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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뒷골목에서 여권위조를 배우다

(22) 탈영한 미군들의 밀항과 망명을 돕는 비밀조직 ‘자테크’의 다카하시 다케토모…
1970년 그가 파리에서 경험한 동서를 가로지르는 국제연대의 힘
등록 2014-08-02 06:12 수정 2020-05-02 19:27
1969년 4월 베헤이렌 회원들이 일본 규슈에서 스피치 투어를 했다. 앞줄 왼쪽 세 번째가 다카하시 다케토모, 뒷줄 맨 오른쪽이 오다 마코토.  릿쿄대 공생사회연구센터

1969년 4월 베헤이렌 회원들이 일본 규슈에서 스피치 투어를 했다. 앞줄 왼쪽 세 번째가 다카하시 다케토모, 뒷줄 맨 오른쪽이 오다 마코토. 릿쿄대 공생사회연구센터

[#1968년 도쿄]

존슨이 사라졌다.

본래 의심스러운 인물이었다. 조직에선 그가 스파이일지 모른다고 미심쩍어했다. 이 백인 남성은 자신이 탈주병이라고 주장하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다. 그즈음부터 누군가가 활동가들의 뒤를 밟고 있다는 낌새마저 느껴졌다. 조직 내부의 고민이 커져갔다. 존슨의 탈주를 도와줄 것인가 말 것인가. 쫓아낼 것인가, 끝까지 보호할 것인가. 존슨이 탈주병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는 없었다. 조직은 또 다른 탈주병 한 명과 함께 그를 탈주 경유지인 일본 홋카이도까지 데려가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문제가 생겼다. 디데이를 하루 앞두고 존슨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전몰학도병을 추모하는 ‘와다쓰미회’

다카하시 다케토모(33)는 이런 사정을 까맣게 몰랐다. 점으로 연결된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만 일했다. 그의 임무는 숨겨주기였다. 자세한 내용은 몰랐다. 묻거나 따지지 말아야 했다. 사람을 만나라면 만나고, 방을 구하라면 구했다. 어떻게든 그가 접촉한 사람들을 안전한 거처에 도피시켜야 했다.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깨알 같은 정보는 알 필요가 없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그것은 비밀이었다. 비밀은 잘 지켜졌다. 한데 존슨으로 불리던 사내가 사라지면서부터 조직 보안에 심각한 구멍이 뚫렸다. 경찰은 존슨과 함께 탈주할 예정이던 또 다른 미군 병사(제럴드 메이어)를 덮쳐 체포했다. 활동가들의 집도 압수수색을 당했다. 존슨을 재워주었던 다카하시의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8년 10월과 11월 사이의 일이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다카하시는 반전평화 단체인 베헤이렌(ベ平連·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 내 ‘자테크’의 최전방에서 궂은일을 하는 활동가였다. 자테크란 ‘반전 탈주 미군병사 원조 일본기술위원회’(JATEC·Japan Technical Committee for Assistance to Us Anti-War Deserters)의 약자다. 베트남 북폭(북베트남 폭격)이 시작된 1965년 봄에 창립된 베헤이렌이 공개적이고 자발적인 시민단체라면, 1968년 초 베헤이렌 내부에 생겨난 자테크는 일본 기지에서 탈영한 미군들의 밀항과 망명을 기술적으로 돕는 비합법 비밀조직이었다. 1968년 베트남전은 극적인 분기점을 맞았다. 설날부터 시작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의 대공세로 2천여 명의 미군 전사자가 속출했고, 그 참상이 가감 없이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인들의 안방에 전해졌다. 미국 본토뿐 아니라 일본 내 미군 기지에서도 탈영병이 쏟아졌다. 이들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자테크가 만들어졌다. 실제 자테크는 1968년 2월부터 9월까지 한국인 출신 김진수, 일본인 출신 시미즈 데쓰오, 대만 출신 오양요차이,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레이몬드 산시비에로를 비롯한 11명의 미군 병사를 일본 땅에서 탈출시켰다. 여기까지였다. 미군 정보기관과 일본 경찰도 잠자코 있지 않았다. 존슨을 보내는 등 스파이 공작을 통해 맞불을 놓은 것이다.

다카하시는 릿쿄대학 조교수이기도 했다. 현직 대학교수의 신분으로 비합법 조직에 몸담게 한 동력은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었다. 그는 1950년 도쿄 아자부고교 1학년 시절부터 ‘와다쓰미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와다’는 바다, ‘쓰미’는 신 또는 영령을 뜻하는 말로, 바다의 영령인 전몰학도병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단체였다. 1949년 10월 출간된 일본전몰학생(태평양전쟁 전사 학생) 수기집 가 1년 만에 30만 부나 팔리면서, 그 판매수익금으로 설립된 ‘와다쓰미회’는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정신으로 1950년대 젊은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이 터졌던 1950년대 초반은 일본 학생들 사이에 전쟁터에 또다시 끌려갈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학생들은 1947년 개정된 헌법 제9조에서 규정한 ‘전쟁 포기’ 조항이 사문화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다카하시는 1952년 도쿄대학 문학부(프랑스문학 전공)에 입학해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계속 ‘와다쓰미회’에 적을 두고 친구들과 병역 거부의 논리와 방법론 등을 연구했다. 그런 그가 1965년 4월24일 베헤이렌의 첫 거리집회에 참여한 뒤 자테크의 열성적인 활동가로 변신하는 과정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즉석 스피치 뒤 즉각 만들어진 항의성명

1965년 가을,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평화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투철해졌다. 말로만 반전을 떠들지 말고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엔 베헤이렌 대표이자 유명한 소설가였던 오다 마코토(1932~2007)로부터 받은 감화가 크게 작용했다. 일본 평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오다가 ‘국제연대 작업’을 위해 파리에 오면, 유학생이던 그가 가이드를 자처해 파리 구석구석을 함께 돌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1967년 봄, 파리의 거리에서 경험했던 대중집회도 평화운동에 헌신하며 살겠다고 결심하는 중대 전기가 됐다. 그는 수백 명이 모인 이 집회 도중 손을 들고 연단에 나가 당시 베헤이렌의 이슈였던 한국인 병사 김동희에 관해 발언했다. 김동희는 1965년 7월 베트남전 파병 명령을 거부한다며 부산의 육군 병기학교를 탈영해 8월 대마도로 밀항한 한국군 병장이었다. 일본 망명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후쿠오카형무소를 거쳐 오무라수용소에 갇혔다. 베헤이렌은 김동희의 한국 강제 송환을 반대하며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중이었다. 다카하시가 파리의 거리집회에서 언급한 김동희의 처지는 좌중들의 공감을 얻었다. 1시간 뒤엔 집회의 정식 의제로 채택됐다. 집회 주최 쪽은 즉석에서 김동희와 관련해 한국 정부에 보내는 항의성명 문안까지 만들어 발표했다. ‘국제연대’의 힘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1968년 가을 베헤이렌과 자테크는 공권력의 위협에 떨고 있었다.

다카하시 다케토모가 유럽에서 전수한 기술로 위조했던 미군 탈주병 존 필립 로의 스웨덴 여권 실물. 미국으로 돌아간 당사자가 일본에 기증했다. 현재 여권을 보관 중인 릿쿄대 공생사회연구센터의 요청으로 사진과 이름을 모자이크했다. 베헤이렌은 미국과 유럽 평화운동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베평련’(베헤이렌) 글자가 새겨진 헬멧을 쓴 미국 여배우 제인 폰다는 미군 기지를 돌며 미군 병사들이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을 호소했다(1971년 12월). 릿쿄대 공생사회연구센터

다카하시 다케토모가 유럽에서 전수한 기술로 위조했던 미군 탈주병 존 필립 로의 스웨덴 여권 실물. 미국으로 돌아간 당사자가 일본에 기증했다. 현재 여권을 보관 중인 릿쿄대 공생사회연구센터의 요청으로 사진과 이름을 모자이크했다. 베헤이렌은 미국과 유럽 평화운동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베평련’(베헤이렌) 글자가 새겨진 헬멧을 쓴 미국 여배우 제인 폰다는 미군 기지를 돌며 미군 병사들이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을 호소했다(1971년 12월). 릿쿄대 공생사회연구센터

1967년 가을 프랑스에서 귀국해 1년 동안 수많은 탈주병들을 숨겨주면서 보람을 느꼈던 다카하시는 절망했다. 미-일 안보조약에 기초한 미군지위협정에 따라, 일본인이 탈영 미군 병사의 은닉과 밀항을 돕는 것은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그러자 경찰은 자테크 사무실을 수색한 뒤 다른 죄명을 뒤집어씌웠다. 존슨을 홋카이도까지 운전해서 데려가기로 했던 활동가를 총포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모조 총을 소지했다는 이유였다. 탈주병들의 체포도 잇따랐다. 1968년 가을, 자테크는 해체 위기에 놓였다. 조직의 책임을 맡은 문학평론가 구리하라 유키오(40)는 두 손을 들었다. 대표를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다카하시는 흥분했다. 이렇게 자테크 운동을 접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감히 나서기로 했다. 자테크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한계에 봉착한 ‘배편’ 그리고 불가능한 꿈

기존의 탈출 여정은 요코하마나 홋카이도에서 배를 타고 소련으로 들어간 뒤 스웨덴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 코스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탈주병들의 입국을 묵인하던 소련 당국도 난색을 표명했다. 배편 이용은 한계에 봉착했다. 다카하시가 새로 책임을 맡은 자테크는 노선을 전환했다. 보호를 요청해오는 탈주병들에게 밀항 대신 양심적 병역거부와 부대 내 반전운동의 조직을 설득했다. 그렇다고 탈주병 밀항 지원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불가능한 꿈을 꿨다. 비행기로 보내자! 여권을 위조하자!!

[#1970년 프랑스]

드디어 그 남자를 만났다.

장소는 좁은 승용차 안이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제3세계 문제에 관여하는 사람”이라고만 한 뒤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왜 파리에 왔는지 알고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서류를 위조해야 한다. 당신이 원한다면 기술을 가르쳐주겠다.”

다카하시 다케토모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잘 부탁드린다”라고 답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렸다. 이번에는 다카하시를 이곳까지 안내해준 여자가 운전석에 올라 핸들을 잡았다. 승용차는 어디론가 향했다. 파리에서 유학한 덕분에 웬만한 거리 풍경을 꿰뚫고 있는 그도 어디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곳이었다. 확실한 사실은 한 가지뿐이었다. ‘아, 드디어 여권 위조 기술을 얻는구나.’

그 목표를 위해 유럽 대륙으로 날아왔다. 1970년 4월이었다. 유럽은 세계 진보운동의 중심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파시즘 운동에 몸을 담던 투사들이 적잖이 생존해 있었다. 알제리 독립투쟁 등 아시아·아프리카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해온 전통과 노하우가 축적된 곳이었다. ‘베트남전 반대’는 유럽을 휩쓴 ‘1968년 혁명’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기도 했다. 이들은 얼마든지 일본의 평화운동가들을 도울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다.

처음엔 이탈리아 공산당 쪽에서 협조 용의가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일본의 베트남 평화운동을 홍보하고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유럽 각국을 돌던 베헤이렌 대표 오다 마코토의 노력으로 성사된 일이었다. 다카하시는 바로 이탈리아로 가 공산당 관계자를 만났지만 허탕만 쳤다. 그 관계자는 “지원을 확답한 일이 없다”고 딴소리를 했다. 이탈리아에서 끝내 협력자를 구하지 못한 다카하시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학계와 좌파 운동단체 인맥을 총동원해 힘을 보태줄 사람을 수소문했다. 다카하시는 유럽으로 오기 전 릿쿄대학 교수직도 그만둔 상태였다. 전학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의 수업 거부 등으로 학기 중에 강의할 기회가 없기도 했거니와, 무한정 대학교수직을 병행하며 자테크 활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이 일에 대한 사명감이 컸다. 어떻게든 성과물을 갖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파리에서 유명한 수학자인 로랑 슈바르츠(1915~2002)의 소개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위조 여권을 만들었다는 기술자를 만났다. 감자를 자른 뒤 안쪽 표면을 칼로 새겨 스탬프처럼 찍는 방법에 관해 들었다. 지나치게 낡고 원시적이라 신뢰가 안 갔다. 지금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서 30여 년이나 더 흐른 1970년이었다. 더 정교하고 세련돼야 했다.

다단계 접속 “드디어 기술을 얻는구나”

승용차의 그 남자를 만나기까지는 그러고도 한참이 걸렸다. ‘제2전선’이라는 단체와 접촉하다가 운이 좋게도 어떤 여성 변호사와 연결됐다. 그 변호사는 “탈주병 망명운동을 정치선전처럼 시끄럽게 하지 않고 조용히 진행하겠다”는 다카하시의 다짐을 받고 나서, 007 작전과도 같은 다단계의 접선을 거쳐 그를 승용차의 남자에게 안내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호텔로 돌아가 무조건 기다리게 한다. 어느 날 현관문 아래 틈 사이로 작은 편지가 배달된다. 내용은 한 문장이다. “○일 ○시에 ○○○로 오시오.” 그 말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간다. 누군가 그를 안내한다. 여러 차례 안내자가 교체된다. 그렇게 하여 승용차 안에서 보스로 보이는 그 남자에게까지 이른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승용차의 남자는 제3세계 해방운동 지원그룹 ‘솔리다리테’(연대)를 이끄는 앙리 쿠리엘(1914~78)이라는 인물이었다. 유대인으로 이집트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 프랑스로 건너와 알제리 독립투쟁 지원활동을 하다 투옥됐던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진영의 거물이었다. 1960년대엔 활동가 교육, 문서 위조 등 광범위한 비합법 활동으로 팔레스타인과 남아프리카의 해방투쟁을 돕고 있었다(그는 10년 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에게 암살당한다).

여자가 운전한 승용차는 어느 아파트 앞에 섰다. 다카하시가 아파트 안에 들어가자 기술자로 보이는 또 다른 남자가 맞았다. 그는 손에 여권 하나를 들고 여권 위조의 원리와 기술의 디테일한 부분을 설명해주었다. “보통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여권을 대충 본다. 스탬프란 게 분명한 부분은 분명하고, 흐릿한 부분은 흐릿해야 한다.” 너무 정밀하게 하면 오히려 의심을 산다는 요지였다. 그는 이쑤시개에 잉크를 묻힌 뒤 점점이 뿌려 스탬프 모양을 만드는 과정을 직접 시연해주었다. 오돌토돌한 요철을 만드는 노하우도 가르쳐주었다. 다카하시는 여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존과 윌리는 무사히 유럽으로

기술만으로는 여권을 위조할 수 없었다. 유럽 여권 원본이 필요했다. 그는 유럽 각국의 진보적 시민단체 사람을 찾아다니며 여권을 모았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만난 진보언론계 인사들은 흔쾌히 즉석에서 자신들의 여권을 꺼내 기증했다. 정부기관에 분실했다는 신고만 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3권을 모았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베트남위원회’라는 시민단체엔 이미 2권의 이탈리아 여권이 준비돼 있었다. 밀라노∼파리를 오가는 열차 1등석 손님들이 짐을 놓고 식당칸에 간 사이 활동가들이 슬쩍 가져왔다고 했다. 그렇게 구한 총 5권의 여권을 일본의 자테크 활동가에게 보냈다. 그냥 우편으로 발송하기는 위험했다. 두꺼운 책을 산 뒤 칼로 파서 그 속에 집어넣어 보냈다.

임무를 완수한 다카하시는 1970년 8월 일본으로 귀국했다. 미군 병사 2명의 국외 탈출이 급했다. 그는 아는 디자이너에게 유럽에서 전수받은 기술을 알려주고 여권 원본들을 넘겨준 뒤 위조를 부탁했다. 마침내 여권 2권이 완성됐다. 스웨덴 외무부가 발행한 여권엔 탈주병 존 필립 로(쿠르스)의 사진이, 이탈리아 외무부가 발행한 여권엔 또 다른 탈주병 윌리의 사진이 붙었다. 사진 귀퉁이를 지나는 요철 입국 도장은 진짜처럼 멋지게 만들어졌다. 존 필립 로는 위조 여권을 들고 1970년 12월의 어느 날 오사카 이타미 공항으로 향했다. 그의 손엔 파리행 비행기 티켓이 들려 있었다. 1971년 6월엔 윌리가 위조 여권을 들고 도쿄 하네다 공항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도 파리행 비행기 티켓이 들려 있었다. 일본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이들의 여권을 검토했지만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출입국 심사를 무사히 마치고 여권을 돌려받은 탈주병들은 출국장에서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 파리에서 내린 그들은 종착지인 (미군 탈주병들의 망명을 허용한) 스웨덴으로 갔다. 위조 여권 기술을 찾아 유럽을 떠돈 4개월은 헛되지 않았다. 기술을 전수해준 프랑스 ‘솔리다리테’와 이를 제대로 배워 써먹은 일본 ‘자테크’의 승리였다. 다카하시 다케토모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그 뒤: 79살인 다카하시 다케토모는 2014년 7월 현재 일본 도쿄에 거주한다. 1970년대 이후 프랑스문학 번역가로 일했다. 2007년 탈주병 지원 과정의 비화를 담은 책 (부제: 최후 밀출국작전 회상)를 출간했다. 여권 위조와 이를 통한 국경 출입은 위법이라 법적 공소시효가 지난 2000년이 돼서야 그 전모를 공개할 수 있었다. 위조 여권으로 출국한 존 필립 로와 윌리는 스웨덴으로 간 뒤 1976년 카터 행정부가 집권하고 나서야 사면·복권돼 미국으로 돌아갔다. 존 필립 로는 일본을 빠져나갈 때 사용한 위조 여권을 일본 시민운동 쪽에 기증해, 일본 릿쿄대 공생사회연구센터가 보관 중이다. 다카하시는 현재 와다쓰미회 기념관 관장직을 맡고 있으며 일본 내 시민운동에 관계한다. 필자는 2013년 11월 도쿄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여권 위조는 베트남전 참전 거부의 과정에서 벌어진 극단적 시대 상황의 산물이다. 독자에게 불법 문서 위조를 부추길 의도가 없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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