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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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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소탕 작전’ 군이 숨기려 했던 사진들

“지리산 안은 다 적이었다”는 백선엽 마지막 이야기
등록 2019-09-27 04:33 수정 2020-05-02 19:29
사진❶ 빨치산 혐의를 받는 여성과 아이들 포로. 강성현 제공

사진❶ 빨치산 혐의를 받는 여성과 아이들 포로. 강성현 제공

“공산주의 빨치산 혐의를 받고 있는 두 여성 전쟁포로”가 수용소로 이송되기 전 포로 등록 절차를 위해 조사받고 있다.(폴 E. 스타우트 상병의 사진 설명) 여성의 오른쪽으로 갓난아기를 업은 남성과 앳된 아이들도 있다. 이 여성과 아이들은 어디에서 포획됐기에 “빨치산 혐의”를 받고 “전쟁포로”로 등록되고 있을까?

사진❶의 촬영일은 1951년 12월10일. 바로 이날 스타우트 상병이 찍은 사진은 필자가 확인한 것만 해도 12장이다. 백선엽 장군의 이름을 딴 백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이하 백야사)가 12월2일부터 1차 토벌 작전을 전개하면서 생포한 포로 수가 빠른 속도로 늘던 때였다.

사진❷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포획한 빨치산 포로들과 이를 지켜보는 송요찬 장군. 강성현 제공

사진❷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포획한 빨치산 포로들과 이를 지켜보는 송요찬 장군. 강성현 제공

미군이 찍은 사진엔 전쟁포로 여성과 아이들

백야사는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백선엽의 대게릴라전 경험을 높이 사 작전 책임을 맡기면서 설치됐다. 기존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을 맡던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와 각급 경찰부대 병력에다 새로 최전방에 있던 국군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빼내서 후방 작전에 투입했다. 또한 한국 공군과 미 극동사령부 심리전 부대의 지원을 받아 유례없는 대규모로 구성했다.

1차 토벌 작전은 계엄 선포 뒤 12월2일 아침 6시에 개시돼 12월14일까지 진행됐다. 지리산을 남북으로 나눠 수도사단이 남쪽에서, 제8사단이 북쪽에서 ‘타격부대’가 되어 지리산 산정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갔고, 나머지 예비대는 ‘저지부대’가 되어 포위망을 빠져나오는 ‘공비’를 토벌했다. 작전 지역에 지리산 인근 마을들이 포함됐고, 공군의 폭격과 기총소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토벌군은 “포위망을 좁혀가며 산골의 가옥과 시설을 모두 소각해 다시는 공비들이 거점으로 이용할 수 없도록 하고 주민들을 구호소로 소개시켰다”( 224쪽) 한다.

백선엽에 따르면, 포위망이 좁혀지면서 곳곳에서 전과 보고와 함께 포로들이 수용소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포로는 “북한 정규군 출신과 남로당 출신의 입산자, 공비에 가담한 지역 출신자들”이었고, “나이는 10대부터 40대까지 분포됐으며… 여자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225쪽) 한다.

사진❷에서는 헌병의 삼엄한 경계 속에 수도사단장 송요찬 장군과 미군 선임고문관 코너드 힐데란트 대령이 수도사단 기갑연대의 토벌 작전 결과 생포된 빨치산 포로들을 지켜보고 있다. 다친 빨치산 포로는 지도와 여러 문서철을 갖고 있던 간부급이어서 산 채로 잡혔을 것이다. 그 뒤로 트럭에서 아직 내리지 않은 여성들이 보인다.

사진❸의 피사체는 대부분 여성이다. 나이 든 여성들, 혹은 혹독하게 추운 지리산 겨울을 나기에는 초라한 행색의 사람들이다. 과연 모두 빨치산일까? 이들은 간단한 심문을 거쳐 ‘혐의’만으로 모두 전쟁포로가 되었다. 사진❹에는 동상에 걸려 앉아 있는 여성이 전쟁포로임을 나타내는 ‘꼬리표’를 들고 있다. 포로가 된 일시, 장소 등 정보가 적혀 있다.

사진❸ 수도사단 사령부 내 임시 방책 안에서 대기 중인 빨치산 포로들. 강성현 제공

사진❸ 수도사단 사령부 내 임시 방책 안에서 대기 중인 빨치산 포로들. 강성현 제공

백야사 1차 사살·생포 2540명 “기대 못 미쳐”

당시 대규모 후방 토벌 작전이 전개됐기에 국내외 신문기자들은 남원과 구례로 몰려와,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224쪽) 하지만 이 넉 장의 사진은 군 검열로 언론 배포가 제한됐다. 군은 토벌 작전의 경과와 전과를 언론에 알려야 했지만, 여성과 아이들 위주의 피사체가 담긴 사진을 배포하기는 어려웠다. ‘토벌’되는 게 빨치산인지 지역 주민인지, 언론이 의문을 제기하는 사태는 껄끄러웠을 것이다. 1950년 겨울부터 1951년 초까지 이어진 공비 토벌 작전, 특히 1951년 2월 일어난 ‘거창 사건’이 그해 4월부터 미국 등 외신에 알려지면서 신성모 국방장관, 김준연 법무장관, 조병옥 내무장관이 경질됐고 군 관계자들이 유죄판결을 받았던 때다. 심지어 ‘자유 진영’ 내에서도 전쟁의 정당성에 회의감이 들고 있었다.

제11사단의 토벌 작전은 ‘거창 사건’뿐 아니라 함평 사건, 고창 사건, 산청·함양 사건 등 숱한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귀결됐다. 제11사단장 최덕신 장군은 부하 지휘관들에게 “100명의 공비를 사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중에 상당한 부분이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광복군 출신인 최덕신이 이럴 정도인데 일본군 출신이거나 제주도, 여수·순천 등 전남 동부 지역에서 주민들을 토벌한 경험이 있는 부하 연대장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최근 백선엽의 평가도 이런 생각의 뿌리가 쉽사리 제거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수백 명의 양민이 국군의 총구 앞에서 숨져간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수비를 위한 방벽을 견고하게 쌓고 들판을 비워 적을 없앤다는 ‘견벽청야’의 독한 토벌로 빨치산이 상당한 타격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355쪽) 이쯤 되면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베트남전쟁 때 훈령은 고마울 지경이다. 물론 현실은 어떤 훈령과도 괴리가 너무 커서 민간인들이 대량 토벌되는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백야사 작전이 개시되기 전 김성수 부통령은 백선엽에게 친필 서한을 전했다. “주민들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군경의 민폐가 심한 현실을 직시하고 부디 국민을 애호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지 말고 치안을 확보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앞의 책 366쪽)달라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건 백선엽의 반응이다. “과거 빨치산 토벌 작전은 대개 1개 사단이 나서서 빨치산이 숨어 있는 지역을 초토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백야사의 작전은 빨치산을 즉석에서 사살하지 않고 생포했으며, 이들을 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따랐던 사람들을 하나라도 건져내기 위해서”(367쪽)였다 한다. 양민 곁에 빨치산이 바싹 붙어 있어서 서로 섞여 있으니 토벌 작전의 핵심은 비민(匪民, 공비와 양민) 분리에 있고, 공비 소탕은 토벌 못지않게 기회주의적 태도를 가지는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백선엽의 말도 같은 선상에 있다. ‘양민’이니 ‘주민’이니 했지만, 빨치산 옆에 있는 한 보호받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거둔 백야사의 1차 토벌 작전 전과가 “사살 940명, 생포 1600명”. 백선엽은 “주력이 아니라 말단 부대와 빨치산을 따라다녔던 부역자들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는 데 그쳤”으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자평한다(390~392쪽).

사진❹ 동상에 걸려 앉아 있는 여성 빨치산 포로. 강성현 제공

사진❹ 동상에 걸려 앉아 있는 여성 빨치산 포로. 강성현 제공

빨치산 잡으려 자국민도 학살

2·3·4차 작전이 연이어 전개됐고, 1952년 3월14일 모든 토벌 작전이 완료됐다. 이에 대한 전과 기록은 다소 제각각이다. 전사편찬위원회의 (1988)는 4차 작전을 제외하고도 사살 7737명, 생포 7993명, 귀순 506명으로 기록했다. 백선엽은 최근 회고에서 사살 5009명, 생포 3968명, 귀순 45명이라 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 사살 6606명, 포로 7115명으로 집계했다. 이런 공식 통계는 최소치일 것이다. 백선엽도 “실제 사살 및 포로는 추정 숫자를 훨씬 상회했다. 이는 공비들의 세력이 강력했고, 공비들에 포섭된 비무장 입산자도 많았음을 반증한다”( 229쪽)고 말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피란민이었다.

빨치산의 완전 소탕, 이를 위한 계엄 선포와 비민 분리. 그 와중에 파괴되는 주민들 삶의 터전. 더 나아가 빨치산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자국민 학살도 각오하겠다는 백선엽과 군 수뇌부의 발상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빨치산 토벌 작전 계획은 미군에서 나왔다. 안정애의 연구(2005)에 따르면, 백야사는 전적으로 밴 플리트가 구성하고 작전 개요를 세웠다. 밴 플리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의 최전선 그리스의 미군사고문단 단장으로 부임해 좌익 세력 척결과 공산 게릴라 토벌에 큰 공을 세운 대게릴라전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그리스에서 함께했던 윌리엄 도즈 중령 등 고문 장교 60여 명을 백야사에 지원했다. 장비 지원만 한 것이 아니라 작전, 연락, 통신, 심리전 등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 전단 992만 장이 지리산에 하얗게 덮일 정도로 대량 공중 살포된 것도 그런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만주군 출신 장교의 한국전쟁과 주한미군에 대한 인식’ 348~349쪽)

미군의 대게릴라 토벌 방식 전수는 1948~49년으로 거슬러 간다. 미군은 제주4·3 사건과 여순 사건의 진압, 1949년 빨치산 완전 토벌 여부를 이승만 정권의 생존 능력을 알아보는 ‘리트머스시험지’로 간주했다. 미군사고문단은 토벌 작전 계획을 세우고 현장에서 감독했다. 국군 정보국 고문이던 하우스만과 리드 대위는 여순 진압 작전 계획을 주도적으로 세웠다. 1949년 초 지리산 토벌 작전의 고문이었던 그린피스 소령도 모든 수단을 동원한 소탕 작전을 입안했다. 이 작전에 마을 파괴와 ‘무자비한 살상’이 포함됐다. 미군의 적극적인 계획과 지원 아래 정일권이 지휘하는 토벌대는 여순 사건의 주동자 홍순석과 김지회 등을 사살하면서 지리산 토벌 작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잔혹 행위’ 간도특설대 경험도 바탕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49년 한여름에 육국본부 정보국장에서 광주 5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겨 1949년 겨울 토벌을 지휘했던 백선엽의 행보다. 그는 미군 고문 장교의 의견에 언제나 긍정적이고 우호적이었다. 미군의 빨치산 토벌 작전 개요와 방식도 잘 이해했다. 그러나 그에게 또 다른 경험 자원이 있었는데, 바로 간도특설대 경험이다. 빨치산 유격대의 각 근거지를 봉쇄·고립시키고, 산간 마을 주민들을 소개한 뒤 근거지에 대규모 소탕전을 전개하는 건 일본 관동군과 간도특설대가 벌였던 반만항일 유격대 토벌 작전에서 나왔다.

백선엽은 회고를 통해 “만주군에 있을 때 익히 들었던 것”이라며 마오쩌둥 전술을 설명하고, 1949년 전후를 “중국의 상황과 다를 바 없었다”고 주장한다(322~323쪽). 이건 정일권이 예관수와 함께 1948년 8월에 펴낸 유격전 교육교재 의 인식, 주장과 일치한다. 그들은 “제주도 폭동 세력”이 중국 공산군의 유격전법을 쓴다는 미확인 주장을 유포하면서 제주4·3을 ‘폭동 사건’으로 낙인찍었다. 이런 인식에서 보면 초토화 작전과 민간인 학살은 기껏해야 폭동 진압 명령을 과도하게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실수 정도로 취급된다.

흥미로운 점은, 2011년 백선엽 회고록에서 “마을을 모두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이 “적과 아군을 제대로 식별할 여유가 없을 때에는 빠른 진압을 위해 국군이 간혹 펼치곤 했던 극단적인 방법”이고 “빨치산과 관련이 없는 양민에게는 한순간에 가옥과 전 재산을 잃는 절망적인 일”(326쪽)이라고 인정했다는 거다. 그럼에도 그는 1949~50년과 1951~52년에 초토화 작전이 벌어진 것은 부하 장교의 원한이나 잘못 등으로 치부하고,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회피한다. 이게 백선엽 회고의 특징이기도 하다. 작전 오류를 순순히 인정하는 대목에서 본인은 전지적 시점으로 숨어버린다. 동료와 부하의 잘못이고, 국군 처지에서 보면 불행이지만 예외적인 것이라는 태도를 취한다.

백선엽은 정일권·김백일·김응조·신현준·이용 등 만주군 출신이 민심 획득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배웠고, 특히 간도특설대가 이를 잘 지켰다고 주장한다. “죽이지 말라, 태우지 말라, 능욕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며, “게릴라 토벌은 민심을 얻어야만 성공한다는 점을 항상 마음속에 새겼다”( 52쪽)는 것이다. 그러나 허은 교수는 간도특설대의 잔학 행위는 이미 여러 자료로 입증됐고, 1951년 백야사도 실제 민심 획득을 최우선하는 작전을 전개했는지 의문이라고 평가한다.(허은, ‘냉전분단시대 대유격대국가의 등장’ 449~450쪽) 무엇보다 “공비 토벌을 위한 민심 획득”은 백야사가 지역 주민의 안전을 우선한 것이 아니라 토벌 작전 과정의 선무 대상으로 주민을 바라봤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지리산 인근 주민 20만 명 있었지만…

백야사 작전 참모였던 공국진 대령이 1965년 백선엽을 비판한 증언을 봐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지리산 주변 9개 군 주민이 20만 명인데 백선엽이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이 깔린 토벌 작전으로 많은 아이와 부녀자가 포로로 포획됐고, 광주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리 되면 아이든 부녀자든 다 얼어 죽을 거다. 동족상잔하는 마당에 양민과 적은 가려서 취급해야 하지 않냐고 공국진이 백선엽에게 항변했다고 한다. 그는 수많은 양민이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반수 이상 죽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성을 보호하면서 전투를 해야지 성과 위주로 하면 안 된다. …송요찬(수도사단장)도… 최영희(제8사단장)도 다 반대했”고, “길이길이 두고 욕을 먹”을 거라고 했다.(‘백선엽 지리산 토벌 작전 때 양민 집단 동사’ 2011년 6월21일치, ‘백선엽, 이 양반은 지리산 안은 모두가 적이다 이래서…’ 2011년 6월29일치) 공국진 증언에 대한 백선엽의 반론은 별도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반해 올해 한국전쟁기 광주 중앙포로수용소를 분석한 석사 논문(정찬대, ‘국민 만들기의 폭력적 동화’)이 나왔는데, 공국진의 증언이 허언이 아님을 뒷받침하고 있다.

강성현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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