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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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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만 희생만 한 게 아니란다

등록 2015-02-17 06:43 수정 2020-05-02 19:27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머니와의 사이처럼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 인간관계가 또 있을까. 유사 이래 자식들은 어머니를 숭배하고 동정하고 원망하고 혐오하느라 늘 바빴다. 어머니는 사랑과 그리움의 원천이며 모든 아름다운 것과 포근한 것의 이데아라는 주장이 언제나 있어왔지만, 내가 오늘 이 모양 이 꼴인 이유는 다 엄마 때문이다, 내가 자신감 없는 것은 엄마가 나를 억압했기 때문이고 사랑을 줄 줄 모르는 것은 어려서 사랑받지 못한 탓이고 자존감이 바닥인 것은 엄마가 나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유의 엄마 원죄론 역시 강력하다. 실제 이상한 엄마에게 휘둘린 희생자도 많지만, 저 엄마 참 억울하겠다 싶은 경우도 많다. 예컨대 내가 이렇게 잘나고 진취적인 이유는 실은 엄마가 너무 연약하고 무능해 보여 일찌감치 철이 나버렸기 때문이라는 해괴한 원망도 하고, 내가 이렇게 꿈과 야망이 없는 이유는 엄마가 너무 잘나서 진작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즉, 엄마란 이래저래 원망을 피해가기 어려운 참으로 힘든 자리인 것이다.

한겨레21 류우종

한겨레21 류우종

의 셰릴은 내가 이렇게 막 사는 이유는 엄마가 너무 짜증나게 희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엄마가 너무 착했기 때문이라고, 너무나 자식밖에 몰랐기 때문이라고, 엄마가 당신 인생은 내팽개친 채 나와 남동생을 위해서만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랬던 엄마가 느닷없이 죽었기 때문에 나는 엄마에게 친절해볼 기회도 못 가졌고 사과할 틈도 없었고 그래서 엄마가 밉고 나 자신을 죽여버리고만 싶다고. 셰릴의 엄마는 알코올중독자의 아내로 늘 맞고 학대받으면서도 아이들을 최우선순위에 놓고 행복하게 해주는 데 몰두했다. 어려서는 이런 엄마를 불쌍히 여겼지만, 크면서는 못 배우고 세상 물정에 무지한 엄마를 무시하며 늘 웃고 노래하는 엄마를 뭔가 모자라서 그러는 여자로 치부해버렸고 대놓고 상처 주기도 서슴지 않았다. 그랬던 엄마가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셰릴은 원망과 죄책감으로 마약에 젖어 창녀 같은 삶을 산다.

는 이런 처자가 거대한 자연에 맞서 싸우고 스스로를 이기며, 한 번 더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기까지의 이야기다. 자연과 부딪치며 우주를 만나고 그 속에서 엄마와 대화하고, 결국 상처를 추스르고 다시 한번 인생의 첫머리에 강인하게 선다. 셰릴의 새 출발을 축복하며 지나가던 나그네로 한마디 건네줄 수 있다면, 참새 같은 어린 남매 앞에서 엄마가 노래를 불러주었을 때, 엄마는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지만 실은 아이들 덕분에 스스로도 즐거웠던 거라고, 엄마는 너희를 위해 희생만 한 게 아니라, 너희 때문에 또한 충만하게 행복했을 거라고 일러주고 싶다.

오은하 직장인·영화진흥위원회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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