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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캐나다·브라질] 천도, 통합과 분열의 두 얼굴

등록 2004-12-30 15:00 수정 2020-05-02 19:23

[오귀환의 사기열전 | 역사와 지명으로 본 수도-4]

외세극복 투쟁의 상징이 된 터키의 앙카라, 통합론자들의 현명함이 깃든 오타와

▣ 오귀환/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유럽과 아시아를 호령하던 대제국이 이제는 거꾸로 서방 국가들에게 침략당하는 운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1919년 오스만 터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된 제국으로 외국군이 진주하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강대국의 군대가 이스탄불 등 주요 도시와 항구를 점령한 가운데 광대한 영토에 퍼져 있던 여러 민족도 저마다 제국의 곳곳에 깃발을 꽂고 자기들의 새로운 국가를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오스만 터키와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온 아르메니아인들은 소아시아 동부의 넓은 지역을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오스만 터키에 복속해 있던 그리스는 더욱 강력한 보복정책으로 나왔다. 그리스는 1차 대전 전승국의 지위를 이용해 이번에는 거꾸로 흑해 연안과 소아시아 서부 지역을 그리스에 병합하려 했다. 과거 트로이, 에페소스, 사르디스 등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는 역사적 연고와 함께, 당시까지도 수백만명의 그리스계 주민이 살고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리스는 나아가 과거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리던 오스만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도 당연히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의 지배 아래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만 터키는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곳곳에서 터키인들의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케말 파샤, 터키를 구하다

이 격동의 시대,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터키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점령군의 영향 아래 놓인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와 달리 그는 터키를 제국이 아닌 공화정으로, 다민족국가의 거대국가가 아닌 터키인 중심의 단일민족국가로 재탄생시키려 했다. 그는 정부가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실시한 선거에서 당선됐다. 케말 파샤는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선 이스탄불로 가야 했다. 하지만 술탄 정부와 배치되는 그의 국가 구상과 활동 때문에 체포될 것이 분명했다. 이 위기의 순간, 그는 의회에 참석하는 대신 새로운 의원들이 이스탄불로 가기 전에 자신을 만날 수 있도록 터키의 고도이자 내륙교통의 중심지인 앙고라에 거점을 마련했다. 그러곤 거기서 의원들을 만나 새로운 터키의 미래를 설득했다. 앙고라는 이렇게 해서 터키 건국의 아버지 케말 파샤가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는 민족주의적 구상의 복음지로 승화한다.

케말 파샤가 터키인의 애국적 투쟁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결과 마침내 터키군은 그리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1차 대전 전승국과 벌인 외교적 교섭도 잇따라 결실을 맺는다. 결국 4년 뒤인 1923년 터키의 대국민회의는 케말 파샤의 요청에 따라 이스탄불 대신 앙고라가 새로운 터키 공화국의 수도라고 선언한다. 그 뒤 1930년 새 수도 이름은 유럽화된 지명인 앙고라 대신 터키식 지명인 앙카라로 바뀐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의 천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조국해방투쟁의 연장선에서 이뤄졌다: 외세를 극복하는 투쟁에서 자연스럽게 앙카라가 터키민족주의 운동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한 성격이 강하다. 새로운 공화국 방안이 이스탄불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 주도권을 잡았더라면 상황은 크게 변했을 것이다.

(2) ‘터키인에 의한 터키화’라는 강력한 민족주의를 반영한다: 이스탄불은 이미 오스만 터키 이전에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1100여년 동안 이어져오는 등 사실상 그리스 문명을 계승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강하다. 그리스가 강력한 연고권을 주장하듯이 국제적 논쟁거리의 여지가 많다. 나중에 도시 이름을 터키식으로 다시 바꾼 것도 터키화의 의지를 보여준다.

(3) 터키의 현대화를 지향하는 케말 파샤의 염원이 담겼다: 케말 파샤는 불가리아 소피아 주재 대사관에 근무하는 경험을 통해 유럽의 현대국가와 현대도시가 갖는 강점을 깊이 인식했다. 케말의 현대화 구상을 구현하기에 이스탄불은 그 오랜 역사와 전통 때문에 결정적 제약이 너무 많다. 앙카라는 새로운 현대도시로 개조하기에 더없이 유리했다.

(4)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도 이뤄냈다: 이스탄불은 유럽 지역까지 펼쳐져 있던 대제국 시절 제국의 중심부로서 기능하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소아시아반도 중심의 현대 터키라는 강역에서 보면 완전히 서쪽에 치우쳐 있는 형세다. 앙카라는 그와 달리 새 국가에서 적절하게 중앙부의 위치를 차지한다. 결과적으로 앙카라는 터키의 2대 도시로 새로운 산업 중심지가 되는 등 국토 균형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캐나다, 프랑스계와 영국계의 싸움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도 큰 틀에서는 터키의 앙카라와 비슷하게 ‘구국의 결단’에 따라 수도로 정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캐나다를 구성한 양대 세력인 영국계와 프랑스계의 극심한 질투와 경쟁 때문에 자칫 국가가 분열될 수도 있는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선택된 대안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건국 초기 이 지역은 프랑스계 주민에 의해 먼저 개척됐다. 캐나다 지역을 처음부터 뉴 프랑스라고 부른 것이라든가, 오타와 주변을 흐르는 강 이름이 프랑스식 표현인 가티노(Gatineau)라든가 리도(Rideau)로 된 것만 보아도 쉽사리 알 수 있다. 프랑스계 주민은 퀘벡주를 중심으로 다수민족을 형성한다. 나중에 영국계 주민도 본격적으로 진출해 이웃 온타리오주의 다수민족이 된다. 오타와는 이 지역에 살던 오타와 부족이라는 인디언의 이름에서 따왔다. 처음 이 지역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인들에게 목재를 공급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1812년 미-영 전쟁 당시 이 지역의 하천은 영국군이 미국을 공격하는 루트로 사용되기도 했다.

캐나다가 연방국가로 독립할 것이 확실해지자 새로운 수도 선정을 놓고 프랑스계와 영국계가 불꽃 튀는 경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케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은 당연히 몬트리올이 수도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온타리오의 영국계 주민들은 토론토가 수도가 돼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두 도시는 총력전으로 나섰다. 여기에 다시 프랑스계 도시인 퀘벡시티와 영국계 도시인 킹스턴까지 가세했다. 이처럼 프랑스와 영국의 양대 세력이 맞서자 아일랜드 주민들은 아일랜드 주민대로 자신들의 중심도시인 샬럿타운이 수도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이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연방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경고하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수도 문제로 나라가 분열되는 심각한 사태가 올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수도를 결정하는 문제를 식민지 모국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청원해놓았다는 것이다. 더더욱 다행인 것은 수도를 결정하기 위해 제출한 보고서에 그 어느 도시보다 오타와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빅토리아 여왕의 선택도 오타와로 떨어졌다. 캐나다의 미래를 위한 사람들의 선견지명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캐나다 통합론자들의 현명함은 한번 수도가 결정되자마자 곧바로 의사당 건물의 건립에 들어갔다는 데서도 다시 한번 드러난다. 그렇다고 졸속 공사를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1860년 영국의 왕세자가 참석한 가운데 정초식을 올리고, 미국의 뉴욕과 펜실베이니아에서 나는 화강암석을 철도편으로 실어오기도 했다. 원래 예정했던 공사 기간 10년이 지나서 1867년 캐나다가 통합 캐나다로 건국됐을 때도 완성되지 못했다. 결국 독립 뒤 12년이 더 지나서야 완공됐던 것이다. 어쨌든 수도 선정 뒤 곧바로 이런 대규모 의사당 건설에 곧바로 착수한 결과 수도 선정 이후 계속 불거진 논란을 종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국가적 통합을 상징하는 의사당의 위용 앞에서 다른 도시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줄어들었다.

오타와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1) 국가통합을 위한 대안으로 선택됐다.

(2) 미국과의 잠재적 대립 가능성을 상정해 방어 목적을 계산했다.(다른 경합 도시와 달리 좀더 내륙쪽으로 후퇴해 있다.)

(3) 철저한 계획도시의 성격을 띤다.

(4) 기동성 있는 행정으로 도시건설을 뒷받침했다.

(5) 정치 지도자들의 탁견에서 배울 게 많다.

브라질리아, 통일과 단절의 하모니

브라질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새로운 계획도시 브라질리아로 천도한 가장 큰 이유는 국토의 균형발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브라질리아로의 천도는 1960년 사회민주당 후셀리노 쿠비체크 데 올리베이라 대통령 때에 이뤄졌다. 전통적으로 브라질은 이전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에서 보듯이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해 있었다. 그것도 남부에 집중돼 있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브라질로서는 이런 불균형 상태를 적극적으로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정치적 영토적 통일과, 해안 지역으로 상징되는 유럽 전통과의 단절을 위해 천도가 기획됐다.

브라질의 천도 구상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내륙부에 수도를 둔다는 구상은 1789년 초기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호아킴 호세 다 실바 하비에르에서부터 비롯됐다. 그 뒤 1891년 헌법도 내륙부 새 수도 원칙에 대해 천명하기에 이른다. 브라질리아를 새로운 수도 후보로 선정하기 전 약 8년 동안 내륙부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실험이 실행됐다. 1960년 쿠비체크 대통령은 새로운 투자의 활성화와, 국내 시장의 확대와 통합을 목적으로 천도를 본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과다한 투자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브라질에 대한 금융이 막히게 된다. 결국 브라질 쿠비체크의 밀어붙이기식 팽창정책은 위기를 맞게 된다. 현실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천도였지만, 뭔가 “2%가 부족했다”고나 할까? 수도는 잘못 건드리면 덧나는 존재일 수도 있다.



서울-평양 병립, 두가지 미래



우리 역사에서 천도는 대략 여섯 차례 이뤄졌다. 우선 고구려 때 두 차례, 백제 때 두 차례 경험한다.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한번, 다시 평양으로 한번 천도했다. 두 차례 모두 국가정책 방향의 전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내성으로의 천도는 국방 강화와 국력 팽창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평양성으로의 천도는 남하정책을 통한 한반도의 통일 의지로 읽힌다. 백제의 천도 역시 고구려와 비슷하다. 하남 위례산성에서 웅진(공주)으로의 천도는 개로왕 등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퇴하면서 야기된 국방상의 이유로 추정되고, 다시 부여 사비성으로의 천도는 새로운 국가 발전의 전기를 붙잡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고려의 개경(개성)은 ‘신왕조 창건 천도’의 특징을 지닌다. 개경은 예성강 하구 벽란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무역을 바탕으로 발달한 도시다. 따라서 개경의 정도는 경제적 요인을 대단히 중요시한 천도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개경이 왕조 창건 세력인 왕씨의 본거지였다는 점에서 ‘근거지 이동형’이다. 명나라 초기 영락제가 전임 황제의 근거지인 남경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천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선시대 개경에서 한양(서울)으로 천도한 것도 신왕조 창건 천도의 성격이다. 기술적으로는 개경의 전진도시인 벽란도가 토사 축적으로 하상이 높아져 항구 기능을 상실하면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조의 개방형 교역경제에서 조선조의 현실안주형 농업경제로의 후퇴를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다. 고려조는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정화함대로 상징되는 중국의 해양강국 시대와 맥을 같이하면서 해양교역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이와 달리 조선조는 해양과 거리를 두는 쇄국형의 성격이 더 강했다.
한편 남북 분단에 따른 서울-평양 양대 수도의 병립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 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는 독일 베를린의 예에서 보듯, 통일 뒤 한 도시(서울)로 강제 합병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병립경합형 도시들처럼 제3의 대안을 모색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파주 교하가 유력한 지역이라는 견해도 있다.




[온 + 오프 항해지도]



▶ 중고생
- 프랭크 타차우/대현출판사
최희일/가람기획

▶▶ 대학생 이상
- 우덕룡 등/송산출판사
김영상/대학당
www.britannica.com=ankara/ottawa/brasilia/canber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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