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는 강경기조 유지하며 재선 뒤 ‘손볼’ 계획… 북한은 물러서지 않고 ‘초강수’ 둘 수도
2004년은 미국 대선의 해이자, 북핵 문제의 최대 분수령이 되는 해가 될 것이다.
부시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이라크와 리비아가 미국에 무릎을 꿇으면서 중동 평정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국지적 테러와 저항이 여전히 부시 정권을 성가시게 하고 있으나 국가 차원의 ‘주적’은 거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부시 정권이 출범 초기 불량국가로 지목한 나라들은 이라크, 이란, 리비아 그리고 북한이었다. 이란은 유엔의 핵시설 불시 사찰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미국이 본격적으로 손볼 국제사회의 부랑아는 북한 외에 찾기 어렵다. 미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인 정권의 특별한, 그리고 집중적인 주목을 받는 나라는 여러모로 부담스럽다. 역사가 증명하듯 미국의 표적이 된 정권의 말로는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다.
미국, 일본 무장 부추겨
특히 북한 못지않은 불신의 대상이었던 리비아가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겠다고 나서자, 부시 행정부 내 매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기대 밖의 성과였기 때문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12월20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카다피 원수가 평화를 원하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이해한 것 같다”며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똑같은 생각을 갖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매파들은 자신들의 평소 주장을 입증하듯 무력 사용 위협이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의 포기를 이끈 직·간접적 요인이 된 점에 크게 고무되어 있다. 이는 남북한 모두에게 결코 희소식으로 들리지 않는다. 가뜩이나 뻣뻣한 태도를 견지해오던 부시 행정부를 설득하기가 더욱 난감해졌기 때문이다.
또 이번 사건은 핵 문제의 장기화를 알리는 신호탄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라크 전후 처리의 어려움으로 곤욕을 치른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지연 전술에 무게를 두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쪽은 북한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를 입증하듯 미국은 6자회담 대화 틀은 유지하면서도,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은 강화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는 겉으로 6자회담을 추진하면서도, 뒤에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전을 치른 첨단 무기들을 은밀하게 남쪽에 배치했다. 미 국방부는 한국 정부에 미군을 비무장지대 밖으로 빼내는 대신 최신 군사장비 도입에 110억달러를 지출하겠다고 약속한 터다. 북-미 관계 비관설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거는 미국이 한반도에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동시에 일본의 무장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12월19일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각료회의를 잇달아 열고, 북한의 중거리 탄도미사일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이 실전 배치한 미사일방어체제를 2004년부터 도입하기로 정식 결정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이지스함에서 발사할 스탠더드미사일 SM-3, 지대공 PAC-3 등 65억달러어치의 미국산 미사일방어시스템을 구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

△ 2003년 11월22일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연설 중인 카다피 국가원수. 그는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겠다고 발표했다.(연합)
|
이런 징후들은 매우 눈여겨볼 대목이다. 미국이 진심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도 내심 적지 않은 회의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한 핵심 관계자는 사견임을 전제로 “솔직히 해가 바뀌어도 미국의 태도가 변할 조짐은 없어 보인다”며 “부시 행정부는 한국과 일본 등지에 지속적으로 무기를 수출하고, 세계적인 반테러 동맹을 유지하며, 군사혁신과 미사일방어체제를 추진하기 위해 적절한 북핵 위협을 오히려 원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미국의 이런 강경 기조는 2004년 대선까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을 설득하는 시늉을 하면서 국내외적인 대북 협상 압력을 비켜가되, 중장기적으로는 협상이나 대화보다 강압 외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이 관계자의 시각이다. “워싱턴의 매파들은 북핵 문제가 일단 6자회담이라는 틀 속에서 이미 통제되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북한에 비해 시간이 급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대선 직전에 북핵 문제가 파국으로 치달아 미국의 신문, 방송에서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일만 일어나지 않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는 듯하다. 매파들은 일단 대선에서 승리한 뒤 북핵 문제와 북한 정권을 강경한 입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북이 먼저 굴복하지는 않을 것
그렇다면 북한은 미국의 이런 지연 전술에 어떻게 대응할까. 북한도 핵 문제의 조기 타결을 서둘 것 같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외교안보연구원은 ‘2004년 국제정세 전망’에서 “내년에 국제사회의 대북 정치·경제적 압박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나, 북한은 11월 미 대선 전까지 6자회담에 한두 차례 응하면서 그럭저럭 버티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북한 지도부는 미국 대선에서 현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고 민주당 후보가 집권할 경우 전임 클린턴 행정부 때 합의했던 관계개선 조처들이 다시 부활할 것으로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민주당 후보 가운데 선두주자인 하워드 딘 전 버몬트주 지사를 비롯해 웨슬리 클라크 전 나토 사령관, 존 케리 상원의원 등 유력 후보들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 양자회담, 불가침 조약 체결 그리고 에너지 지원 등 북한이 반길 만한 주장들을 내놓고 있다. 이는 실천 가능 여부를 떠나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경우 현 부시 정권보다는 훨씬 유연한 대북정책의 출현 가능성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북한 당국의 기대감을 높여주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리비아 모델을 따를 것으로 전망하는 전문가는 많지 않다. 부시 대통령은 12월19일 “핵과 생화학무기 및 무기전달 수단 개발계획을 포기한 지도자들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 국가들과 더욱 우호적인 관계개선의 길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은 국내 정치적 요인 때문에 부시의 제안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정부 관계자는 “선군정치를 기치로 내걸며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 맞서온 자부심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권위를 유지해온 배경인데, 미국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굴복하는 것으로 비칠 경우 내부적으로 김 위원장의 권위가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핵사찰은 곧 죽음’이라는 초강경 자세가 북한의 이런 절박감을 잘 보여준다. 김영춘 북한군 총참모장은 12월23일 김정일 최고사령관 추대 12주년 기념보고대회에서 “미 제국주의자들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감행하면서 공화국에 대한 국제적 포위망을 형성해보려고 획책하고 있다”면서 미국이 강경으로 나오면 초강경으로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일각에서는 북한 지도부가 부시 행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선수를 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외교안보연구원은 “북한은 부시 행정부가 대선 전까지는 외교적 노력에 주력할 것으로 보고, 최소한의 회담에 응해 협상 국면을 유지하되, 대선 추이를 보면서 탄도미사일 발사, 핵 보유 선언 등 도발 행동을 위한 승부수를 던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부시의 재선 혹은 낙선 추이를 면밀히 지켜보되, 관망만 하기보다는 기회가 포착되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초강수’를 두기 쉽다는 지적들이다.
북이 승부수를 던진다면?
북한이 막 나갈 경우 이라크, 리비아 정책을 통해 딴 점수를 잃어버려 대선 가도에 먹구름을 드리울 수 있다는 부시 정권의 우려가 더욱 유연한 대북정책을 불러올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는 부시가 국내적으로 곤경에 처할수록 북핵 카드를 지지율을 조금이라도 끌어올리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분석으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부시 행정부 내 매파들이 북한이 미 대선에서 부시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핵 보유 등을 입증해 보인다면 군사력 사용을 서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라크 등과 달리 북한이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강행하는데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거나 양보안을 제시하면 형평성 논란뿐 아니라 부시 정권의 지지 기반인 보수세력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2004년 한반도는 북핵 문제와 미국 대선으로 편안한 날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