얻을 때였다.

요시카와 유이치는 김진수에게 다시 쿠바 대사관으로 들어가자고 권유했다. ‘8개월이나 신세를 졌는데 이렇게 관계를 정리하면 안 된다’는 취지였다. 요시카와 유이치는 또 “앞으로 자신의 신념과 의사를 쿠바 대사관에 정확하고 성의 있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 뒤 나오는 것이 옳다”고 설득했다. 다음날 두 사람은 쿠바 외교관 차량을 비밀리에 얻어타고 쿠바 대사관에 들어갔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요령껏 피했다. 쿠바 외교당국과 협의 뒤 다시 대사관저를 빠져나온 날은 1월7일. 이후 10여 일을 도쿄도 남쪽 가나가와현 즈시시에 있는 유명 작가 홋다 요시에(46)의 자택에서 보냈다. 한국의 외교 당국이 김진수의 쿠바 대사관 탈출 사실을 처음 인지한 1968년 1월11일 밤에도 김진수는 홋다 요시에의 집에 있었다.

망명신청 보름 뒤 알리도 징집 기피

돌고 돌아 베헤이렌 간부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었을까. 탈영을 결심한 계기가 바로 베헤이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7년 3월 휴가 도중 도쿄의 긴자 거리에서 읽은 한 장의 삐라를 기억했다. 베헤이렌 회원들이 나눠준 ‘미군 병사에게 보내는 일본의 편지’라는 제목의 4쪽짜리 영문본이었다. ‘베트남은 베트남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 더는 베트남 사람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 상관에게 사보타주하고 부대를 이탈하라’는 내용에 마음이 흔들렸다. 김진수는 며칠 뒤 일본 공산당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거쳐 쿠바 대사관으로 감으로써 일본 기지에서 탈영한 최초의 미군이 되었다. 미국 본토에서는 매년 수만 명의 베트남전 징집 거부자가 쏟아지던 때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쿠바 대사관에 들어간 다음날인 1967년 4월4일, 흑인 인권지도자 마틴 루서 킹은 베트남전 반대 발언으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14일 뒤인 4월18일엔 세계권투협회(WBA) 챔피언 타이틀을 지닌 미국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1942년생)가 베트남전 징집 명령을 거부했다.

김진수는 이제 일본 땅을 빠져나가야 했다. 베헤이렌은 두 달 전인 1967년 11월, 항공모함 인트레피드호에서 탈영한 미군 병사 4명을 이른바 ‘요코하마 루트’(요코하마~나홋카~스톡홀름)로 탈출시켰다. 그 뒤 일본 내 미군 탈영병이 속속 출현하자 이들의 망명을 체계적으로 돕기 위해 ‘반전 탈주 미군병사 원조 일본기술위원회’(JATEC)라는 비공개 조직까지 만든 상태였다. 다음은 김진수 차례였다. JATEC는 가나가와현 즈시시에 숨어 있던 김진수를 고베·교토 등에 있는 베헤이렌 회원들의 안전한 자택으로 옮겨 묵게 하면서 밀항 작전을 준비한다.

1. 금 29일자 아사히 조간(4단)에 따르면 지난해 12월29일 쿠바 대사관으로부터 자취를 감춘 그릭스(일명 김진수)는 일본 반전운동가의 조력으로 이미 제3국으로 탈출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보도함.

2. (중략) 제종의 정보를 종합해보면 그릭스는 지난해 12월29일 전후 쿠바 대사관을 떠나 일본의 반전운동가와 접촉하고 뜻있는 인사들이 이를 받아들여 12월 말에서 1월 초 그릭스를 외국 선편에 승선시키는 데 성공, 제3국에 탈출시켰으리라는 것이 대체적인 경위인 것 같다 함. 탈출 행선지는 북한과 쿠바 중 북한 쪽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농후하다 함.(하략)

(1968년 1월29일 주일 한국대사가 외무부 장관 앞으로 보낸 착신전보)

은 결정적으로 잘못 짚었다. ‘반전운동가의 조력’을 받았다는 팩트는 정확했지만, 이미 제3국으로 탈출한 것처럼 오보를 냈다. 이에 따라 일본과 한국의 외교 당국도 잘못된 정보를 취득했다. 김진수는 들키지 않고 잘 숨은 셈이다. 그사이 쿠바 대사관을 한 번 더 들고 난 사실도 미국과 일본의 정보망에 포착되지 않았다.

베헤이렌에 13만엔 거금 쾌척

의 오보엔 나름의 근거가 존재했다. 김진수는 1월17일 고베에서 비밀리에 중국 배에 승선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연락 착오가 생겨 그냥 내렸고, 중국행은 무산됐다. 일본 공산당 내 마오쩌둥 혁명노선을 신봉하는 그룹의 주선으로 중국을 경유해 북한으로 갈 계획이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어수선했다. 물밑에선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논의가 싹틀 때였다. 미군 탈영병을 반갑게 받아줄 분위기는 아니었다.

석 달 뒤인 1968년 4월21일, 김진수는 끝내 제3국으로 탈출했다. 홋카이도 최동단 네무로에서 배를 타고 소련으로 간 뒤 비행기를 타고 스웨덴으로 향하는 새로운 루트였다(스웨덴은 베트남전 당시 미국의 북폭(北爆)을 반대하고 미군 탈영병의 망명과 입국을 허락한 몇 안 되는 나라였다). 그는 떠나기 전 자신을 따뜻하게 지켜준 베헤이렌에 13만엔이라는 거금을 쾌척했다. 몇 년 동안의 월급을 아껴 모은 돈이었다. 김진수는 또한 ‘미국, 일본 그리고 세계의 인민에 보내는 메시지’라는 성명서를 남겼다. “미국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나는 미국 시민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 군대에 들어가 일개 병사가 되어 한국, 일본 그리고 마지막에는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우선 남한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 동시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전쟁이 가져다준 베트남의 상황을 보고 만일 미국이 한반도에서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베트남에서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 한다면 베트남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 미래를 생각했다.”

김진수의 탈출 여정엔 마크 샤피로, 테리 위트모어, 필립 캘리코트, 조지프 크메츠, 에드윈 아네트 등 5명의 미군 병사가 동행했다. 모두 1968년 2월과 3월에 제각각 일본의 미군기지를 탈영한 뒤 베헤이렌을 찾은 이들이었다. 마침내 6명이 스톡홀름 공항에 내리던 순간은 한 장의 사진에 담겨 있다. 미국 사진기자의 작품이다. 가장 키가 작은 김진수는 맨 왼쪽에 있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선글라스를 낀 채 먼 곳을 바라본다. ‘국가’의 존재에 대해 냉소적인 발언을 자주 하는 것 말고는 말수가 별로 없었다는 그의 알쏭달쏭한 캐릭터가 검은 안경 속에 숨은 듯하다. 깔끔한 재킷 차림에 구두를 신었다. 기타를 든 병사도 있다. 마치 친구끼리 여행 온 것 같기도 하다. 해가 쨍쨍한 1968년 4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여행 온 것 같은 망명객들

김진수는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하는 의무를 거부했다. 이제 당분간 양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론 돌아갈 수 없었다. 피붙이가 남아 있을 한국으로도 갈 수 없었다. 일본에 다시 올 수도 없었다. 도피를 통한 자유는 또 다른 부자유의 시작이었다. 고독한 운명의 그림자가 망명객 김진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그 뒤: 김진수는 1970년대 후반 또는 1980년대 초반에 일본을 찾아 자신의 탈출을 도와준 베헤이렌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한국에도 들러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친척을 찾았으나 실패했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그는 근황을 묻는 지인들의 질문에 “스위스에 살고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지금 살아 있다면 68살. 필자는 스위스 한인회와 스웨덴 한인회를 통해 그를 수소문했으나 의미 있는 답신을 얻지 못했다.

■ 참고한 글과 책
외무부 보존문서: 김진수 한국계 미군 주일 쿠바대사관 망명사건, 1967~68
‘국경’ 안에서 ‘탈/국경’을 상상하는 법: 일본의 베트남 반전운동과 탈영병사(권혁태, 2012)
베트남 ‘반전탈주’ 미군 병사와 일본의 시민운동: 생활세계의 전쟁과 평화(남기정, 2012)
隣に脫走兵かいた時代(思想の科學社,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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