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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유령은 지금도 세계를 배회한다

등록 2005-01-25 15:00 수정 2020-05-02 19:24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혁명가 3 - 마르크스]

20세기 최대의 거대담론을 제공했던 마르크스… ‘신념’은 빛을 잃었지만 ‘비판이론’으로서는 건재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소련이 붕괴한 뒤 현실 사회주의를 미래의 이상향으로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렇다. 지난 10여년 동안 사회주의는 ‘죽은 개’처럼 취급받아왔다. 마르크스주의는 그저 ‘비판’ 세력이기는 했지만, ‘대안’이 될 수는 없었다. 19세기 중반 마르크스로 대변되는 공산주의는 전 유럽을 배회하는 공포의 대상(마르크스의 말에 따르면 ‘유령’)이었다. 그 유령이 1917년 러시아혁명을 통해 현실이 됐다. 그리고 1991년 이 현존 사회주의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남기며, 경멸 속에서 또다시 죽어갔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 현실을 빗대어 거꾸로 이렇게 표현했다.

“마르크스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자본주의는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 있지만…

하지만 마르크스 이후 누구도 이 마르크스의 명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지난 150여년의 역사를 통틀어 마르크스만큼 사람의 골치를 썩게 한 사람은 드물다. 그의 이론에 동의하는 사람에게도,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마르크스는 똑같이 끊임없는 논쟁 대상이었다. 그의 이름을 붙인 마르크스주의는 어떠한 종교보다도 더 많은 순교자를 냈고, 가장 많은 ‘안티’를 만들어냈다. 그 이단과 아류의 이름을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책 한권은 넉넉히 메울 만큼 무수한 가지가 자라났다. 역설적으로, 그 수다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을 읽은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전부 독파한 사람들만큼이나 드물겠지만 말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자본주의의 탄생을 보고한 산파였다면, 마르크스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자본주의의 사망을 진단한 암 전문의였다. 비록 환자가 의사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있지만, 마르크스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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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스템은 순환상에 문제가 있다.”

“치료하는 게 불가능하다. 선천적 질병인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이 환자는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게 인류를 위해 좋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그들의 진단이나 희망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가고 있다.

마르크스는 독일 라인주 트리어에서 유대인 기독교 가정의 7남매 가운데 세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1836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해 법률, 역사, 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841년 예나대학에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1842년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 신문 <라인 신문>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이 신문의 편집장이 됐다. 이 신문은 2년 뒤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폐간됐다. 그 직후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위인 W. 예니와 결혼하고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한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적 언론에 기고하고 사회주의 내용의 저작에 힘을 쏟는다. 그는 이어 <독불연보>를 출간한 것을 계기로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된다.

1845년 벨기에 브뤼셀로 간 그는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는 한편 기고와 저술에 박차를 가한다. 이런 노력 속에서 1844년 <경제학 철학 소고>와 <헤겔법 철학 비판서설>을 썼다. 그리고 1845년 프리이드히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저술한다.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처음으로 유물사관의 주장을 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47년 그는 무정부주의자 P. J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같은 해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여기에 가입해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 명의로 집필한다.

지독한 물질적 곤궁… 엥겔스가 도와줘

한편 1848년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 파리, 쾰른 등지로 가서 직접 혁명에 참가했으나 그곳들의 혁명은 좌절하고 만다. 그에게는 잇따라 추방령이 내려진다. 그는 다시 런던으로 망명해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칩거한 채 저작에 몰두한다. 그동안 그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 곤궁에 심하게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1851년부터 미국 <뉴욕 트리뷴>의 유럽통신원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는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인 엥겔스로부터 재정적 원조를 받았다. 이 시기 그에게 닥친 고난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는 자식 가운데 5명이 빈곤과 관련된 질병이나 기아로 죽어갔다는 기록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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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 비판>을 간행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여기에 참여해 프루동, 라살, 바쿠닌 등 무정부주의 계열의 이론가들과 논쟁을 벌인다. 1867년 함부르크에서 그동안의 연구를 집대성한 대작 <자본론>의 제1권을 출간한다. (2권과 3권은 그가 죽은 뒤 엥겔스가 각각 1885년과 1894년에 잇따라 출판한다.) 처음에 그가 제4권으로 구상했던 부분은 K. 카우츠키에 의해서 <잉여가치학설사>라는 이름으로 독립된 형태로 출판됐다. 말년에 마르크스는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마지막 몇년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내야 했다. 그 뒤 1881년 아내의 죽음으로, 1883년 장녀의 죽음으로 격심한 충격을 받는다. 결국 그는 1883년 3월 런던 자택에서 엥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6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사회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치이론가이자 역사학자였으며, 무엇보다 혁명가였다. 언론인 생활도 병행했으며, 법률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 제대로 된 수입을 보장해주는 직업을 단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게다가 그는 그토록 경멸했던 자본가 계급에 속한 엥겔스의 도움을 받아 먹고살아야 했다. 그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호소했지만, 그것이 노동조합 운동으로 되는 것은 가차없이 비판했다. 역설적으로 마르크스는 정치적 혁명을 믿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85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거의 정치적인 글을 쓰지 않았다. 누가 정권을 잡았느냐는 그에게 별로 핵심적인 사안이 아니었다. 임노동 관계라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혁명 없이는 모든 변화는 자본주의의 또 다른 변형에 불과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혁명을 지향하는 다른 사상들을 ‘공상적’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 최대의 거대담론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인류 역사의 전체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측면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단순히 계급투쟁에 관한 이론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소유 관계에 따라 각 계급들을 구별하고, 계급들 사이의 갈등을 핵심적인 사항으로 보기는 했다. 하지만 그 투쟁은 계급들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구조로부터 자라나온 필연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이 한 가지에 집중하는 성격을 지닌다.

“사회를 그 뿌리로부터 규정하는 힘은 무엇인가?”

구조주의, 민족사회주의, 네오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요약판인 사적유물론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역사를 진전시킨다’는 명제로 귀결된다. 예컨대 맷돌을 돌리던 시대의 생산관계, 즉 봉건시대의 영주와 농노라는 계급관계로는 증기기관차가 사회의 주요 생산수단이 되는 시대를 감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증기기관차의 시대는 거기에 맞는 새로운 계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계급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같은 전환의 순간을 그는 혁명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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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러시아혁명 이후 소련은 사회주의 종주국이 됐다. 이 소련의 국가철학은 공식적인 마르크스주의로 작동하고, 이런 소련의 주장에서 이탈하는 것에는 ‘수정주의’라는 딱지가 붙었다. 1950년대 후반 중-소 분쟁 때 공산화된 중국이 흐루시초프의 소련을 ‘수정주의 제국’이라고 부를 때까지는 이런 식의 권위가 유지됐다. 유럽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핵심요소인 임금노동과 사적 소유를 인정하면서도 조세나 국가정책을 통해 그 모순을 완화하는 체제를 지향했다. 결국 그 길에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제3세계에서 사회주의의 운명은 더욱 복잡해진다. 각각의 특수성 때문에 주도자의 이름을 따서 ‘모택동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하는가 하면, 동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는 ‘민족사회주의’라는 명칭을 얻은 조류가 힘을 얻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소련의 정통 논리를 거부하고 마르크스의 원전에 충실하려는 유럽과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네오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구조주의자 가운데 좌파적 성향은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로 분화돼갔다.

가장 치명적인 ‘소련 붕괴’ 사태

1968년 유럽에서의 학생운동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동시에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종래의 거대담론들에 대한 폐기 선언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본주의나 계급투쟁과 같은 추상적이고 대규모적인 개념과 이론을 신뢰하지 않게 됐다. 미시적이고 세부적인 것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에 대해 더 많은 연구와 주목이 이루어졌다. 칼 포퍼의 <역사주의의 빈곤>과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바로 이같은 미시이론에 대한 역사철학적 근거로 각광을 받았다.

이런 조류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점차 급격하게 설 자리를 잃어갔다. 승리한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고,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이 시대를 ‘역사의 종말’이라고 표현했다. 더 이상의 새로운 혁명이 없는 시대, 영속하는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치명적인 사태는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전 단계인 현실 사회주의의 국가인 소련이 붕괴한 것이다.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소련은 사실상 관료자본주의였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지만, 이 현실의 실패는 그들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렇게 20세기를 관통했던 혁명의 시대는 상처와 고통 속에서 썰물처럼 밀려갔다.

그 결과 지금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가장 과감한 사람들조차도 공산주의가 그 대안이라고,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됐다. 심판으로서의 세계사라는 19세기의 신념은 빛을 잃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아직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과제이지만 말이다.



마르크스 대 무정부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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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그 유명한 구호로 끝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Working men of all of countries, unite!)
하지만 정작 공산주의 혁명가들에게 단결은 쉽지 않았다. 1864년 결성된 유럽 공산주의자들의 첫 국제적 조직인 제1차 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와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의 불화 끝에 결국 10년 만에 해체돼야 했다. 두 사람은 이런 문제를 놓고 갈라졌다.
‘자생적인 대중봉기인가?’
‘조직화된 혁명인가?’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했던 프루동의 영향을 받은 바쿠닌은 대중들의 자발적인 ‘자유의지’에 기초를 두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공동체를 꿈꿨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는 ‘조직’과 ‘과학’에 중심을 두었다. 나아가 역사를 이끌어가는 힘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구조 속에 내재된 구조, 바꿔 말해 생산관계라고 보았다. 특히 룸펜프롤레타리아를 놓고 두 사람은 격렬하게 대립했다. 바쿠닌이 룸펜프롤레타리아를 변혁의 중심적 주체의 하나로 본 데 반해,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부터 이들을 ‘위험한 계급’이라면서 매우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 사람은 대중중심주의였던 데 반해, 다른 한 사람은 엘리트 지식인의 역할을 지도적인 것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문화적인 취미에서부터 성격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대립하던 두 사람은 결국 인터내셔널을 해산하고 각각의 길을 가기에 이른다.
두 사람 사이의 이론적 대립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고’를 더 조직화하고 대중을 목적의식적으로 지도하는 공산당을 표방한 레닌이 1917년 러시아혁명에 성공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승리로 끝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공산주의자, 또는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연대는 이후 제2차, 제3차 인터내셔널의 결성과 붕괴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시도됐지만, 오히려 더 많은 분화와 갈래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온 + 오프 항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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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생
- <30분에 읽는 마르크스> 질 핸즈/중앙M&B

▶▶ 대학생 이상
- <칼 마르크스, 그의 생애와 사상> 이사야 벌린/미다스북스
<자본론>(시리즈) 마르크스/비봉출판사(메일 첨부 사진)
<마르크스 평전> 프란시스 윈/푸른숲
Marx/W. W Norton&Company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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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h1234@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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