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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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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두와 제너, 그리고 지석영

등록 2004-02-18 15:00 수정 2020-05-02 19:23

몇년 전까지만 해도 비디오테이프의 첫 부분에선 이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환, 마마보다도 더 무서운 음란물 테이프….” 얼마나 천연두가 끔찍했으면 청소년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음란물 경고문구에까지 등장시켰을까? 요즘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지만 천연두는 인류에게 그만큼 끔찍한 재앙이었다.

치사율 30%에, 심각한 곰보 자국을 얼굴에 남기는 천연두의 재앙을 막기 위해 인류는 온갖 경험과 지혜를 짜냈다. 심지어 천연두 환자의 고름을 정상인의 몸에 주입하는 방법도 있었다. 인도에서부터 유래한 전통예방법인 ‘인두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천연두에 감염되는 경우가 많은 등 부작용이 심했다. 어쨌든 이 방법은 초보적인 면역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천연두 백신의 개발자로 과학사에 이름을 남긴 에드워드 제너의 업적은 이 인두법을 우두법으로 바꾼 데 있다. 시골 의사였던 제너는 천연두에 걸린 소에게 감염된 적이 있는 농부들은 인간천연두에는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천연두에 걸린 소에게서 고름을 짜내 인공적으로 사람의 몸에 주입했다. 동물실험조차 거치지 않은 생체실험이었다. 다행히 피시술자는 성공적으로 천연두에 면역기능을 갖게 되었다. 소천연두균은 인간천연두균보다 독성이 약해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항체를 생성해주었기 때문이다.

제너의 시대에 면역이나 항체와 같은 개념은 물론 존재하지 않았고, 천연두가 세균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은 더더욱 알려지지 않았다. 제너 자신도 그런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그는 경험해서 아는 일들을 과학적으로 재구성한 것뿐이다. 천연두 백신의 개발로 그는 한순간에 부와 명예를 얻었다. 국왕으로부터 직접 여러 차례의 하사금을 받았고, 자신의 발명품을 팔아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 제너의 가장 큰 반대자들은 인두법의 시술로 돈을 벌던 의사들이었다.

한국에는 1882년 지석영이 처음으로 우두법을 들여왔다. 개화파로서 서구 의학을 국내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데 앞장섰던 그는 일본에서 우두를 들여왔다. 맨 처음 자신의 2살 난 처남에게 시술해 이 땅에 첫 번째 종두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수구척사파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갑신정변 때 지석영의 종두학교는 성난 군중에 의해 불타버렸고, 그는 도피해야만 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영결식에서 영결사를 읽은 것으로 전해지는 친일 행적 때문에, 지석영은 지난해 고향인 부산시가 선정하는 ‘부산을 빛낸 21인’의 명단에서 빠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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