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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상검사는 대권을 꿈꿨다?

검찰과 오제도 3부…

서울지검 일개 검사를 허위 모략한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의 배경
등록 2019-12-30 04:37 수정 2020-05-02 19:29
‘국회 프락치 사건’ 선고 공판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50년 3월15일치). 강성현 제공

‘국회 프락치 사건’ 선고 공판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50년 3월15일치). 강성현 제공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은 ‘프락치’ 반공 신화의 고전 텍스트다. 이 사건 이후 한국에서 프락치는 오랫동안 ‘빨갱이’처럼 저주받은 낙인으로 각인됐다. 각인되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사회에서 추방돼야 할 존재가 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받아도, 조작된 증거로 ‘사법 살인’을 당해도 사회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특히 당시 언론은 수사 당국이 발표하거나 누출한 범죄혐의를 아무런 검증 없이 ‘사실 보도’의 이름으로 진실인 것처럼 보도했다. 현직 국회의원 18명이 납치되듯 고문수사 받고 재판 없이 장기간 구금(최장 1년 가까이 미결 구류)된 사실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김정기, , 216~221쪽, 2008)

“취조와 고문”과 “말눈깔사탕”

이 사건은 오제도 검사 등 서울지검 공안 라인이 경찰과 헌병 등 수사기관을 수사 지휘했다. 내사 단계에선 서울시경 사찰과와 협력했고, 취조 단계에선 헌병대와 협력했다. 1949년 11월17일 첫 공판부터 1950년 3월14일 선고 공판에 이르기까지 공소유지를 담당한 오제도, 선우종원 검사 등과 사광욱 판사 등 재판부는 환상적인 ‘공안 재판’을 연출했다. 일제강점기 사상검사와 사상판사들의 조화를 떠올리게 했다. ‘소장파 의원’ 13명에게 최고 10년부터 최하 3년에 이르는 실형이 내려졌다. 마찬가지로 떠들썩했지만 사건 피의자가 검사·판사·변호사이던 법조 프락치 사건 관계자들이 집행유예 또는 무죄판결로 일단락된 것과 대조적이었다.(김두식, , 471~472쪽, 2018)

현직 국회의원들이 극심하고 반복적인 고문을 받고 거짓 자백을 한 것은 재판에서 피고인의 고백문과 최후 진술, 변호사의 변론, 판사의 사실심리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판사는 고문을 아주 당연하다는 식으로 대응했고, 그 자백에 신빙성을 두었다.(김정기, 193쪽)

김옥주 의원이 있었다. 그도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 취조를 받았고, ‘고백원문’(자백문)을 제출했는데, “취조와 고문 등”과 관련해 “당하는 사람도 쓰라리지마는 하는 사람도 참으로 못할 노릇”이라는 심경을 우회적으로 토로했다. 이 문장은 황윤호 의원의 자백문처럼 검열돼 흑색으로 지워지지 않았다.(김정기, 163~165쪽)

그런 일을 당한 김옥주 의원에게 오제도 검사는 1950년 2월10일 결심 공판에서 6년을 구형했다. 그러면서 일본 와세다대학 동기동창으로 가까운 친구였는데 검사와 피고인으로 만나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김옥주를 감옥으로 면회 갈 때 그가 좋아하는 말눈깔사탕을 사다주기도 했고 조사가 끝난 후 정담을 나누기도 했다”며 “친구를 단죄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각색한다. 오제도와 검찰은 수사 지휘하면서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냈다. 그런데 기만적으로 우정을 말하는 오제도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당시 고문수사와 오제도 검사(검찰)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실제 국회와 법조 프락치 사건의 수사·기소가 진행되던 즈음, 또 다른 고문치사 두 건이 벌어졌다. 하나는 고희두 동대문 민보단장의 의문사 사건이었다. 죽은 사람이 ‘우익 인사’여서 은폐되지 않고 파장이 커졌다. 10월15일 검찰은 김창룡의 육군 방첩대에 의한 고문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방첩대 도진희 이등중사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고, 상관인 김창룡 중령은 공군본부로 좌천성 발령을 받고 한동안 한직을 돌았다. 또 다른 사건은, 10월23일 경기도 경찰국에서 국보급 식물학자 장형두 교수가 경찰 취조 중 ‘변사’한 사건이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과 달리 두 고문치사 사건으로 신문지상에서 연일 경찰과 군 수사·정보기관의 불법 체포와 고문 사례가 보도됐다. 검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국회와 일반 여론에 경찰과 헌병대, 육군 방첩대의 불법 수사 행태와 인권침해를 견제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국회에서 심의 중이던 검찰청법을 조속히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1949년 12월19일 헌병과 국군정보기관의 수사한계에 관한 법률(법률 제80호)과 12월20일 검찰청법(법률 제81호)이 공포됐다.

국가폭력 그 자체 경찰과 군수사기관

헌병과 국군정보기관의 수사한계법 핵심은 민간인 수사, 구속, 구금을 제한하는 것이다. 방첩대 등 군정보기관의 민간인 범죄 수사는 완전히 불법화됐다. 헌병 등 군수사기관은 반드시 검사의 지휘를 받도록 했으며, 형사소송법에 근거하되 긴급구속을 할 수 없다는 조건 아래 민간인 수사가 허락됐다. 이를 위반했을 때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또한 헌병대 유치장 또는 영창에 불법 구속자는 없는지, 구속·구금자 가혹행위는 없는지 군법무관이 감찰하도록 했다.

검찰청법은 정부 수립 직전 제정된 (과도)검찰청법의 연속에 있으며, 신설 조항도 있다. 바로 대검 직속 중앙수사국 설치, 검찰수사관 제도 도입, 사법경찰관에 대한 직무(수사) 중지 명령권 및 체임(교체) 요구권이다. 중앙수사국은 범죄 수사의 지도 연구, 검찰총장이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범죄 수사를 맡으며, 산하에 수사과·사찰과·특무과를 두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을 모델로 해 검찰총장 직속의 전국적인 범죄 수사를 지휘·감독하고 중대 사건을 직접 수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사법경찰관에 대해 지검장이 수사 중지를 명령하는 등 경찰에 대한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더 명확하게 했다.

두 법은 검찰 중심 수사 지휘와 수사기관 일원화의 의지를 전면에 드러낸 것이다. 경찰과 군수사·정보기관이 크게 반발했지만, 국회와 언론은 큰 논란 없이 검찰 손을 들어주었다. 경찰과 군의 불법 체포, 고문 취조를 통한 자백 강요 등 ‘거악’(巨惡)의 수사 관행에 ‘차악’(次惡)인 검찰이 견제해주길 바라는 심리가 깔렸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6·6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습격, 6·26 김구 암살, 여러 프락치 사건들, 그 밖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사건 처리에서 경찰과 군수사·정보기관의 행태는 사실상 국가폭력과 테러 그 자체였다.

검찰도 이런 행태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국회와 언론은 법이기에 최소한의 합리성과 절차성은 갖출 것이라 보고 상대적으로 나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검찰도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타공(공산당 타도) 투쟁’에 적극적이어서 반공 사법에 내포된 정권안보 사법 성격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때론 검찰 중립성을 극단적으로 침해하는 대통령과 대립하는 모습도 보여줬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검찰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는 김익진 검찰총장이나 최대교 서울지검장의 모습은 최고권력자의 충복으로 활동하는 다른 기관과 비교됐다.

주한미국대사관 그레고리 헨더슨이 미 국무부에 보낸 국회 프락치 사건 선고 공판 관련 발송문(1950년 3월14일). 강성현 제공

주한미국대사관 그레고리 헨더슨이 미 국무부에 보낸 국회 프락치 사건 선고 공판 관련 발송문(1950년 3월14일). 강성현 제공

사상검찰의 산실이 공식적으로 재편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검찰조직을 위한 것이었다. 두 법의 제정으로 경찰과 군수사·정보기관의 불법 수사와 구금, 고문 사례가 줄었는지는 검찰의 궁극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주도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해 검찰권을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일등공신은 서울지검 공안 라인의 정보부 검사들이었다. 1949년 12월2일 검찰은 대검을 비롯해 서울고검과 대구고검, 그리고 각 지방검찰청에 정보부를 설치하고, 대검·고검·지검 차장검사를 정보부장에 임명하며, 정보부 전담 검사도 1명씩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궤도에 올라 있던 서울지검 정보부에 대해서는 부장검사 1명을 정보부장으로 전임하게 하고, 검사 5명을 전담 배치한다고 밝혔다.( 1949년 12월2일치)

이 조치로 사실상 사상검찰의 산실이었지만 조직 체계상 애매모호했던 기존 서울지검 정보부가 공식적으로 제1정보부(또는 정보1부)로 재편됐다. 이와 함께 장재갑 정보부장은 서울지검 차장검사로 승진했고, 오제도 검사가 새로운 제1정보부장이 되었다. 이렇게 이태희 서울지검장, 장재갑 차장검사, 오제도 제1정보부장, 선우종원 검사(법무부 검찰과장 겸직)로 이어지는 평안도 공안 라인을 중심으로 전국 검찰의 정보부와 연계되는 사상검찰 진용이 일차 완성됐다. 서울지검 제1정보부는 대검 중앙수사국이 아직 발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숱한 ‘사상전’을 벌였고, 반공 사법 확립의 선봉장이 되었으며, 검찰은 물론 정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까 검찰이 ‘공안계’와 ‘특수통’이라는 쌍발 엔진으로 날아다니기 전에 정보부가 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공투쟁의 경쟁 기관뿐 아니라 여러 정치세력의 견제가 상당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권력자나 권력기관 간 암투가 문제를 항상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하는데, 1950년 4월 ‘대한정치공작대 사건’도 그러했다. 이는 대통령 직속 정보·사찰·수사를 할 수 있는 최초의 민간 정보기관 설립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욕망과 이에 부응하면서 ‘정적’ 제거를 시도하던 일부 친이승만 정치세력이 벌인 조작 사건이다. 그 정적 명단에는 김성수, 조병옥, 김준연 등 반이승만 성향의 유력 정치인과 그 계열의 군경 수뇌부뿐 아니라 신성모 국방부 장관 같은 또 다른 친이승만 인사도 포함됐다. 게다가 타공 진영의 선봉장 오제도 정보부장과 최운하 서울시경 사찰과장도 있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인지 수사했고, “빨갱이 허위 모략 조작”( 1950년 4월11일치)을 밝혀냈다.

오제도는 한참 세월이 지난 뒤 회고에서 대한정치공작대 창설 배후 세력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신을 모함했는데, ‘오제도가 전국 규모의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한 게 대권을 꿈꾼 것이고, 고향이 평안북도로 흥사단 계열이니 야당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 공산당 전향을 위해 아량을 보이는 것이 수상하다’ 했다는 거다.( 1976년 6월24일치)

사상검찰은 그대로, 바뀌는 건 사람뿐

이런 허위 모략의 배경에는 오제도 검사의 ‘힘’에 대한 견제가 자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오제도 검사는 서울지검의 일개 정보부장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사상검사에게 부여된 수사와 기소, 기소유예 권한을 통해 정국을 좌우할 힘을 가진 반공 사법, 공안 사법의 실무 지휘자였다. 사상사건의 인위적 창출과 조작은 그와 사상검찰진에도 능숙한 방법이자 도구 같은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을 기소하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김익진 검찰총장은 불기소 처분이 불가하다고 회답했다. 국회에서 국회조사단이 진상 보고를 했고, 언론도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이 사건을 전혀 없었던 것처럼 덮기는 어려웠다.

서울지검 제1정보부와 대검 차장검사의 수사·기소 지휘는 이 사건을 ‘추악한 정치 브로커의 음모’ 수준으로 축소했지만, 이것도 대통령 눈 밖에 나서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은 인사 교체를 당했다. 특히 김익진 검찰총장은 서울고검장으로 좌천 인사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쯤 되니 사람만 바뀔 뿐, 사상검찰 조직의 위상과 제도화된 권한에는 거의 타격이 없었다.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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