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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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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프락치 사건으로 날개 단 ‘사상’검찰

군경에 밀리던 해방공간, 검찰권 강화 주역 반공검사 오제도
등록 2019-12-05 00:43 수정 2020-05-02 19:29
특별수사본부 1탄 <기생 김소산>. 감독 설태호, 원작 오재호. 오제도 검사 역은 최무룡, 김소산 역은 윤정희가 맡았다. 제12회 대종상영화제(1973)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

특별수사본부 1탄 <기생 김소산>. 감독 설태호, 원작 오재호. 오제도 검사 역은 최무룡, 김소산 역은 윤정희가 맡았다. 제12회 대종상영화제(1973)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

반공검사 오제도가 있다. 1970년대 책깨나 읽었거나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반공 히어로(영웅)’ 오제도를 잘 알 것이다. 동아방송의 라디오 드라마 는 당대 빅히트작이었다. 이것이 실록소설 (1972년 초판 전 14권, 1974년 중판 전 21권)로 출판됐고, 1973년 을 시작으로 까지 총 7편의 영화로 제작됐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수사시리즈물의 간판은 단연 문화방송(MBC)의 이라 할 수 있지만, 유신체제 아래에서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남로당 지하당”과 싸우는 반공검사의 수사 무용담, 특별수사본부의 이야기도 당대 사람들에게 꽤 인기를 끌었다.

반공 뒤에 가려진 고문과 조작

서사의 소스(출처)는 오제도가 1969년 출간한 이다. 이 책에서 오제도는 자신을 정부 수립 전후에 있었던 ‘좌익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마치 스파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그린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반공검사의 활약을 과장하거나 미화한다. 직접 수사하거나 수사 지휘를 하면서 다반사로 벌어진 고문과 조작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러면서도 검찰이 지배하는 형사사법 전 과정에서 반공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검사의 무소불위와 막강함에 대해서는 꼼꼼히 보여준다. 이 책을 추천한 이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라는 사실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오제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반공검사로서 그의 면모를 영웅화하는 평가는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김두식 교수는 오제도가 “학력과 경력에 대한 집착”이 많았다 한다.(김두식, , 244쪽, 2018) 오제도는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3년제) 법과 졸업 뒤 1940년부터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서기 겸 통역생으로 일했다. 이때 오제도는 사상검사 나가사키 유조의 사상 전향 정책이자 (권력)기술인 ‘대화숙’ 사업에 영향받았는데, 일제강점기 검찰의 사상 통제와 전향의 방법과 기술을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5년 해방 당시 7년 이상의 경력을 갖추지 못해 검사가 될 수 없었고, 1946년 9월19일 실시된 ‘시험 없는’ 판검사 특별임용시험을 통해 검사가 되었다.

오제도 검사는 열등감으로 월등한 학력과 경력을 가진 피의자들을 “참으로 모질게 다뤘다”고 한다. 그는 반공·타공 전선에서 직접 수사하거나 수사를 지휘하면서 수사 피의자의 고문과 사건 조작을 서슴지 않았는데, 검찰은 오 검사의 ‘타공(打共) 선봉장’으로서 활약이 검찰권 강화에 부응하는 한 그를 용인하고 비호했다. 김익진 검찰총장 시기에는 평안도 인맥이 ‘공안 라인’을 장악해, 오 검사를 끌어주고 밀어주었다.

지난 연재글에서 나는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한민국 검찰의 ‘슈퍼 파워’(막강한 힘)를 이해하려면 한국 검찰사법의 역사적 형성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고, 이 역사는 일제와 식민지 검찰사법의 족보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지난 글에선 미군정기에 검찰이 미군정 당국, (군정)경찰, 법원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사상검찰’을 부활시켰고, 형사소송법에 담아야 할 검찰 권한 사항을 ‘셀프(스스로) 제정’한 검찰청법에서 수사 주재자임을 ‘셀프 규정’했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정부 수립 뒤 검찰이 경쟁적 위치에 있던 경찰, 헌병대, 육군 방첩대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어떻게 사상검찰을 재조직하고 상대적 우위를 확보했는지, 그 과정에서 한국 공안검사의 아버지인 오제도 검사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1948년 12월1일 국가보안법 제정이 사상검찰의 재조직에 큰 계기로 작용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다. 다만 국가보안법은 검찰이 기획하고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이인 법무부 장관과 권승렬 검찰총장은 법을 제정하는 국회 독회 과정에서 이 법이 내포한 예비검속적 성격, 즉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마음속에 있는 목적을 사전에 판단해 처벌하는 것이 일반 형사법 원칙에 어긋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랬더라도 검찰은 일제강점기 ‘사상사법’의 경험 속에 이 법의 시행이 검찰권을 강화하는 데 절호의 기회라는 걸 알았다. 그 기회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이 법으로 수사와 기소 기관에 엄청난 권한과 재량이 부여될 것이고, 이를 둘러싸고 경찰과 군 수사기관과의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터였다.

1948년 (과도)검찰청법은 대검에 정보과, 지검에 수사과 설치를 규정하고 있지만,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대검에 정보부서를 설치하는 대신 서울지검의 ‘사상계 사무’를 더 특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장재갑 부장검사를 중심으로 정보부에 오제도, 선우종원, 정희택 검사를 배치해 사상검찰을 재조직했다.

1950년 5월20일 국민보도연맹 월간지 <창조> 창간호 편집회의. 콧수염을 한 오제도 검사가 한가운데 앉아 있다. 그 왼쪽은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인 정백이, 오른쪽은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이던 이선근이 있다. 경향신문

1950년 5월20일 국민보도연맹 월간지 <창조> 창간호 편집회의. 콧수염을 한 오제도 검사가 한가운데 앉아 있다. 그 왼쪽은 보도연맹 명예간사장인 정백이, 오른쪽은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이던 이선근이 있다. 경향신문

군경 vs 검찰

사상검찰은 사상범죄 처리의 구체적인 실무 방침을 세워나갔다. 먼저 ‘사상범’을 정치범과 분리하고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작업을 했다. ‘일제 사상범=정치범=독립운동가’ 인식이 지배해 사상범 용어를 적대적으로 쓰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건국을 방해하는 범죄” 용어의 등장이 중요하다. 이때부터 “납치, 감금, 파괴, 살상 등 정치적 색채를 띤 사건의 관계자”를 더 이상 정치범으로 취급하지 말고, ‘적색 사상’을 가진 ‘파렴치범’으로 처리하게 되었다.(권승렬 검찰총장 통첩, ‘건국에 방해되는 범죄 처단에 관한 건’, 1948년 12월16일) 이로써 사상범을 전문 처리하는 사상검찰의 존재 이유가 확보됐다.

다음으로, 사상검찰은 1948년 12월27일 전국 검찰감독관회의(검사장 회의)에서 국가보안법의 구체적 해석과 운용 지침을 마련했다. 이 회의에서 오제도 검사는 서울지검 명의로 제출된 ‘자문답신안’을 써서 냈다. 그 내용은 일제강점기 검찰의 사상범 처리 방법과 기술을 답습했다. 우선, 수사 주재자로서 사상검찰의 위상 강화를 강조한다. 수사 단계에서 경찰을 지휘해 ‘사상 관계 요시찰인’을 사찰해 정보를 수집하고 ‘검사 직접 수사’ 체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소 단계에서 전향 가능한 사상범 피의자의 공소를 보류하고 사회로 복귀시킨 뒤 감시하고 보호, 지도하도록 한다. 이 공소보류처분제는 일제강점기 사상검찰의 ‘유보처분’이라는 권력기술과 거의 같다. 마지막으로 엄벌주의 기조 아래 사상범을 처벌하되 “사상의 시정”, 즉 ‘개전의 정’이 있는 사상범 피의자는 교화해서 “공산당을 때려잡는 반공 전위대”로 삼도록 실무 방침을 세우고 있다. 일제 사상범보호관찰소·사상보국연맹·대화숙의 방법과 기술이 오제도를 거쳐 1949년 국민보도연맹의 조직 발상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오제도의 구상은 검찰감독관회의에서 그대로 채택됐다. 회의에 참석한 법무부 장관과 검찰 수뇌부는 식민지 검찰과 변호사 경력이 있던 인물들로, 식민지 검찰의 사상 문제 대책에 매우 익숙했다. 이후 오제도 검사는 이 답신안과 회의에서 논의된 여러 문제에 대해 경찰학교, 각 경찰서, 헌병학교 등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한 법조문 해석과 통용 한계”를 강의했고 이를 정리해 1949년 8월 를 펴냈다. 이 책자는 국가보안법의 법리적 설명이 아니라 법을 실무적으로 운용할 때 쓸 수 있는 지침을 묶어놓은 것이다. 부록에 각종 조서, 보고서, 작성례와 좌익 용어 해석, 좌익 기구와 조직 체계표 등을 실었다.

1949년 반공 드라이브

1949년은 사상검찰에 아주 중요한 해였다. 기회는 주어졌고 결과는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성공과 실패, 어느 쪽으로 기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습격 테러,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등으로 전개된 1949년 ‘6월 공세’ 속에 검찰, 경찰, 헌병, 육군 방첩대는 ‘타공 투쟁’ 능력의 우위를 점하고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정받으려 출혈경쟁을 벌였다. 검찰은 김익진 검찰총장의 지휘 아래 서울지검 ‘사상 라인’에 이태희 검사장, 장재갑 정보부장, 오제도와 선우종원 검사 등 ‘서북파’로 채워 반공 드라이브(몰이)를 걸었다.

검찰이 실질적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검찰의 기소 지휘만으로 역부족이었고, 독자적 수사 지휘가 가능해야 했다. 그 계기는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마련됐다. 이 사건으로 김약수 부의장 등 소장파 국회의원 총 18명이 구속됐다. 5명은 국민보도연맹 가입 등을 조건으로 기소유예(공소보류) 처리됐고, 나머지 13명은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당시 당국 발표와 달리, 최근 학계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작된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제헌국회 내에서 정부에 비판적 목소리를 낸 소장파 그룹을 파괴하기 위해, 위에서는 이승만 정부와 민주국민당이 공조하고, 아래에서는 서울지검 정보부, 서울시경 사찰과, 헌병대가 수족이 되어 활약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서울지검 정보부의 수사 지휘 활동이 주목된다. (1964)과 (1985) 등 당국의 자료와 오제도의 회고를 보면, 오제도 검사가 서울시경 사찰과와 공조해 김호익의 특별수사팀을 지휘해 국회 프락치 사건을 적발했다 한다. 이에 대해 ‘여간첩’ 정재한에게서 나온 암호문서(증 제1호)를 가공해 끌어와서 대형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조작했다고 비판하는 연구들은 오 검사의 수사 지휘가 결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미군정기 내내 검찰은 기소 지휘에 국한된 채 경찰에 대한 수사 지휘가 거의 불가능했고, 검찰청법 제정 뒤에도 사정이 바뀌지 않았는데, 국가보안법 제정 이래 첫 ‘중대 사건’인 국회 프락치 사건을 계기로 사상검사가 수사 지휘에 나섰던 것이다. 게다가 내사 단계에서는 서울시경 사찰과, 2차 검거 뒤 취조 단계에서는 헌병과 협력했다.

1949년 8월에 나온 <국가보안법실무제요> 초판본. 초판본만 1만여 권이 팔렸다고 한다. 경향신문

1949년 8월에 나온 <국가보안법실무제요> 초판본. 초판본만 1만여 권이 팔렸다고 한다. 경향신문

사상검찰 수사 지휘로 탄생한 법조 프락치 사건

민간인 접근이 불가능한 헌병사령부에서 오제도 검사와 헌병대 수사관이 현역 국회의원을 밀실 수사하는 상황은 변호인 접견을 차단한 채 ‘소통 불능’ 상태에서 행해진 반복적인 고문이었다.(김정기, , 161~163쪽, 2008)

국회 프락치 사건은 법조 프락치 사건으로 확대됐다. 이때만 해도 검찰, 경찰, 헌병대는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를 벌이는 듯했다. 그러나 곧바로 사상검찰의 수사 지휘는 반공 투쟁에 한정된 것이었음이 판명됐다. 사상검찰의 조직과 역량이 경찰, 헌병, 군 방첩대와 비교할 때 우위에 있지 못했다.

*다음 연재글에 이어집니다.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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