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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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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은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검찰과 오제도 마지막편
‘민간인 학살’ 보도연맹에 검찰이 적극 개입한 배경
등록 2020-02-15 15:30 수정 2020-05-02 19:29
1949년 6월2일 에버렛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미국 국무부에 보고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보고서. 강성현 제공

1949년 6월2일 에버렛 드럼라이트 참사관이 미국 국무부에 보고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보고서. 강성현 제공

1949년 4월20일 서울시경찰국 한 회의실에서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이 창설됐다. ‘보도’(保導)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좌익 사상에서 국민을 보호하고 지도해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대표(간사장)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던 박우천이 맡았다. 솔직히 현대사 연구자에게도 박우천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그와 함께 발기인이 된 전향자 500여 명도 그렇다. 그런 전향자들이 모여 대한민국에 충성하고 공산주의(와 남로당)를 타도하는 단체를 만들었으니 세간의 관심을 크게 끈 것 같지는 않다.

보도연맹 키워 검찰권 강화

그런데 6월5일 명동 시공관(市公館)에서 열린 결성 선포대회에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성식의 하이라이트는 보도연맹 임원 발표였다. 보도연맹 총재로 김효석 내무장관, 부총재로 백한성 법무차관과 장경근 내무차관이 선임됐다. 이사장은 김태선 서울시경찰국장(서울지방경찰청장), 명예이사장은 치안국장(경찰청장)이 맡았다. 고문 명단은 더 휘황찬란하다. 신익희 국회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등 국가요인 24명이다. 박우천은 전향자를 대표하는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주한 미국대사관도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에버렛 드럼라이트 참사관은 결성식 직전인 6월2일 미 국무부에 ‘국민보도연맹’(National Guidance Alliance)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보냈다. 그가 쓴 3쪽짜리 보고 외에 보도연맹 취지, 강령, 활동 계획, 조직도가 첨부돼 있었다. 그는 나름 중국통으로 “적을 이용해 적을 친다”(以夷制夷)는 발상을 모를 리 없고, 한국에 대해서도 아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이제이’를 위한 단체 결성에 한국 정부 기관과 요인의 이름이 총출동하는 것은 그에게도 생경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성 초기 보도연맹은 내무부 주관 아래 서울시경이 주도하고 서울지검 정보부가 협력하면서 운영됐다. 그러나 그해 12월 보도연맹 조직개편 뒤에 서울지검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보도연맹을 관리·운영한 실질적인 의사결정 기구가 최고지도위원회였는데, 최고지도위원 6명 중 4명이 이태희 서울지검장과 정보부의 사상검사였고, 나머지 2명이 서울시경국장과 사찰과장이었다. 그 배경은, 지난 연재에서 다루었듯이, 사상검찰이 국회·법조 프락치 사건의 수사 지휘와 경찰 및 군수사·정보기관이 저지른 ‘불법 체포’와 ‘고문치사’ 사건 수사에 나서면서, 라이벌인 경찰과 군수사·정보기관을 견제하고 주도권을 갖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제1294호 ‘그 사상검사는 대권을 꿈꿨다’ 참조)

이 무대의 진짜 주인공은 오제도 검사였다. 그는 보도연맹 창설의 기획자이자 실질적인 운영자였다. 오제도는 서울지검 제1정보부를 중심으로 전국 검찰의 정보부를 연계하는 사상검찰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그런 ‘힘’이 있던 그가 전국 규모로 조직한 반공 ‘관변단체’가 보도연맹이었다. 약 1년 동안 전국 조직으로 급성장해 그 규모가 ‘6·25전쟁’ 직전에 약 30만 명을 넘어섰다.

그런데 왜 이런 단체를 만들었을까? ‘이이제이’ 발상이 있었다는 건 검찰·보도연맹 관련 문서와 오제도 등 관계자의 말에서 금방 확인된다. 오제도와 사상검찰은 남로당 및 좌익 계열의 정당과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던 자, 국가보안법 위반자 중 ‘개전의 정’이 있는 ‘사상범’ 피의자(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숱하게 만들어낸 피의자)에 대해서 ‘공소보류’(기소유예) 처분하고, 보도연맹에 가입시켜서 “공산당을 때려잡는 반공 전위대”로 삼으려 했다. 당시 검찰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해 조문에 ‘보도구금’ 제도 관련 조항을 넣었는데, 현실 여건의 어려움으로 이를 도저히 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보도소’ 구금 대신 보도연맹 단체를 동원해서 전향자를 관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이 검찰권을 강화하고 오제도의 입지도 단단하게 했다.

부역자 재판을 받기 위해 이동하는 부역 혐의자들. 강성현 제공

부역자 재판을 받기 위해 이동하는 부역 혐의자들. 강성현 제공

‘좌익 무관’ 알고도 가입시키기

그럼 보도연맹에 동원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중앙본부와 지방지부의 요로에 있는 인사들은 거의 좌익 전향자로 봐도 무방하다. 그 외 상당수는 좌익 사상이나 활동과 상관없이 ‘빨갱이’ 자루에 마구잡이로 쓸어담긴 사람들이었다. 중도 민족주의자, 한국독립당 같은 김구 계열 우익도 그 자루를 피해가기 어려웠다. 친이승만 외에 정치적으로 선명하지 않은 회색지대는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보도연맹에는 자진(자수) 가입자가 많았다. 여러 이유로 “알아서” 자수 가입했다. “나라를 위해서 도장을 찍으라” 해서, “가입자들은 대부분 비료를 준다”는 말에, 명부 작성자에게 개인적 원한을 사서, 그 이유와 계기도 각양각색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가입한지도 몰랐던 사람도 꽤 있다. 명부 작성자가 상부에서 회원 가입 할당을 받고 이를 채우기 위해 ‘애매한 사람’의 이름을 동원한 사례가 여럿 있다. 지방의 어떤 단체는 통째로 단체 회원 명부가 보도연맹 가입 명부로 바뀌기도 했다.

보도연맹 관리 당국도 이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1950년 2월11일 국회 본회의(제6회 제28차)에서 논의된 ‘보도연맹 조직 및 운영에 관한 긴급질문’에서 오간 질의와 답변을 보면, 이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됐음을 보여준다. 장경근 내무차관은 사람들을 최대한 가입시켜놓고 교육·훈련한 뒤 심사해 사람들을 내보내는 게 당국의 방침이라고 답변했다. 김갑수 법무차관은 더 구체적으로 “앞으로 한 사람의 가맹자도 없게 하는 것이 본래의 취지인 만큼 우선 서울에서는 3월에 2천 명을 탈맹”(〈자유신문〉 1950년 2월12일치)시킬 방침이라고 했다. 이에 보도연맹 최고지도위원회 위원장인 이태희 서울지검장은 “완전 전향자”의 탈맹 사업 구상을 발표했고, 오제도의 정보부는 탈맹 심사 기준을 마련해 심사했다. 그렇게 추려낸 탈맹자가 6982명이었다. 6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2만여 보도연맹원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탈맹식을 열었고, 6982명은 “완전 전향자”, 다시 말해 ‘빨갱이’가 아님을 공인받았다.

그런데 오제도와 사상검찰의 기획, ‘이이제이’하면서 검찰권도 강화하고, ‘빨갱이’ 적의 마음을 완전히 탈바꿈해서 대한민국에 충성하게 만든다는 국가 프로젝트가 애당초 가능한 것이었을까? 게다가 ‘빨갱이’라고 새겨진 주홍글씨를 지우는 ‘탈맹’이라는 게 진정 가능한 일이었을까? 만일 ‘6·25전쟁’이 벌어지지 않고 이 사업이 계속 진행됐다면, 학교를 졸업하듯 모든 맹원이 탈맹해 궁극적으로 보도연맹이 자연 해소될 수 있었을까?

당국은 겉으로 탈맹을 축하했지만 그 후에도 마음속 진정한 전향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않았다. 검찰과 경찰은 ‘요시찰인’ ‘요경계인’ ‘사찰전과자’ ‘감시대상자’ 등 다양한 호칭의 탈맹자 명부를 작성해 관리했다. 겉으로는 충성스러운 반공 국민으로 추어올렸지만, 실제로는 ‘비국민’처럼 보았다. 애초 확인 불가능한 마음속 문제에 대해 당국은 “엄격한 심사”를 해서 판정했지만, 그 속의 속, 그러니까 진정한 속은 혹시 여전히 빨간 게 아닐까 의심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상 관계 당국의 임무이자 권력의 원천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오제도와 사상검찰의 보도연맹 기획이란 건 빨간 안경을 쓰고 국민을 줄 세우고 보면서 결국 ‘배제한 채 포섭’하는 꼴이었다.

이 기획의 끝이 ‘자국민 대량학살’이라는 엄청난 파국으로 귀결됐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약 10만 명이 조직적으로 학살됐을 것으로 추산한다. 전쟁의 발발로 탈맹 여부와 상관없이 보도연맹원은 전방의 군사적 적, 그리고 도처의 ‘빨치산’과 호응할 수 있는 내부의 적으로 간주해 절멸 대상이 되었다. 보도연맹원 예비검속과 학살은 경찰과 군(헌병, 방첩대 등)의 손에 의해 저질러졌지만, 검찰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자신이 만든 ‘부역자 처리 요령’ 자랑도

오제도는 전쟁 기간 법으로 국가폭력을 견제하기는커녕 적극 편승하더니 아예 법으로 국가폭력을 작동시키는 법-폭력의 기술자가 되었다. 그는 훗날 회고에서 자신이 부산에서 마련한 이 ‘부역자’(附逆者·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한 행위자)를 심사하는 매뉴얼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1976년 6월28일치). 실제 오제도는 ‘서울 수복’ 뒤 부역자 심사와 처벌을 위해 조직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서 김창룡 대령(합동수사본부장)과 함께 실세 중의 실세였다. 이임하에 따르면, 합동수사본부는 수사기관이 아니었다. 심사반은 서류 심사 등을 통해 부역자를 군법회의에 넘길지, 검찰을 통해 민간재판에 부칠지, ‘포로’로 간주해 헌병에 넘길지, 석방시킬지 결정하는 재판 기관 행세를 했다(서중석 외, , 선인, 150쪽, 2011). 그곳에서 그는 ‘검사 대표’라고 자처하고 다녔다. 그는 잔류파 국회의원, 문화인 등 주로 ‘거물’을 맡았고 관대하게 처분했다고 회고하는데, 분명한 건 부역자에게 생사여탈권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김두식, , 창비, 489쪽, 2018).

‘오제도 천하’의 위세도 오래가진 않았다. 오제도의 ‘힘’은 검찰권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상대가 누구든, 심지어 상대가 검사일 때도 오제도는 프락치 사건으로 상대를 제거하거나 굴복시켰다. 검찰 안팎에서 평안도 공안 라인에 대한 반감도 커져가고 있었다. 결국 검찰이 토사구팽하듯 직접 나섰다. 오제도에게 프락치로 몰려 당할 뻔했던 검사들을 동원했다. 오제도에게 씌운 혐의는 착복죄였다. 오제도가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13일 보도연맹에 배급된 면사를 임의로 매각 처분해 2천여만원을 착복했다는 것이다. 오제도는 1952년 1월 초부터 도망 다녔고, 약 6개월을 은신했다. 그는 그해 7월12일 검찰에서 파면됐다.(, 489~492쪽)

오제도의 인생은 거기서 실패한 채 끝나지 않았다. 1957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오제도를 서울지검 정보부장으로 불러들여 힘을 실어주었다. 그의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1958∼59년 국가보안법 3차 개정과 ‘2·4 보안법 파동’에서 조용히 활약했던 그는 1960년 3·15 부정선거 이후 마산과 부산 등에서 시위와 저항이 격렬해지자 다시 한번 대공3부 합동수사위원회 검찰 대표로 나섰다. “공산오열”이니 “적색분자 준동”이니 평생 갈고닦았던 방식으로 증거 없이 학생시위를 공산당의 음모로 몰아붙이려 했다. ‘4·19 혁명’ 뒤 그는 처벌받지 않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몇 차례 부침이 있었지만, 1970년대 라디오 드라마와 영화 시리즈가 크게 히트하면서 그는 다시 ‘반공 영웅’으로 등장했다. 그 인기에 힘입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공안검찰의 상징에서 한국 극우세력의 상징이 되었다.

“○○ 때 가장 쿨했다”며 반성 없는 검찰

오제도의 인생은 한국 검찰과 공안의 역사와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시도되는 검찰개혁은 단지 검찰 제도와 조직을 개편하고, 무슨 ‘통’이니 ‘계’니 하는 라인과 인사를 청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법의 외피를 쓰고서 자국민에게 국가폭력을 저질러왔던 과거의 사실을 철저히 조사하고 대면해서 응답하는 방식으로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한국 검찰과 공안은 자신의 흑역사에 대해 깜깜했던 건지, 지금껏 단 한 번도 조직 차원에서 사과한 적 없다. 노무현 정부 때 경찰·군·국가정보원, 그리고 법원이 조직 차원에서 과거사위원회를 구성해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형식적으로나마 사과했던 것과 대조적인 행태다. “우리가 직접 한 것은 없고 경찰, 군, 정보기관이 저질러서 넘어온 것을 법적으로 처리했을 뿐, 우리는 직접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옛날이 좋았지” “○○ 때 가장 쿨했다”라는 말을 무심코 내뱉는 것이다.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동아시아연구소 냉전평화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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