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인권위원회 10인의 위원이 말하는 “왜 다시 인권인가”
10인의 인권위원을 소개한다. 인사말을 대신해 ‘왜 여전히 인권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받았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
어린 시절 꿈은 ‘태평양을 항해하는 바다 사나이’였다. 사고를 당하기 전인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는 대한민국 평균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몸과 정신을 가진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장애라는 벽은 내 삶 전체를 옥죄어왔고 너무나 무서웠다. 그렇게 나와 사회 사이에 단절의 역사가 만들어졌고, 지금도 수많은 장애인들이 비슷한 삶을 경험하고 있다. ‘차이’가 ‘차별’이 되는 세상은 이제 그만 ‘차’버리고 평등한 소통과 연대가 이뤄지는 세상을 함께 만들지 않겠는가? 차차차!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인권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저 기준이고 조건이다. 그 기준을 인류가 합의해 제시하고 있는 게 세계인권선언이고 국제인권조약들이다.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은 이 최저 기준을 만족하고 있는가. 아니다. 민주화로 이룬 자유도 다시 후퇴하고 있고, 경제·사회·문화적 평등은 철저히 부정되고 있다. 야만 사회로 내리달아가는 현실이기에 인권을 오히려 더욱 소리 높여 외쳐야 하는지도 모른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약자들의 연대를 통해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일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한국 사회는 후졌다. 절반이 넘는 국회의원은 태극기를 배경으로 ‘이씨’나 ‘박씨’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배지를 달았다. 국민은 때 아닌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에 ‘올인’하느라 정작 일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치료받을 권리, 심지어 좋은 먹거리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있다. 화려한 마천루 숲 사이에서 억압은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있다. 그 억압은 어린이, 가난한 이,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고 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절망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 그래서 여전히 인권은 희망이다.
아리옹(이신애)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생·몽골 출신 국제결혼 이주여성
사회에서 ‘다르다’는 것은 ‘차별’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생김새가 ‘다른’ 가난한 나라 출신은 차별의 당사자가 되기 쉽다. 하지만 인간은 인권침해를 당하면 분노를 표출하게 되고 결국 사회 질서까지 위협하게 된다. 악순환이다. 한 외국인이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가는 지원이 고와야 초래될 일도 곱다”고 농담하는 것을 들었다. 현실적인 이야기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영화 에서 주인공 실베스터 스탤론이 혼잣말로 욕설을 하자마자 벌금 통지서가 부과된다. 거리 곳곳에 폐쇄회로TV가 설치되고, 휴대전화 위치추적이 가능해지며, 지문과 유전자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는 ‘디스토피아’는 오늘날 우리 사회와 얼마나 다른가? 정보인권을 지키는 것이 단지 유출로 인한 금전적·신체적 피해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정보사회에서 우리가 인간의 ‘자율성’을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국가인권위원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인권이라는 단어는 희망과 동의어였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하루의 삶이 어려운데 사치스럽게 무슨 인권 타령이냐는 말이 떠돈다.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왜 다수자에게 부담을 주는 시끄러운 일을 하느냐는 냉소와 면박이 떨어진다. 이 낭패스러운 상황 변화는 단지 대중의 이기심과 무지함 때문일까? 진보운동 또는 인권운동의 부족함은 없을까? 어떻게 해야 인권이 대중의 삶 속에 펄떡거리면서 사회의 핵심적 운영원리로 자리잡까? 함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최예륜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날로 치솟는 물가 상승률은 가난한 이들에게 그야말로 절망의 나락을 의미한다. 이명박 정부는 물가를 잡겠다며 기업의 생산원가 절감과 농산물 시장 완전 개방을 강조한다. 그러나 ‘생산비 절감’을 위해 노동자들은 임금이 꽁꽁 묶이고 비정규직으로 일해야만 하며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농민들의 절망은 깊어만 간다. ‘인권’은 누구의 입장에 서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를 둘러싼 변화가 수많은 개인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낱낱이 파헤치는 폭로이자 감춰진 삶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인간다운 삶의 권리 말하기는 가난한 이들의 현실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한지혜(난다) 탈학교 청소년·성남지역청소년인권모임 인지인(인권을 지키는 사람들) 활동가
거창한 인권이 문제라기보다 일상에서 그냥 아무것도 아닌 듯 지나치게 되는 우리의 권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만 19살 미만은 왜 미성숙한가? 그들은 왜 통제받아야 하는가? 우리 사회 청소년들은 왜 하늘나라(SKY)에 가기 위해 10대 시절을 다 흘려보내는가? 왜왜왜??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해볼 여유도 없이 우리 사회가 이미 그렇게 돌아가게끔 제도화돼 있다.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낯설게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 인권이 진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겠다.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
이젠 재테크가 아니라 ‘억테크’란다. ‘억’이 기본 단위는 되어야 한다는 것 같아 헛웃음이 났다. 인권도 ‘5년마다 복리로 불려드립니다’라든지 ‘최고 수익률을 거두는 인권펀드’ 식으로 광고를 해야 사람들이 겨우 관심을 가져줄지 모르겠다. 돈이 너무나도 쉽게 인권을 짓누르고 굴러가버리는 현실에서 ‘인권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권리’라고 외칠 수는 없다. 누군가 ‘나를’ 침해하지만 않으면 ‘나는’ 온전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착각한다. ‘2MB 시대’에 인권이 돈보다 희귀해져버릴까 두렵다. 필사적인 ‘인권테크’가 필요하다.
황필규 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
인권은 사람의 권리다. 문제는 항상 사람을 사람으로, 권리를 권리로 보지 못할 때 발생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원래 약하고 소수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님에도 사회적으로 그들의 취약성이 구성된다. 인권을 생각하는 이들조차도 인권을 ‘사안’으로 접근하고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불가피하게 권리가 타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어차피 끝이 없는 인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타협인 세상. ‘힘’ 있는 이들에 맞서 스스로의 고정관념을 딛고, 국경을 넘어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기획연재- 인권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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