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주의 정책의 ‘근육질’을 자랑한 미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인 대통령, 재선되면 세계의 미래는?
부시의 장단에 맞춰 세계가 춤을 춘 지난 3년여. 경쟁 상대 없는 초강대국의 일방적 횡포에 국제법도, 민주주의도 숨을 죽였다. 2004 대선에서 세계는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부시가 재선된다면 한반도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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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선거’
2004년 새해를 장식하는 화두다. 11월2일에 치러지는 미 대통령 선거와 현 부시 대통령의 재선 여부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인의 관심거리다. 왜일까. 부시 정권의 등장 이후 미국과 세계는 너무나 달라졌다. 그의 4년 연임은 또 다른 격변을 예고한다. 부시 정권은 ‘테러와의 전쟁 승리’를 마치 종교적 소명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세계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가르며, 적에 대해서는 타협하기보다는 힘을 통한 문제 해결을 중시하고 있다. 후세인의 체포,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포기 선언, 이란과 시리아의 핵사찰 수용과 테러조직인 알카에다에로의 자금 차단 협조 등을 통해 더욱 기고만장해져 있다. 현 부시 정권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대부라 불리는 리처드 펄이 최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더 강경한 정책이 적으로부터 더 많은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부시 독트린’의 핵심”이라고 밝힌 데서도 잘 드러난다.
대선 앞두고 부시 비판 저서 봇물
부시 정권의 고삐가 풀린 계기는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9·11 테러의 발생이었다. 이 사건은 ‘근육질을 뽐내며’ 힘 쓸 곳을 찾아헤매던 부시 정권의 코털을 건드리는 꼴이 됐다. 부시 정권의 일방주의 정책들이 속속 실천에 옮겨지면서 미국뿐 아니라 세계는 냉전 이후 가장 살벌한 시절을 보내게 됐다. 미국은 상대방으로부터 비인간적인 테러와 같은 잔인한 공격을 당하면 합리적인 사고나 이성적 계산보다는, 매우 공격적이고 잔인한 행동을 표출해온 역사적 특징이 있다. 이런 기질은 부시 정권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 잠재적 위협 세력에 대해 선제 공격도 서슴지 않는 자세는 부시 정권의 호전성을 농축적으로 보여준다. 부시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은 악의 축들은 단순한 봉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롤백 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시 정권의 강경 외교안보 정책은 레이건과 같은 공화당 우파들도 현실적 정책으로 채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살벌한 국제 체제가 지속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 바로 2004년 대선 결과에 달려 있다. 미 대선을 10개월 앞둔 지금 세계는 부시의 재선 여부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부시 현 대통령의 실정을 비판하거나 인격을 깎아내리는 책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데서 엿볼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 교수는 최근 펴낸 저서 <대폭로>에서 부시와 그의 동료들을 미국의 정통성과 기존 정치질서를 혁명적으로 거부하는 세력, 나아가 기존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그리고 전 세계를 미국의 지배 아래 두고 제왕적으로 통치하려는 세력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검색 사이트 ‘야후’에서 ‘프로 부시’(Pro-Bush)란 단어를 치면 관련 웹사이트가 1만7900건이 나오는 반면, ‘안티 부시’(Anti-Bush)를 치면 무려 14만7천건의 사이트들이 봇물 터지듯 뜬다. 부시를 싫어하는 목소리가 그만큼 광범위하다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2004년 세계 평화의 최대 위협요소로 테러와 함께 미국(부시 정권)을 꼽는 설문조사 결과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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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전에서 부상당한 어린이. 미국의 일방주의가 약화될 조짐은 거의 없어 보인다.(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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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부시 정권은 무엇이 문제인가. 많은 이들은 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 부시 정권의 대외정책이 너무 일방주의적(unilateral)이라는 것이다. 존 볼턴 국무부 차관보가 한 “미국에게 국제법이란 없다”는 표현은 일방주의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시의 참모들은 국제기구, 국제법 혹은 다자주의 해결 원칙은 현 국제사회에서는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되며, 미국의 권리를 제한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동맹관계도 미국의 국익에 장애가 된다면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다.
부시 정권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과 교토 기후협약을 거부했고, 국제형사재판소의 출범을 막았다. 2050년까지 세계 인구를 98억명 아래로 억제한다는 목표를 제시한 유엔 인구회의의 카이로선언이 낙태를 지지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이유로 세계 인구증가 문제의 해결을 거부하고 있다. 세계인의 시각에서 보면 부시 정권은 국제적 협력과 합의는 내팽개친 채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정권인 셈이다.
경쟁자 없는 초강대국의 앞날
사실 미국만이 이기적이라고 탓할 수는 없다. 모든 나라는 자신의 이기적인 국가이익을 추구한다. 이는 자연스레 일방적 성격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대부분의 나라들이 자신들의 이익만 쫓을 수는 없다. 국제사회에서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굴면 금방 ‘왕따’를 당하기 십상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협력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많은 전문가들은 탈냉전 시대 미국과 같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지닌 유일 초강대국의 존재는 근대국가 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19세기 대영제국의 막강한 힘도 해군력을 빼면 현재 미국이 갖고 있는 총체적 국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따라서 지금 부시 정권은 자신들의 일방주의적인 목표를 관철시킬 힘이 있기 때문에 다른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 웨이를 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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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지고 있는 세계무역센터 건물. 9·11테러는 근육질을 뽐내며 힘 쓸 곳을 찾아헤매던 부시 정권의 코털을 건드리는 꼴이 됐다.(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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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주의 정책의 압권은 미국이 자신들의 잣대에 따라 특정한 국가들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선제공격을 정당화하며 실제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나, 전임자 클린턴 대통령도 눈엣가시처럼 여겼으나 어쩌지 못했던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단번에 갈아치운 현 부시 대통령의 힘은 일방주의의 위력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라크를 선제공격한 것은 명분인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관한 확증이 드러나기도 전이었다. 미국, 아니 부시 정권은 이제 지구의 정의를 지키는 법관이자, 악을 징벌하는 유일무이한 세계 경찰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에게 악의 축을 응징하는 것은 도적적 의무로 간주된다.
앞으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미국의 일방주의가 약화될 조짐은 거의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거나 제동을 걸 수 있는 강대국이 없다. 백창재 서울대 정치학교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유럽 국가들이나 일본은 미국의 동맹으로 남아 있고,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에 도전하기보다는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아래에서 생존과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이들 강대국은 미국과 힘의 격차가 너무 큰 탓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우선 군사력에서 그 어느 나라도 미국을 양과 질적으로 당분간 쫓아갈 수 없다. 미국의 군사비는 2위부터 20위까지 국가들의 군비 지출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미국이 군사기술 개발에 지출하는 비용은 미국 다음의 6개국을 합한 것보다 많다. 물론 이런 막강한 군사력은 경제력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미국의 경제 규모는 일본의 두배에 달하며, 캘리포니아주의 경제 규모만 해도 프랑스보다 큰 것으로 알려졌다. 20세기 후반부터 일고 있는 금융자유화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미국의 경제패권을 더욱 탄탄하게 받쳐주는 구실을 하고 있다. 1999년 세계 해외 직접투자의 3분의 1 이상을 미국이 점유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위기 극복 뒤 위세 하늘을 찔러
한때 부시의 일방주의는 위기에 봉착하는 듯했다. 부시 정권 아래의 미국이 패권체제의 위기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극 체제의 재정비와 군사주의 노선의 강화를 통해 극복하겠다고 하다가 도리어 세계의 반발에 직면함으로써 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비판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는 특히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전쟁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던 유럽 동맹국들의 반발로 더욱 힘을 얻었다. 9·11 테러 사건 이후 반테러 전쟁에서 국제 공조의 중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부시 정권의 일방주의가 일시적으로 약화되는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다른 주요국들의 참여 없이 자신만의 능력으로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다는 국제 정치 현실주의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순간이었다. 또 이라크 전쟁에서 이긴 이후 저항세력의 격렬한 테러가 부시 정권을 수렁에 빠트리자 부시 정권은 유엔에 도움을 호소했다. 국제사회는 부시의 일방주의 퇴조를 점쳤다. 겸손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꽃이 피듯이 이라크의 전후 혼란은 부시에게 새로운 반성과 변신의 기회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일각에서는 이라크 전쟁을 밀어붙였던 매파들, 이른바 네오콘들의 시대는 끝났다는 진단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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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0월27일 미군들이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한 바그다드의 적십자사 건물을 조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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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황은 급반전되고 있다. 후세인이 체포되고, 공교롭게도 리비아가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하고, 이란과 시리아가 미국의 강경정책에 굴복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네오콘들은 특히 리비아 지도부가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을 포기한 것은 이라크 공격의 정당성을 입증한 명백한 사례라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의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미 국민의 59%가 “이라크 전쟁은 싸울 만했다”고 지지 의사를 밝혔다. 여세를 몰아 9·11 테러범 혐의를 받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이 잡히고, 이라크 치안이 안정되어 미군의 희생이 더는 발생하지 않을 경우 부시와 네오콘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게 분명해 보인다.
당장 네오콘들이 자신들의 자존심을 건드려온 북한 김정일 정권의 고사 작전에 총력을 기울일 게 뻔하다고 전망한다. 중동에서도 석유자원을 확보하고, 이스라엘을 더욱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질서 재편성에 시동을 걸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마무리한다는 명분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테러리스트를 제거하기 위한 군사행동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부시가 재선될 경우 이후 4년 동안 펼쳐질 미래의 생생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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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에 체포되어 건강검진을 받고 있는 후세인. 이라크에서 미국은 다시 호기를 맞고 있다.(GAM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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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순전히 힘에 의존한 위기 대응과 문제해결 방식은 평화로운 지구를 염원하는 세계인의 한결같은 여망과는 거리가 멀다. 현실은 미국이 국제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독선적으로 내세우는 막가파식 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비판 목소리에 포위되어 있다. 그래서 ‘부시의 정치적 성공’을 경계하는 눈초리가 곳곳에 있는 것이다. 미국의 많은 지성들은 지금이라도 부시가 미국의 전지전능한 힘이 아니라, 그것의 한계를 깨달을 때라고 지적하고 있다. 마이클 이그나티프 하버드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12월24일 <파이낸셜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부시 정권이 테러와의 전쟁을 외친 지 2년이 지났지만 세계가 이전보다 안전한 곳이 되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미국이 처한 최대 문제점으로 이라크 전쟁으로 과거 돈독했던 동맹이 무너진 점을 들었다. 따라서 이라크 전쟁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려 정당성이 확보되더라도 일방적인 힘의 대가는 엄청난 것으로 입증될 것이라는 게 이그나티프 교수의 주장이다. 부시 대통령이 이런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세계인들은 그를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호전적이고 독선적이었다는 혹평을 내릴지 모른다.
부시의 변신은 가능한가
이란이 지난해 12월26일 리히터 규모 6.3의 강력한 지진으로 최악의 지진 참사를 겪자 그간 이란을 ‘악의 축’의 하나로 적대시하던 미국도 구호의 손길을 내밀었다. 부시 대통령은 매우 이례적으로 막대한 지진 피해를 입은 이란에 복구 지원을 제의했다. 텍사스주 크로퍼드의 목장에서 연말연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부시 대통령은 “모든 미국민은 희생자 가족들과 슬픔을 함께하며 이란 국민들을 도울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백악관은 이란에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면서 국무부가 곧 원조 방안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9·11 테러 이후 내내 복수심에 불타 이를 가는 부시 정권을 숨죽여 지켜봐온 많은 사람들은 모처럼 자비로운 미국의 모습을 접한 셈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12월28일 “미국이 악의 축의 일원이라고 규정했던 이란에 3400kg의 의약품과 물을 지원하기 위해 최근 10년만에 처음으로 미군 군용기 4대가 이란에 도착했다”면서 “종종 가장 어려운 순간에 옛날의 적들이 협력과 동정심으로 함께 자리하게 된다”고 타전했다. 이렇게 어려운 순간에 보내는 지원은 양국간에 완고하게 닫힌 것처럼 보이는 문을 열게 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이런 부시 정권의 선의가 지속될지는 앞으로 더 두고 봐야 한다.
부시 대통령이 2004년 대선을 계기로 테러와 반테러 전쟁의 악순환으로 갈기갈기 찢긴 지구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는 ‘화합의 지도자’로 거듭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글/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표지사진/ GAMMA
표지디자인/ 장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