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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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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이 시작되자 인간이 사라졌다

하늘을 장악한 군대의 피아 구분 없는 무차별 살상
등록 2018-10-13 09:28 수정 2020-05-02 19:29
❶ 1945년 9월8일, 미국 해군 항공기가 찍은 서울 광화문 일대의 모습. 조선총독부와 경복궁이 보인다. 미국 National Archives Ⅱ 소장(RG 80-416774).

❶ 1945년 9월8일, 미국 해군 항공기가 찍은 서울 광화문 일대의 모습. 조선총독부와 경복궁이 보인다. 미국 National Archives Ⅱ 소장(RG 80-416774).

비행기가 띄워지기 전까지 하늘은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간의 순수한 욕망이 비행기로 실현되자 세계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인간의 눈과 발이 되어 시공간을 압축했다. 하늘을 지배하는 능력은 세계를 지배하는 권능과 동일했고, 비행기가 열어젖힌 항공 시대는 단순히 기술에 한정되지 않고 지배 권력의 핵심 요소로 등장했다. 마치 신의 눈이 지상의 인간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문제는 누가 그 신의 지위에 먼저 오르느냐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군이 그런 지위를 누렸다. 태평양전쟁은 거함 거포주의(예전에, 대규모 함정과 대포를 실은 함대를 작전의 중심에 세워야 한다던 해군의 군사 사상)가 끝나고, 항공기를 탑재한 항공모함의 도래를 알리는 계기였다. 바다는 하늘에 지위를 양보했다. 일본 공격을 위해 규슈·혼슈·시코쿠·홋카이도·오키나와와 대만, 필리핀 등을 촬영했던 미국은 비행기를 띄워 육지의 주요 시설을 항공촬영하는 기술력과 경제력을 가진 유일한 나라였다.

1945년 9월 미군이 남한에 상륙했을 때, 그들은 점령지 남한을 파악하기 위해 비행기를 띄웠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 서울로 행진했을 때, 이 경로를 따라 해군 비행기는 인천과 서울 시내의 주요 장소를 촬영했다. 아직 공군이 탄생하기 전이라 미군 비행기는 주로 해군 소속이었다. 지금도 미 해군의 공중전 능력은 웬만한 국가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으며, 미 공군에 이어 세계 제2위의 항공 전력을 가지고 있다.

1945년 8월 말과 9월 초, 미군은 남한 각지의 주요 시설을 촬영하기 위해 비행기를 띄웠다. 미 해군 비행기는 서울, 부산, 인천, 군산(장항), 진주, 마산, 제주 등의 대도시와 항만을 항공촬영했다. 일본군이 사용했던 군사기지와 공장이 몰려 있는 산업단지는 물론이거니와, 전력 시설, 주요 도로와 다리, 시가지를 상세히 촬영했다. 지도 작성을 위해 대부분의 사진은 3천m 상공에서 90도 각도로 찍었지만, 일부는 대상지를 비스듬히 촬영했다.

하늘의 신이 된 미군정

미군이 찍은 항공사진은 해방 직후 한국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거리가 뚜렷이 보이고, 즐비한 건물들의 위치도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지도로 보는 것과 달리 3차원 항공사진은 대도시의 거리와 경관을 선명히 보여준다.

사진❶은 미 해군 항공기가 찍은 서울 광화문 일대의 모습이다. 가운데에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이고, 경복궁과 세종대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오른쪽 위로 경기고등학교가 보이고, 그 밑에 보이는 학교 건물이 수송초등학교(현재 종로구청)다.

항공촬영으로 미군은 육지와 해안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축적할 수 있었다. 땅 위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살아갔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미군은 공장과 군사기지가 어디에 있고, 좌표가 어디인지를 현대적 기술력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미군은 지상의 정보를 속속들이 알려 했고, 항공사진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하늘의 신이 지상의 인간을 내려다보며 인간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듯, 미군정은 한반도 전 지역을 하늘에서 내려다봄으로써 그것을 이루어냈다. 공간좌표로 지상의 모든 것에 위치를 부여할 수 있었던 미군은 세상을 마음대로 하는 현실 세계의 신이었다.

미군은 항공사진을 기초로 1949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남한 지역을 대상으로 5만 분의 1 축척 지형도를 제작했는데, 38도선 이남 지역은 모두 283장의 지도로 만들어졌다. 이 지도는 한국전쟁 때 미군과 한국군의 작전에 쓰였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하늘의 주인은 오직 미군이었다. 해전과 육전에서 중심 역할을 한 공군은 독립적 가치를 인정받았고, 이에 미국은 1947년 육군에서 공군을 독립시켰다. 미 공군은 최신의 기술력과 대량의 항공기를 소유한 최강의 군대였다. 하늘은 항상 미군의 독무대였고, 전쟁 초기부터 북한 공군은 미 공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초기 육지 전투에선 인민군에게 밀렸지만, 미군은 월등한 공군을 가졌기에 후방 보급선을 마음껏 타격했고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어디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폭탄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1951년 1·4 후퇴 때 피란을 떠난 많은 사람이 “공산당도 싫었지만, 그 무시무시한 폭격이랑 원자폭탄이 더 무서웠지”라고 회고했다.

“공산당도 싫었지만 폭격이 더 무서워”
❷ 1952년 8월29일, 미국 제5공군은 가장 큰 규모로 평양을 폭격했다. 온종일 계속된 폭격으로 연기가 자욱하다. 미국 National Archives Ⅱ 소장(RG 342-FH, NASM 4A 38911).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❷ 1952년 8월29일, 미국 제5공군은 가장 큰 규모로 평양을 폭격했다. 온종일 계속된 폭격으로 연기가 자욱하다. 미국 National Archives Ⅱ 소장(RG 342-FH, NASM 4A 38911).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전쟁 초기부터 북한 지역을 폭격한 미 공군은 전선이 고착화하는 1950년 말부터 폭격 대상을 넓혀갔다. 폭격은 군사기지나 보급창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이른바 ‘전략 폭격’이란 이름 이래 민간 거주지 폭격을 감행했다. 1950년 11월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사령관은 북한 지역의 모든 설비와 마을에 대한 폭격을 지시했다.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사령관은 맥아더가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초토화 작전을 고집”했다고 회고했다.

미군이 한국전쟁 3년 동안 쓴 폭탄의 양은 63만5천t인데, 이는 태평양전쟁 때 쓴 50만3천t보다 많았다. 태평양전쟁이 치러진 지역이 한반도 넓이의 수십 배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투하된 폭탄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난 것은 당연했다. 커티스 르메이 미 공군 전략공군사령관이 폭격으로 북한 인구의 20%를 죽였다고 말할 정도였다. 미 극동공군은 집중적이고 대대적으로 북한의 주요 도시를 폭격했고, “이 지역이 사막으로 변했다”고 맥아더 사령관이 말할 정도로 도시들은 잿더미가 됐다.

전쟁이 끝났을 때, 북한의 주요 도시는 미군 폭격으로 삶의 터전이 완전히 파괴돼 남은 것이 없었다. 미 공군의 폭격 결과 통계에 따르면, 북한의 22개 도시가 네이팜탄 공격을 받았는데, 흥남 시가지 85%, 원산은 80%, 신의주는 60%, 사리원은 95%가 파괴됐다.

수도 평양은 초토화돼, 시가지의 75%가 파괴됐다(사진❷). 김일성이 “미군의 폭격으로 73개 도시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평양에는 두 채의 건물만 남았다”고 말했을 정도다. 평양 지하철은 100m 지하에 깊숙이 만들어졌고, 곳곳에 대규모 지하 시설을 지었다. 폭격을 견뎌내기 위해서였다.

폭탄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피해를 가져온 것은 네이팜탄이었다.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 에는 정글에 투하된 네이팜탄으로 1∼2㎞의 정글이 갑자기 불바다로 변하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네이팜탄은 휘발유를 젤리로 농축해 불이 잘 붙게 하는 소이제와 함께 금속통 안에 넣은 것이다.

땅 위에 불벼락을 내리는 네이팜탄
❸ 1951년 3월6일, 네이팜탄으로 극심한 화상을 입은 여성 3명이 경기도 수원 근처 구호소에 모여 있다. 화염과 추위로 시커멓게 변한 얼굴과 손이 붕대 사이로 보인다. 미국 National Archives Ⅱ 소장(RG 111SC, 357516-W).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❸ 1951년 3월6일, 네이팜탄으로 극심한 화상을 입은 여성 3명이 경기도 수원 근처 구호소에 모여 있다. 화염과 추위로 시커멓게 변한 얼굴과 손이 붕대 사이로 보인다. 미국 National Archives Ⅱ 소장(RG 111SC, 357516-W).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군사시설을 대상으로 한 일반적인 폭격과 달리, 네이팜탄은 특정한 사람이나 건물을 노리는 게 아니라 대상 지역 전체를 겨냥한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한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한다. 이 때문에 미군의 네이팜탄 사용은 국제적 문제를 일으켰고, 현재는 비인도적인 무기로 간주돼 사용이 금지됐다.

네이팜탄을 입에 올리면, 많은 사람이 베트남전에서 찍힌 한 사진을 떠올린다. 이 사진에는 미군의 네이팜탄 투하로, 온 마을이 불길에 휩싸인 상황에서 겁에 질린 한 소녀가 울부짖으며 불길 속을 알몸으로 뛰쳐나오는 모습이 담겼다. 그래서 네이팜탄은 베트남전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지지만, 실제 한국전쟁 때 대량 사용됐다. 미군이 한국전쟁 때 쓴 네이팜탄 양이 무려 3만2천t이었다.

네이팜탄은 북한 지역에서만 사용된 것도, 군인만을 조준해서 쓰인 것도 아니었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네이팜탄은 민간인 피해를 불러왔다. 사진❸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네이팜탄으로 피해를 입은 한국 여성들이다. 화상을 입은 얼굴과 손은 붕대로 칭칭 감았고, 붕대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미8군 사령관 매슈 B. 리지웨이 중장은 1951년 1월 “네이팜탄으로 마을을 소각하는” 작전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는 참혹한 민간인 희생이었다. 1월19일 경북 예천군 산성동, 다음날에는 충북 단양 곡계굴에서 미군 폭격과 네이팜탄 투하로 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적을 향해 불벼락을 내리는 하늘의 신은 분별하는 눈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아군과 피란민을 폭격하는 일도 많았다. 피란민을 오폭해 사상자가 나면, 미군은 임무를 수행하다 빚어진 사소한 실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실수를 군대에서는 ‘부수적 피해’라고 한다. 군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말은 민간인 피해를 가볍게 여기는 생각이 반영돼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마주치지 않는 폭격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육군 항공대 폭격비행단에서 폭격수로 복무했다. 독일 베를린,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폭격에 참여했고 서부 프랑스에선 네이팜탄 폭격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20여 년 뒤 프랑스를 찾았는데, 자신이 참여한 폭격으로 프랑스인 1천 명 이상이 죽은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또 체코 폭격에서도 민간인 수백 명이 죽은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공군의 공식 역사서는 5명의 민간인 사상자만 있었다고 기록했다.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군대에 들어간 하워드 진에게 민간인 폭격 경험은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남겼고, 그가 평생 동안 반전운동을 하는 배경이 되었다.

폭격의 인적·물적 피해는 매우 크지만, 이를 실행하는 조종사나 포격수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 폭격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 ‘비대면 살해’의 대표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기계화되고 습관적인 동작을 취할 뿐이지만, 땅 위에선 수많은 사람이 아비규환의 상황에서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이 광경은 조종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종사의 눈에 ‘하늘은 맑고, 구름은 하얗다’. 과학기술의 고도화는 인간관계를 시야에서 사라지게 함으로써, 비인간적 행위를 가능하게 했다.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세계는 해양 시대에서 항공 시대로 바뀌었다. 이제 비행기의 시대는 가고, 버튼 하나로 실행 가능한 미사일의 시대가 되었다. 미사일 시대에 파괴 강도는 더욱 높아져 인류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과학기술 발달은 물리적인 시공간을 축소했지만, 인간과 인간의 거리는 그에 비례해 더욱 멀어졌다. 그리고 폭격의 배후에 도사렸던 끊임없는 증오와 적대의 정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미국 육·해·공군의 사진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http://archive.history.go.kr)에서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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