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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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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며] 고난은 인간을 키운다

등록 2005-03-16 15:00 수정 2020-05-02 19:24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연재를 마치며]

요셉에서 간디까지 5천년 인류 역사에 아로새겨진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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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없이 인간은 성공하지 못한다. 골짜기가 깊어야 산은 높아지던가? 지난 15개월 동안 5천년 인류 역사에 아로새겨진 인물들을 되짚어오며 무엇보다 고난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아무리 잘난 인간이라도 고난을 겪고서야 비로소 더 큰 일을 이루게 되는 역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4천년 전 이집트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7년 연속 기근의 대재앙에서 구한 것으로 <구약성서>에 기록된 요셉을 보자. 자신을 시기하는 형제의 손으로 웅덩이에 던져지고… 그 형제의 손에 의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고… 다시 여주인의 유혹을 피하는 올바른 행동을 했는데도 모함을 받아 감옥에까지 갇히고…. 끝내 그를 훨씬 더 성숙시키고 남을 위해 훨씬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무엇이었던가? 아비의 편애였던가? 자신의 잘남이었던가? 아니다. 오직 모든 고난과 억울함을 묵묵히 이겨낸 뒤에야 그는 온 세상을 구원하는 큰 지혜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손빈은 어떤가? 전국시대 병법의 대가 손빈은 스승 귀곡선사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나 손빈은 질투와 시기의 힘, 세상 사악함의 파괴력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문하 출신으로 먼저 위나라에 출사해 대장군에까지 오른 방연의 초빙에 응했다가 그의 간계에 말려버린다. 무릎을 잘리고 돼지우리에 돼지처럼 갇힌다. 이 처참한 지옥도에서 손빈은 자신의 최대 능력인 지혜를 발휘해 제나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13년 뒤 손빈은 제나라 군대의 군사(전략참모)로서 위나라 군대를 공격해 결국 방연을 고슴도치처럼 화살 세례를 받아 죽게 만든다(일부에서는 생포설도 있다). 손빈은 처절한 고난을 겪은 뒤에야 진정한 제1인자가 됐던 것이다.

자신의 목숨까지 던진 여불위

이쯤 되면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고난은 곧 행복이다.’ 역사는 항상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주인공의 목숨마저 요구했다.

전국시대 말기, 조나라에 인질로 온 진나라 왕자에게 전재산을 투자한 여불위는 대성공을 거둔다. 진나라 왕자는 자신의 공작대로 진나라 왕이 됐다. 그뿐인가? 이미 자신의 아들을 잉태한 무희마저 진나라 왕의 비로 들여보내 아들까지 낳는다. 일개 상인에서 전국 통일을 눈앞에 둔 최강대국 진나라의 승상의 자리에 오른 그는 마침내 사실상 자신의 아들(진시황)이 진왕에 즉위하는 감격까지 맛본다. 그러나 그도 결국 출생을 둘러싼 소문을 잠재우려는 진왕의 의지에 따라 몰락으로 내몰린다. 아들인 진왕을 위한 마지막 사랑이었을까? 그는 하나뿐인 목숨마저 던져야 했다. 인질로 온 진나라 왕자에게 투자하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무희를 그 인질왕자에게 들여보내지 않았다면, 진나라의 승상 자리까지 욕심내지 않았더라면, 승상 자리에서 더 일찍 물러나와 낙향생활을 했더라면…. 역사는 필연의 과정을 거쳐 그를 자살로 내몰아가고 있었다.

링컨은 어떤가?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승리하고, 흑인노예도 해방시키고, 저 유명한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민주주의’라는 명연설이 지금껏 회자되는 그는 19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초등학교 1학년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온갖 실패의 경험을 딛고 미국은 물론 세계사의 스타에 올랐다. 그러나 그 완전한 승리와 성공의 순간 암살당한다. 후세에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되지만, 그는 남북전쟁 승리 1주일도 채 안 되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성공을 위한 대가로 바쳐야 했다.

패배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인간을 기쁨으로 채워주는가?

권세에 있지도 않았다. 정복에 있지도 않았다. 세상을 떡 주무르듯 흔들어대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돈에 있지도 않았다. 나라 안팎에서 골라 화려하게 치장한 솔로몬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도 있지 않았다. 고대 세계 최대의 정복자 알렉산더는 넓은 땅덩어리를 정복하고도 자신과 자식의 목숨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채 30대 젊디젊은 나이에 죽어갔고, 탐하는 대로 여인을 취해본 솔로몬도 끝내 탄식해야만 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며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행복은 가까운 곳, 낮은 데 있었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작은 나라 조선의 경상도 지방에 사랑과 사람다운 삶을 심어 300년을 전해온 경주 최부잣집의 마음 같은 것이 곧 행복이었다.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를 섬긴 마더 테레사만이 종교의 차이를 넘어 힌두교도의 진정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참행복의 의미를 세상에 전했다. 바로 이렇게 남을 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몽고 재상 야율초재는 그 학살과 살육의 시대에 죽음을 무릅쓰고 개봉 백성 140만명을 살리는 구명운동을 벌인 것이 아닌가? 행복은 이기심의 굴레를 벗을 때 시작되고, 남과 함께 살아갈 때 그 열매를 맺고 있었다.

슬픔도 힘이다. 놀랍게도 슬픔도 패배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가고 있었다.

고대 로마 검투사의 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는 패배했지만 죽지 않았다. 그에게 군사적 승리를 거둔 크라수스는 성공하려는 자들의 참고인물 정도로 박제화됐지만, 그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2천년 이상 자신의 뜻을 이어나가도록 이끌고 있다. 압제와 착취에 시달리는 모든 세대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된 것이다. 어찌 슬픔이, 패배가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류관순도 이런 슬픔의 힘으로 한민족의 별이 되고, 제갈량도 이룰 수 없었던 천하통일의 슬픔 때문에 민중들의 사랑이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교육에서 승리하기 위한 치열한 각축

그리하여 간디는 이렇게 말한다. “절망할 때가 찾아오면 역사를 통해서 진리와 사랑이 승리한 순간을 기억해내지. 독재자와 살인자는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지만, 결국 늘 몰락하고 말았어. 항상 그걸 생각해보며 힘을 얻지.”

무엇이 가장 의미 있고 오래 지속되는 것일까? 역사는 자신만의 해답을 내놓고 있었다. 신과 문자와 인간 그리고 그것을 종합해서 후대에 이어주는 교육이었다. 놀랍게도 모두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느 인간집단도 이 네 가지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가지고 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황에 따라선 세상의 패권까지 움켜쥘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 이 요소들의 변증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가장 일찍 신의 존재와 가치를 제대로 안 족속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보다 신과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기록해서 전승시킬 수 있는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모세 오경’ 등 유대교의 경전과 탈무드 등 가르침이 자신들의 히브리어 문자로 기록됐다. 문자는 곧 교육체계로 이어진다. 랍비 요한나 벤 자카이는 로마군에게 유대 지역이 점령돼 깡그리 파괴될 때 오직 대학이 있는 유대교 교육도시 야브네만을 살려냈다.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은 인구라는 성장 엔진을 가장 먼저 가동한 족속이기도 하다. 요셉의 시대 이집트로 들어간 이스라엘 12지파 선조 70여명이 불과 수백년 만에 200만명 규모로 확대되고 있다. 부부가 사랑하고 생육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찬양하고 권장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독선적인 교리와 선민의식은 이웃의 반발과 혐오를 불러오고, 이슬람교의 탄압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같은 비극까지 겹쳐 이 인구라는 요소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웃과 함께 사는 마음이 없인 인구라는 성장 엔진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법일까?

중국인은 이 가운데 신을 빼고 문자 교육 인구로 승부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사례다. 대영제국은 쇠락했어도 그들의 언어 문자 영어는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는 패권문자가 돼 있다. 미국은 외형상 여러 민족을 다 받아들여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민족의 용광로, 문화의 용광로 같은 성격으로 발전의 모티브를 잡은 측면도 강하다. 이제 이 모든 주역들은 교육에서 진정한 승리를 이루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달리는 말에 올라 산을 본 느낌이 이런 것일까? 그것도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식의…. 전문가도 전혀 아니면서, 심지어 한번도 그 인물에 대해 읽어보거나 생각해본 적이 없으면서도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다는 하염없는 부끄러움만 남는다. 한번 뭔가 흉내라도 내보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항해가 별다른 성과도 없이 이제 닻을 내린다. 이 부끄러움 속에서도 마지막 글을 쓰는 힘은 단 하나,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들에게 모자란 사람의 한마디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해 크게 외쳐보시라

“앞으로 자네들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어쩔 수 없이 고난이나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될 거야. 선배나 친구의 조언도 좋지만, 깊은 밤 홀로 역사인물을 한번 읽어보시게나. 혼자 있어야 그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나와 대화할 수 있거든. 그리고 사람이 혼자 울어야 진정 슬픔의 힘을 깨닫게 될 때도 있거든. 그리고 가능하다면 언제 산에 올라 바다를 한번 바라보시게. 깊게 심호흡을 하고 한번 크게 외쳐보시게나. ‘바다야, 내가 간다! 세상아, 우리가 간다!!!’”



매력적인 사람들, 아쉬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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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꼭 써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아쉬움을 모아 이름이라도 한번 적어보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이건희 회장이 가장 아쉽다. 어느 의미에서 그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일을 이뤄낸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적어도 그의 영향력이 동시대 가장 많은 인류 구성원에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동시대인이기에 그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종대왕은 한글 때문에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가장 소중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과연 한민족이 한글을 제대로 살려나갈 수 있을지, 그렇게 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시기마다 그는 우리 곁에 다시 살아올 것이다.
문익점을 쓰고 싶었다. 처음 우리 민족에게 목화를 전해준 인물. 그를 통해 우리 민족의 가난한 이들은 덜 춥게 됐다. 제법 사람답게 살게 됐다. 어느 군주가, 정복자가, 영의정이 그보다 훌륭했단 말인가? 그가 비록 중국의 처지에서 보면 산업스파이 격이라 할지라도 나는 당연히 그의 편에 서련다.
기황후. 어느 면에서 보면 참 매력적인 여성이다. 지금껏 우리 민족 가운데 이 여인처럼 세속권력의 최상층부에 가본 이가 있을까? 없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만나볼 만하지 않은가?
외국인 가운데 개인적으로 깊은 흥미를 느낀 사람은 조지프라는 이름의 인디언 추장이다. 로키산맥 북쪽 태평양 연안에 살던 네스 페르세족의 추장인 그는 1870년대 미국 정부가 그자기 부족을 강제로 보호구역에 몰아넣으려 하자 부족원 300여명을 이끌고 탈출한다. 그는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포함된 부족원들을 무섭고 강력한 미국 기병대의 추적 속에서 살려낸 ‘인디언 모세’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놀랍고 눈물겹다.
멕시코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도 교통사고로 온몸이 망가지는 운명을 극복하고 놀라운 예술혼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 분야에 헬렌 켈러, 마더 테레사 같은 여성이 많아 아쉽지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에디슨도 한번 꼭 다루고 싶은 이였다. 너무나 잘 알려졌지만, 발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한번 제시해보고 싶었다. 우리 민족은 물론 인류의 미래 장기 생존에 발명이라는 요소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위해 소중한 지면을 내주신 <한겨레21>과 그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고 글 가운데 잘못된 부분에 대해 지적하시며 가르쳐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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