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성매매 보고서

대한민국 정부가 포주였다

성매매 단속하는 척하며 여성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여겼던 한국 정부… 한국전쟁 때 위안소 설치하고, 독재정권은 주한미군·일본인 대상 성매매 조장해

제887호
2011.11.22
등록 : 2011-11-22 10:38 수정 : 2011-12-09 13:45

대한민국에서 성매매는 불법이지만 불법이 아니다. 홍등가의 한편에 파출소가 공존하는 기괴한 풍경은 우리나라에서 새삼스럽지 않다. 이런 괴리는 왜 생긴 것일까?

답을 하려면 먼저 국가의 이중적 성매매 정책을 볼 필요가 있다. 박정미 한양대 HK연구교수(사회학)가 올해 쓴 논문 ‘한국 성매매 정책에 관한 연구’는 성매매에 대한 국가의 의도된 침묵과 통제 과정을 파헤쳤다. 400쪽이 넘는 두툼한 논문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성매매에 한 손으로는 불법화의 낙인을 찍으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는 방임을 하거나 때론 적극적으로 ‘포주’ 노릇까지 떠안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유엔군 위한 위안소 운영

성매매를 둘러싼 국가의 이중적 태도는 1946년 미군정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제국주의를 밀어낸 미군정은 앞선 식민통치와의 차별성을 부각할 필요가 있었다. 1946년 5월17일에 선포된 ‘부녀자 매매 또는 기 매매계약의 금지령’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공창제를 유지하던 일제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 조처로 보였다. 신생 국가의 신민들은 이를 환영했다. 1946년 5월28일치 <동아일보>는 “조선이 해방되었으니… 유곽의 여성들이 해방되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경향신문> 기사
정작 미군정의 의도는 달랐다. 러취 군정 장관은 “(금지령이) 공창의 폐지는 아닌 것은 물론 사창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기 자신이 자진해서 맺은 계약 아래에서 종사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밝혔다. 즉 개인이 타의에 의해 성매매를 하게 되는 것은 불법이지만,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다면 공창이든 사창이든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미군은 오히려 일본강점기 때부터 유지돼온 접객여성 대상 등록·검진 관련 규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미군정의 관심은 한국의 성매매 여성과 접촉한 미군들 사이에서 퍼질 수 있는 성병을 통제하는 데 한정됐다.

공창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쪽은 신생 국가의 입법부였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7년 8월 ‘공창제 등 폐지령’을 통과시켰다.

1960~80년대 기생관광은 한국의 수치이자 돈줄이었다. 1970년대 외국인 관광 접대 여성을 대상으로 등록증(가운데)을 발급해 인권침해 시비가 일기도 했다. 1980년대 기생관광을 반대하는 시위(위)가 벌어진 한편, 정부는 미국 잡지 기자의 기생관광 업소 취재(아래)에 협조했다. <동아일보> 기사
‘성매매 금지주의’를 법으로 천명한 첫 번째 사례였다. 그렇지만 법의 힘은 미미했다. 1948년 1월 <경향신문>은 “예산은 전무 상태이고, 중앙청에 대하여 국고 보조를 요청했으나 이것이 가망성이 없어 그저 한탄만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쟁을 거치며 국가는 스스로 법을 깼다. 정부의 1956년 자료를 보면, 육군본부는 서울과 강릉 등 4곳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 자료에서 확인된 ‘위안부’ 수는 79명이었다. 1952년 이 여성들을 찾은 남성은 연인원이 20만4560명이었다. 육군본부는 “(사병들이)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채명신 장군도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에서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 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했다”고 썼다.

정부는 국군뿐 아니라, 유엔 연합군을 위한 ‘위안소’도 운영했다. <부산일보> 1950년 9월 기사를 보면, 마산시가 “수일 내로 시내에다 연합군의 노고에 보답하는 연합군 ‘위안소’ 5개소를 신·구 마산에 설치하기로 되어 이의 허가증을 이미 발부했다”. 당시 정부 보건부 방역국에서 내놓은 ‘청소 및 접객영업 위생사무 취급요령’ 자료에서도 연합군 위안소와 위안부에 대한 지시사항을 담고 있다. 정부가 성매매를 알선한 ‘포주’ 노릇을 맡았다고 증언하는 문서는 서글프게도, 차고 넘쳤다.

미군을 대신한 일본인 ‘기생관광’

1960년대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혁명공약’에서 성매매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공언했다. 1961년에 제정된 ‘윤락행위 등 방지법’은 새 정권의 의지를 드러냈다. 21개 조로 이뤄진 윤락행위방지법은 국가의 성매매 금지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보건사회부는 전국 104개소에 성매매를 허용하는 ‘특정 지역’을 설치하고, 그 가운데 9개소를 서울에 할당했다고 발표했다. 한 입에서 두 말은 쉽게 나왔다.

국가는 왜 성매매 금지 원칙을 지키지 못했을까? 1961년 교통부 기획조정관실이 내놓은 공문을 보면 답이 있다. 공문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용이하게 유치할 수 있는 관광객은 주한 유엔군”이라며 “외국인 상대 접대부”를 대상으로 교양강습을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 미군 병사들은 주로 일본이나 홍콩으로 휴가를 떠났다. 1961년 3월13일 <동아일보>는 “우리나라에 보다 많은 외화를 떨어뜨리게 한다는 견지에서는 모든 소모품을 국산으로 충당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술도 외국 술이요, 벌거벗은 아가씨도 외국 아가씨, 게다가 외국돈까지 쓰니…”라고 개탄했다. 국가의 선결 과제는 ‘벌거벗은 아가씨’를 ‘국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1962년 4월25일치 <서울신문>은 서울시경이 “4천 명에 달하는 관광접객업소(댄스홀·카바레 등)의 서비스 걸들에 대한 접객업무 교육을 실시”했다며 그 이유가 “외국인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1966년 <신동아>의 기사는 차라리 솔직했다. “양공주들이 갖는 거대한 힘이 있다. 음지에 피어 있는 이들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 국가정책의 지상 과업이 되다시피 한 외화 획득의 한 역군이 되고 있다.” <신동아>는 당시 전국 190개소의 유엔군 전용 홀에서 나오는 외화가 1년에 1천만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1966년 당시 우리나라가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외화는 2억5천만달러였다.

1970~71년 주한미군의 규모가 1만8천 명 줄었다. 정부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1971년 8월 내무장관이 각 경찰에 보낸 공문에서 “보건 당국과 협조하여 위안부의 성병 예방책을 강구하고… 교양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떠나는 미군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군의 빈자리는 ‘기생관광’을 하러 온 일본인이 채웠다. 1965년 한-일 수교가 계기였다. 기생관광이 절정에 이르던 1977년 한국을 찾은 일본인의 96.8%는 남성이었다. 경제성장에 몰두한 정부는 관광수입과 관광객 목표치를 제시했다. 일선 여행 알선 업체에도 ‘할당량’이 떨어졌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각종 혜택이 사라지거나, 심한 경우 허가가 취소됐다. 1979년 <신동아>는 “탈선관광이 극히 당연하게 당국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다. …기생파티는 거의 모든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베풀어졌다”고 보도했다. 물론 정부도 계속 한몫했다. 1972년 서울시의 자료를 보면, 기지촌 접객업소 여성 512명, 관광요정 접객업소 여성 1795명을 대상으로 교육한 기록이 남아 있다.

국가의 선결 과제는 ‘벌거벗은 아가씨’를 ‘국산’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서울신문> 1962년 4월25일치에는 서울시경이 “4천 명에 달하는 관광접객업소(댄스홀·카바레 등)의 서비스 걸들에 대한 접객 업무 교육을 실시”했다며 그 이유가 “외국인들에게 보다 효과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오늘도 여전한 국가의 원죄

1980년대 국내 경제가 성장하면서 내국인 성매매 ‘고객’의 비중은 늘었다. 1982년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고, 1984년 사치성 유흥업소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성매매 업소가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은 더욱 비옥해졌다. 미국 스포츠 주간지 <더 스포팅 뉴스>는 1985년 10월 서울 올림픽 특별호에서 한국 음식을 소개하며 한 호텔 식당에서 벌어진 ‘기생파티’ 사진을 실었다. 당시 취재 과정에서 정부가 편의를 제공한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 기생관광을 통해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정책’은 당시까지도 유지됐던 셈이다.

사실상 구호에 그쳤던 정부의 성매매 금지 정책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조금씩 효력을 발휘했다. 1996년 ‘윤락방지법’과 2004년 ‘성매매금지법’은 주요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여전히 성매매라는 탈법은 ‘관행’이라는 마스크를 쓰고 2010년대 대한민국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국가가 스스로 저질러온 ‘원죄’가 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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