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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OTL] 장애인에게 ‘퇴소 협박’하는 복지시설?

등록 2008-06-12 15:00 수정 2020-05-02 19:25

시설 내 비리와 인권침해를 폭로한 생활인들을 ‘퇴소 조처’로 압박하는 석암재단

▣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인권 OTL-30개의 시선 ⑦]

“20년 만에 만난 딸에게 부담을 줄 순 없지 않습니까?”

얼마 전 이민수(59·가명)씨가 ‘석암재단 생활인 인권쟁취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탈퇴했다. 5월21일 경기 김포시 석암베데스다요양원 앞마당 게시판에 ‘이사회 결정사항’이 붙은 직후였다. “거주 장애인들이 단체 탈퇴·농성 중단을 하지 않으면 퇴소 조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재단 쪽이 이씨의 딸에게 ‘아빠 문제’로 전화를 했고, 늘 씩씩하던 그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20년 만에 연락된 딸에게 “아빠 데려가라”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둔 회사원이던 이씨가 사고를 당한 것은 1987년. 가족들과 유원지에 놀러갔다가 물놀이 중에 사고를 당했다. 수심이 얕은 곳에서 다이빙을 했다가 목뼈가 부러졌다. 응급처치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그렇게 장애인이 됐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그에게 친척들이 “애들 엄마 더 나이 들기 전에 빨리 이혼해줘라”고 조언했다. 병원비도 계속 들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져만 갔다.

결국 아내가 집에 없을 때 짐을 싸서 나왔다. 놀라서 우는 딸아이에게 “아버지 병원 갔다가 꽃 피면 온다”고 말했다. 이듬해 이혼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한 복지시설에 들어갔다. 군대식 생활이었다. 아침 6시 예배, 밤 9시 완전 소등. 꽂고 있던 소변 호스는 오염이 돼서 온몸에 세균이 침투해 끙끙 앓았다. 그 소식을 들은 형이 그를 400만원 주고 석암재단 산하 요양원으로 옮겼다. 1989년 12월이었다.

지난해 5월, 그는 대학생이 된 딸들을 만나게 됐다. 아내는 재혼을 했고 새 아빠가 잘해준다고 했다. 그렇게 행복만을 기원해주고 싶었는데, 재단 쪽이 난데없이 딸에게 “아빠를 데려가라”고 연락했다. 그는 열심히 활동하던 비대위를 떠나기로 했다. 그가 재단 비리를 알리는 활동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을 때, 속사정을 아는 동료들은 그를 잡지 못했다.

사회복지시설 운영 과정의 비리 혐의로 전·현직 이사장들이 유죄 선고를 받은 석암재단이 시설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의 권리찾기 움직임을 여전히 방해하고 있어 또 물의를 빚고 있다.

6개의 사회복지시설을 운영 중인 석암재단의 이사장 일가는 최근 법원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5월22일 석암재단 이부일 전 이사장에게 징역 3년을, 제복만 현 이사장(이 전 이사장의 사위)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80시간을, 홍정환 시설장(이 전 이사장의 처남)과 김성숙 전 시설장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80시간을 선고했다.

서울시 특별감사를 통해 석암재단의 비리와 인권침해가 세상에 공개된 지 1년, 시설 장애인들이 비대위를 만들어 재단 비리를 폭로하러 거리에 나선 지 6개월여 만이었다. 죄목은 자금 횡령, 국가보조금 전용, 사기 등이다. 몇 글자 안 되는 범죄 사실 속에는 수많은 장애인들의 한스러운 세월이 담겨 있다. 그동안 비대위 회원들은 거리에 나서 자신들이 당해온 인권침해를 알려왔다.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고 약을 먹이고 묶어놓고, 썩은 김치를 씻어서 형편없는 밥을 주고, 외출을 허락하지 않는 환경에서 20여 년을 살아왔다는 증언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한 시설 생활인은 “난 개나 돼지가 아니다. 난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법원 판결이 나기 하루 전 재단이 ‘이사회 결정사항’ 공고문을 붙이고 본인과 가족에게 ‘퇴소’ 협박까지 해오자 비대위 회원들은 5월27일 국가인권위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지체장애 1급인 홍경철(54·가명)씨는 “제복만 이사장이 나한테 와서 자꾸 집회 같은 데 나가면 퇴소시킨다고 협박했다. 누나한테도 전화해서 집에 보낸다고 했다”고 말했다. 동생이 시설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니 데려가라는 전화를 받은 누나는 놀라서 쓰러졌고 병원에 입원한 상태라고 했다. “500만원 주고 평생 있기로 했는데 이제 와서 이럴 수 있습니까.” 말을 제대로 못하는 그가 답답한 심경을 적어온 종이를 받아 사회자가 대신 읽어주는 동안 홍씨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듯 “어,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재단에서 온 전화 받고 쓰러진 누나

비대위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전동휠체어를 뺏겼다는 장애인도 있었다. “원래 다른 사람 휠체어였는데 그 사람이 죽어서 내가 쓰게 됐어요. 한데 며칠 전에 갑자기 반납하라는 거예요. 내 몸 같은 건데….” 옆에 있던 여성 장애인이 흥분하며 “내 휠체어도 뺏어갈까봐 불안하다. 이게 없으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비대위 회원은 “재단에서 한 번만 더 투쟁하면 집에 보내버린다고 합니다. 전 엄마가 무섭고 불안합니다”라고 적어와 사회자에게 건넸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염경욱 변호사는 “재단 쪽이 석암 비대위 회원들은 물론 가족들에게까지 연락해 퇴소를 강요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도록 국가인권위가 긴급 구제해주길 바라며 공고문을 붙인 차별행위에 대해 인권위에 진정한다”고 말했다. 현장에 참석한 진보신당 박영희 공동대표는 “여기 있는 입소자들은 매일 제복만 이사장과 눈을 마주치고 살아야 하는 생활인들이다. 한시간이라도 빨리 조처해 이들이 마음 편하게 잘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긴급 구제를 촉구했다.

비대위 회원들은 다음날인 5월28일 석암재단을 관리·감독하는 서울 양천구청을 찾아갔다. 이날은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을 나서면서 이를 막는 재단 쪽과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양천구청에 재단 이사장과 시설장의 해임 명령을 요구했다. 한데 구청에는 20명 남짓한 시위대의 두 배가 넘는 전경과 경찰이 배치돼 있었다. 결국 화장실에 가려고 건물에 들어가던 장애인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저녁 때까지 대치 상태가 계속된 뒤에야 양천구청 이희 주민생활지원국장은 “이번주 안에 해임 명령을 공식적으로 내리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날 제복만 이사장은 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판결은 아직 수긍할 수 없으며 비대위에 가입한 생활인은 일부일 뿐이다. 이들에게 순수한 생활인들이 이용당하고 피해당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입소 계약을 할 때 쓴 서약서대로 퇴소 조처는 있을 수도 있다”면서도 “본인이나 가족에게 ‘퇴소시키겠다’거나 ‘집에 데려가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전동휠체어는 원래 본인 것이 아니니까 반납하게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현재 법원은 제복만 이사장이 “다른 범죄 전력이 있는데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다른 피고인들보다 더 무거운 형을 선고한 상태다. 그를 포함한 피고인들은 항소를 했다. “최종 판결까지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양천구청은 5월30일, 석암재단에 ‘임원 해임 명령-시설장 교체 명령 사전 통지 및 의견진술 기회 부여’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 제복만 이사장과 홍정환 시설장에 대해 해임·교체 명령을 내렸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석암재단에 직접 조사차 찾아가 이사장으로부터 ‘생활인들을 강제 퇴소시키지 않겠다는 내용의 확약서를 받아왔다”고 밝혔다.

비대위와 소통한 직원 해임까지

재단 쪽은 이쯤에서 물러날 생각이 있을까. 상황으로 보면 답은 ‘아니요’다. 이번에는 재단이 비대위 활동을 돕는 직원을 탄압하고 나섰다. 석암재단 쪽은 6월1일자로 비대위 회원들·외부 활동가들과 소통해온 노조지부장 박미순 생활교사를 해임했다. 비대위 쪽이 거세게 항의하자 현재는 ‘3개월 무급 정직’으로 징계 내용을 바꾼 상태다. 박미순 생활교사는 출근투쟁을 하고 있지만 재단 쪽은 “그가 시설에 들어오도록 두는 직원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재단 쪽이 김포시 아파트 개발의 노른자위가 된 시설 땅을 팔아 시세차익을 챙기려 한다는 의혹도 불거지고 있다. 그룹홈과 자립시설을 만들 테니 시설을 처분하는 데 동의하라고 장애인들을 설득하고 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집행위원장은 “그룹홈이나 자립 지원 등의 방향은 올바르지만, 비리 재단이 재판도 끝나기 전에 시설을 팔아 시세차익을 가로채려는 시도는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6월4일, 비 내리는 거리 위에는 어김없이 휠체어를 탄 비대위 회원들이 떴다. 이번에는 김포시청 앞이었다. “김포 시민에게 석암재단 산하 노인복지시설인 ‘김포 수산나의 집’의 비리까지 알리겠다”는 각오다. 이에 김포 수산나의 집 오인순 원장은 “치매, 중풍 등을 앓는 어르신들을 모시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인권침해 지적은 사실과 다르다”고 에 전해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지칠 만도 한데, 석암 비대위 김현수(33·뇌병변1급) 대표는 “요즘, 힘들어도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들은 오늘도 거리 위에서 “인간답게,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처음처럼 외치고 있다.

[인권 OTL-30개의 시선]

① 쓰린 새벽의 아이들
② 아이들의 끔찍한 SOS
③ 시퍼런 가위와 금속탐지기, 무서운 학교
④ 내가 10대 레즈비언이다, 어쩔래?
⑤ 인간답게 죽고싶다
⑥ “난 네가 병원에서 한 일을 알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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