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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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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기 전에, ‘기업살인법’을 허하라

현행법엔 형사처벌 근거 없어 ‘살인 기업’ 무사안일
영국처럼 법적 책임 묻고 무제한 벌금 부과해야
등록 2014-05-08 14:45 수정 2020-05-03 04:27
씨네그루(주) 다우기술

씨네그루(주) 다우기술

#1. 1987년 벨기에 앞바다. 승객과 선원 450여 명이 탄 1만3천t급 배가 침몰했다. 영국 해운회사 소유의 ‘헤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였다. 선원의 실수로 차량을 싣는 문을 제대로 닫지 않고 출항했다가 차가운 바닷물이 순식간에 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193명이 숨진 대형 선박 사고였다. 산업안전보건법상 경영진이나 관리자의 동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의 경우엔 회사에도 범죄 책임이 있다고 돼 있었지만, 법원은 판례법상 관리 소홀 책임자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기업과실치사(기업살인)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선원 개인만 형사처벌됐다.

#2. 1993년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 승객과 선원 362명이 탄 110t급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했다. 탑승 정원(221명)보다 훨씬 많은 승객과 화물을 잔뜩 싣고서, 돌풍이 부는 날씨에 무리한 출항을 감행한 게 원인이었다. 292명이 숨졌다. 대부분은 인근 섬 주민이었다. 선장을 비롯한 선원 7명도 숨졌기 때문에 사고 책임자를 형사처벌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선박 검사를 소홀히 한 책임(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을 물어 회사 경영진과 해운항만청 소속 공무원이 기소됐지만, 집행유예형을 받고 풀려났다.

유병언 전 회장 일가 향해 저인망식 수사

언뜻 비슷해 보이는 두 장면이다. 그 뒤 20여 년의 시간도 비슷하게 흘러갔다. 1987년 이후 영국에서는 철도 신호등이 빨간불인데도 달리다가 빈 화물차량과 충돌하고, 선로에 이상이 있어 열차가 탈선해 승객들이 숨지는 등의 인재(人災)가 잇따랐다. 1993년 이후 한국에서도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 등 대형 참사로 수백 명이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20년 동안 뭘 배웠는지는 두 나라가 서로 달랐다. 영국에선 1987년 선박 사고 이후 산업재해를 포함한 대형 사고에 대한 기업과 사업주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2007년 ‘기업과실치사 및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 2007)이 제정됐다. 기업이 노동자나 공공에 대한 안전 조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일어난 사고에 대해서, 기업한테도 범죄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망 사고를 일으킨 기업한테는 상한선이 없는 ‘무제한 벌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됐다. 실제 몇백만파운드의 벌금 폭탄을 맞는 기업들이 나타났다. 안전 관리를 잘못했다가는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확실히 던진 셈이다.


대중의 분노가 들끓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정부와 검찰은 ‘엄벌’을 강조한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검찰은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 적용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남영호 침몰·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처럼 ‘부작위 살인’ 칼만 뺐다가 도로 칼집에 넣진 않을는지….


서해훼리호 사고로부터 21년이 지난 한국.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고 3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왔다. 어처구니없는 참사였다는 점에서 서해훼리호와 세월호는 판박이다. 검찰은 발빠르게 고강도 수사에 들어갔다. 승객을 구조하지 않고 배에서 제일 먼저 탈출한 선장과 선박직 승무원 15명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검찰은 ‘분노의 돌’을 맞을 대상을 점차 확대해나간다. 1등 항해사 강아무개씨가 “평소 ‘배가 가라앉을 수 있으니 화물을 그만 실으라’고 회사 직원에게 말했지만 무시당했다”고 진술했다거나, 사고 직후 회사 쪽이 과적 사실을 감추려고 화물 적재량 기록을 조작한 정황이 확보됐다는 등의 피의 사실이 검찰 입을 통해 솔솔 흘러나왔다. 김한식 대표이사를 비롯한 청해진해운 경영진 구속 여론을 만들기 위해 검찰이 던지는 ‘밑밥’이다.

사고 책임을 직접적으로 묻기 어려운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일가에 대해서는 저인망식 별건 수사로 포위에 들어갔다. 배임과 횡령, 탈세 등 유 전 회장 일가와 계열사가 저지른 모든 범죄를 밝혀내, 개미 한 마리까지도 처벌하겠다는 분위기다. ‘세월호’ 이름을 지어준 대가로 매년 수수료를 챙겨가고, 고문료를 지급받는 방식으로 유 전 회장 등이 청해진해운을 비롯한 계열사의 돈을 착복한 정황도 속속 드러났다. 해운사에 보험금을 지급하는 과정에서 뒷돈을 받아 챙긴 혐의(배임수재)로 한국해운조합 사업본부장이 구속된 것을 비롯해, 검찰의 칼끝은 세월호 선박 개조업체, 구명장비 정비업체, 한국선급, 한국해운조합 등 사방으로 향한다.

안전관리 소홀 등에 3천만원 이하 벌금뿐

익숙한 풍경이다. 대중의 분노가 들끓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정부와 검찰은 항상 ‘엄벌’을 강조한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해 검찰은 ‘부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 적용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선장과 선원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사망을 불러온 죄’를 묻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1970년 남영호 침몰 사고 때 법원은 “선장이 죽음을 무릅쓰고 과적 운항을 했을 리가 없다”며 부작위 살인 혐의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검찰은 이준 삼풍건설산업 회장 등 경영진이 붕괴 위험을 미리 인식했다는 점을 입증하기 쉽지 않아 ‘부작위 살인’ 칼만 뺐다가 도로 칼집에 넣은 바 있다. 전형적인 ‘형벌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다. 겉으로만 엄벌을 강조하면서, 대중의 분노가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실제로 과거 대형 사고만 돌이켜봐도, 수사 당시 분위기와 재판 결과에는 온도차가 있다. 502명이 숨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등을 적용받아 구속 기소된 이준 회장이 항소심 재판에서 최종 확정된 형량은 징역 7년6개월이었다. 법정 최고형이 5년에 불과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다가, 다른 몇 가지 혐의를 끌어붙인다고 해도 애초에 적용하려던 살인죄만큼의 엄벌은 불가능한 구조였다. 유치원생 19명을 비롯해 23명이 숨진 1999년 경기도 화성 씨랜드 수련원 화재 사고의 경우에도, 수련원 대표 박아무개씨는 징역 1년형을 받은 데 그쳤다. 박씨는 몇 년 뒤 다시 수련원을 버젓이 운영하기도 했다. 지난해 학생 7명의 목숨을 앗아간 충남 태안 해병대 사설 캠프 사건에서도 캠프 운영업체 대표 금고 1년, 유스호스텔 대표 징역 6개월이 고작이었다. 2012년 악천후에 무리한 공사 강행으로 인해 선박이 뒤집혀 노동자 14명이 숨진 울산 석정호 콘크리트 운반선 사고도, 당시 안전관리를 책임졌던 직원 1명이 징역형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관련자들은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무리한 용도 변경과 선박 운항, 안전관리 소홀 등은 모두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업의 탐욕 때문이었지만 기업 자체를 처벌할 근거는 없었다. 이 가운데 몇몇 회사만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벌금을 냈을 뿐이다. 그마저도 벌금 액수가 3천만원을 넘지 않았다.

엄벌이 모든 걸 덮을 수는 없다. 법으로 정해진 형량을 높인다고 해서 결코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개인만 처벌되고 나서 몇 년 뒤에 살펴보면 사고의 근본적 원인인 사회 구조나 시스템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 탓이다.

“물론 검찰 수사가 사고 원인 등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수사기관의 목적은 개인을 형사처벌하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 해법을 찾는 역할이 아니다. 범국가 차원에서 별도의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려야 하는 이유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법학)가 제안하는 대안은 이렇다. “선장 등 몇 사람만 중형으로 처벌하기보다는 안전관리에 관련된 사람 모두를 광범위하게 처벌하는 게 ‘범죄 억제 효과’가 더 크다. ‘안전규칙은 조금만 어겨도 모두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공동 책임 의식을 심어주는 거다. 또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영국의 기업살인법이나 미국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처럼, 회사가 안전관리를 못하면 망한다는 위협을 줄 만한 제도가 필요하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도 또 하나의 대안

일본에서도 최근 대형 사고를 저지른 기업에 형사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럴 만한 계기가 있었다. 2005년 JR후쿠치야마선 열차가 탈선해 107명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열차 운행이 지연되자 기관사가 곡선 구간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은 탓이다. JR 전 사장 등 회사 경영진들이 과실치사 혐의 등으로 기소됐지만 2012년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일본 형법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아닌 법인(회사)을 처벌할 수 없게 돼 있는데다, 크고 복잡한 회사 조직일수록 사고의 직접 책임자가 누군지를 가려내 인과관계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영국의 ‘기업살인법’과 비슷한 ‘조직벌’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며 지난 4월 연구회를 발족했다. 캐나다에서도 1992년 광산 폭발로 노동자 26명이 숨진 사고를 계기로, 산업재해 사망 사고에 대해 기업과 경영진에게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노동계가 ‘기업살인죄’ 도입을 주장해왔다. 대형 조선업체들의 하청노동자 사망 사고, 삼성전자 불산 누출 사고, 여수산업단지 폭발 사고 등이 잇따르고 있는데도 대기업들은 원청이라는 이유로 빠져나가거나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있어서다. 이상윤 노동건강연대 정책국장은 “기업살인죄는 기업이 노동자와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다. 기업의 총체적인 시스템 실패에 의한 사고를 지금까지는 형법으로 처벌할 수 없었다. 개인만 처벌됐고, 회사나 회사 대표는 산업안전보건법상 경미한 벌금을 받으면 끝났다. 이를 범죄로 처벌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노동자 산재 사망 사고 발생시 벌금형 없이 3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산재사망 가중처벌법’을, 김선동 통합진보당 의원은 노동자의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범죄를 저지른 기업은 피해 노동자에게 사고로 인한 손해의 3배 이상을 배상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담은 ‘기업살인법’을 발의한 바 있다.

강문대 변호사는 “현재의 산재 관련법은 오히려 위험을 감내하도록 하는 구조다. 회사 대표나 고위 임원은 기소 대상이 아니거나 벌금만 내면 된다. 한국은 강력한 형사처벌만을 강조하지만, 영국은 ‘위험을 야기하는 회사한테는 수익을 안겨주지 않겠다’며 강한 벌금을 매겨 진작부터 조심하는 체제를 만든 게 다르다”고 지적했다. 기업살인법 도입뿐 아니라 민법상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역시 대안이 될 수 있다. 박주민 변호사는 “기업살인법의 경우 피해자들이 제3자가 돼버리는 한계가 있다. 피해자들은 가해자 처벌뿐 아니라 진상 규명 절차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 기업이나 국가를 상대로 한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따라 피해자가 소송 당사자로 참여해 증거 조사 등에 직접 관여하면 진실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걸로 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세월호 곳곳 숨어 있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4월16일 이후,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4명(4월22일 화재사고 2명·25일 추락사 1명·29일 추락사 1명)의 하청노동자가 숨졌다. 지난 3월부터 50일 새 현대중공업그룹 작업장에서 사고로 숨진 하청노동자만 8명에 이른다. 지난해 한국에서 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 수는 1929명. 하루 5.28명꼴이다. “영국의 기업살인법은 사업주들이 안전 의무를 다하지 않아 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숨졌을 때 이를 ‘진정한 범죄’로 인식하게 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사람이 죽은 것과 회사의 책임 사이에 인과관계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징벌적인 성격이 강하다. 현행 한국법으로는 개인이 아닌 기업을 형사처벌할 근거가 없다.” 심재진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만약 영국식 기업살인법이 한국에 있었더라면, 안전관리 소홀로 수백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청해진해운에 대한 형사처벌 근거가 좀더 명확해졌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살인 기업’은 청해진해운만이 아니다. 또 다른 세월호가 우리 주변 곳곳에 숨어 있다. 개인에 대한 엄벌로만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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