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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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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보며 태양을 피하다

지역 기후에 맞춘 아파트, 손쉽게 개축하는 임대주택 등 서구의 근대 건축물에 인도 철학을 더한 건축가 찰스 코레아
등록 2015-07-10 16:58 수정 2020-05-03 04:28
Charles Correa Associ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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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오늘을 담아낸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 찰스 코레아가 2015년 6월16일 뭄바이에서 별세했다. 그의 사위인 라훌은 “오랫동안 앓아온 폐암이 원인이었다”고 전했다. 향년 84.

건축 전문 잡지 는 그의 죽음에 대해 “위대한 비전을 품은 인도주의자가 하늘로 갔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색을 보여준 건축가였다”고 추모했다. 건축평론가 에드윈 히든은 에서 “더 아름다고 더 평등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뭄바이에서 보냈다”고 그를 회고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그의 건축물은 혁신과 열정, 훌륭한 미적 감각을 반영했다”고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조의를 표명했다.

많은 희망과 약한 기대, 1958년 인도로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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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한 가족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면 도시 건축은 한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담는 틀이다. 찰스 코레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의 폭발적인 도시화를 목격한 1세대다. 동시에 그는 인도의 현재를 만들어간 주역이다.

찰스 코레아는 1930년 9월1일 인도 하이데라바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당시 포르투갈 지배 아래 있었던 인도 서부 지역에서 고아로 자라났다. 원래 힌두교였지만 나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부모는 아들의 이름 역시 기독교식인 찰스로 지었다.

1948년 코레아는 봄베이대학교(현 뭄바이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시간대학에서 건축학 석사를,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건축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디트로이트의 미노루 야마사키 건축사무소에서 실무를 배웠다. 인도가 독립한 지 11년이 지난 1958년 뭄바이로 돌아왔다. 자신의 사무실을 열었다.

“인도는 새로운 나라였다. 모든 것이 바뀌는 에너지가 역동적이었다.” 2013년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너무 많은 희망과 너무 약한 기대, 모든 것이 위험하지만 매력적이었다”고 덧붙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았다. “훌륭한 비례는 평안함을 주고 나쁜 비례는 불편함을 준다”는 르코르뷔지에의 원칙에 그는 ‘지역성’을 더했다. 모더니즘에 인도 특유의 문화와 철학을 풀어 넣었다. 지역주의 건축가로 이름을 널리 알린 그는 1972년 인도 정부로부터 파드마 슈리 훈장을 받았다. 2006년에는 인도 최고 훈장인 파드마 비부산 훈장을 받았다. 1988년엔 아가 칸 건축상을 받았다.

팽창하는 도시를 새롭게 계획하며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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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초기 대표작은 마하트마 간디 추모 박물관(1958∼63)이다. 간디의 고행과 헌신을 반영하는 한편, 물과 빛을 반영한 우아한 디자인으로 단숨에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의 건축 철학을 대표하는 것은 일련의 도시 주거 건축에 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인도 하늘의 태양. 인도는 올해만 2200명의 폭염 사망자가 발생한 나라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도 전에 주요 도시의 기온이 40℃를 육박한다. 수천 년 전부터 태양신을 모셔온 것도 태양을 피하려는 마음에서 비롯했다.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뭄바이·뉴델리 등 도시가 커질수록 태양도 뜨거워졌다. 햇볕은 땅으로 흡수되지 못하고 아스팔트에 반사되어 도시를 달구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아파트 칸춘준가(1970∼83)에서 그의 철학이 여실히 드러난다. 대도시 뭄바이에서 늘어나는 주택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코레아는 서구의 고층 건물을 도입했다. 높이만 84m다. 동시에 작열하는 햇빛을 피하고 변화무쌍한 폭우를 피하도록 지어졌다.

기존의 서구식 건물보다 더 넓은 테라스도 특징적이다. 2층 높이의 테라스를 통해 하늘과 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해가 뜨는 나라 인도 그 자체를 담은 것이다. 힌두교의 사원처럼 열린 공간에는 종교적 의미도 부여했다. 서구의 근대 건축물인 아파트에 인도의 철학을 더한 것이다.

“하늘은 언제나 신비하고 성스러운 공간”이라고 그는 1997년 발표한 글 ‘하늘의 축복’에서 밝혔다.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 가장 쾌적한 장소는 하늘을 향해 열린 옥외 공간이다. 인도에서 하늘은 인간과 건축물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가난과 빈곤의 그늘도 깊어졌다. 인도의 상업도시 중심인 뭄바이에는 1300만 명이 살고 있다. 이 중 도시 슬럼가의 빈민은 100만 명. 가장 부유한 이들과 가장 가난한 이들이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갔다. 1964년 그는 ‘뉴 뭄바이 플랜’을 제안했다. 1970년부터 5년 동안 뉴 뭄바이의 수석건축가로 일하며 급속히 팽창하는 도시를 새롭게 계획하면서 사회·경제적 계층에 따른 다양한 주거 형태를 제안했다. 그는 대규모 주택 단지인 벨라푸르 임대주택(1983∼86)을 지으면서, 훗날 거주자들의 소득수준이 높아질 경우 손쉽게 개축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임대주택을 마무리할 무렵인 1985년, 라지브 간디 총리는 그를 인도 도시화 위원회 의장으로 지명하기도 했다.

“정치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의 꿈이 완벽하게 실현된 것은 아니다. 뭄바이가 거대해지자 새로운 위성도시 ‘나비 뭄바이’를 건설하려 했지만, 그 계획은 끝내 좌절됐다. 그의 친구인 아닐 드하커는 일간 에서 “(코레아는) 정치력이 부족했다”고 평했다. “코레아가 델리도시예술위원회와 도시국가위원회 의장을 맡았지만 정부는 단지 그가 그곳에 있다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그것이 그의 삶 중 가장 심각한 비극이었다”고 건축가 로미 코슬라는 에서 평했다.

*이 글은 등을 참고했습니다.김승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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