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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소통의 창을 열다

인터넷과 현대 개인컴퓨터의 창안자인 심리학자 로버트 테일러
등록 2017-04-27 01:58 수정 2020-05-02 19:28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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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안으로 인간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보다 기계를 통해 더 효율적으로 소통하게 될 것이다.” 1968년 미국 국방부 정보처리기술국장 로버트 테일러와 심리학자 J.C.R. 리클라이더가 함께 쓴 논문 ‘통신수단으로서 컴퓨터’의 첫 문장이다. 그들은 미래의 컴퓨터 사용자는 정보 서비스를 위해 가입비를 내고 사이버공간에 ‘커뮤니티’를 만들 것이라고도 예상했다.

동료들을 격려하고 영감을 주는 ‘연구 설계자’

논문은 반세기 넘게 맞아떨어진 예언이자 테일러 자신이 실현시킨 꿈이었다. 인터넷 발명은 컴퓨터의 가능성을 정보 분석만이 아니라 인간 소통을 위한 도구로까지 넓게 상상했던 테일러의 직관에 따라 연구를 진행한 결과였다. 논문이 나온 이듬해, 테일러가 이끌던 미 국방부 연구소는 현대 인터넷의 모체인 ‘알파넷’을 개발했다. 테일러는 이후 인터넷, 개인컴퓨터, 마우스, 데스크톱과 아이콘 디스플레이를 기본으로 하는 컴퓨터 운영체제가 만들어지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었다. 그는 컴퓨터 과학자가 아니라 심리학자였다. 연구자가 아닌 ‘연구 설계자’로서 유능한 과학자에게 조력을 아끼지 않고 최고의 결과를 끌어낸 상사이기도 했다.

1932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난 테일러는 1959년 텍사스대학에서 실험심리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한동안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며 농구 코치로 일했다. 평온한 삶에 만족했지만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기에는 벌이가 너무 적었다.

이후 테일러는 미사일 장비를 실험하고 디자인하는 공학자가 됐다. 연구실을 유머와 활기로 채우던 그는 동료들을 격려하고 영감을 주는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 덕에 30대 초반에 미 항공우주국(NASA·나사)의 연구관리자로 발탁될 수 있었다. 이곳에서 테일러는 초기 인터넷의 구상을 함께 나눈 리클라이더를 만났다. 또한 나사에서 일하는 동안 테일러는 스탠퍼드연구소(SRI)의 젊은 과학자 더글러스 엥겔바트가 인간과 컴퓨터의 직접적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것을 알고서 예산을 지원해주었다. 엥겔바트는 컴퓨터 마우스를 발명했다.

1966년 테일러는 미 국방부의 고등연구계획국(ARPA) 산하 정보처리기술국(IPTO) 국장이 됐다. 당시 고등연구계획국은 컴퓨터 3대로 연구했는데, 각 컴퓨터가 서로 통신하기 위해 단말기 3대가 더 있어야 했다. 여기에 외부 대학과 공동 연구를 하기 위한 단말기도 추가로 필요했다. 테일러의 사무실은 단말기로 가득 차 엉망진창이 됐다. 테일러는 국방부에 컴퓨터끼리 소통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에 예산 지원을 요청했고, 당시 탄도미사일방어 예산 중 100만달러가 연구비로 지원됐다. 3년 뒤, 초기 인터넷 알파넷이 개발되고 연구소 컴퓨터들 간에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해에 테일러는 국방부를 떠났다.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쟁에서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컴퓨터 시스템을 바꾸러 베트남에 몇 차례 파견돼 갔다가 돌아온 뒤였다.

실리콘밸리의 시작이자 전설

1970년 테일러는 프린터 회사 제록스에 팰로앨토연구소(PARC)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실리콘밸리의 시작이자 전설이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레이저프린터와 개인컴퓨터 ‘알토’가 생겨났고, 근거리통신망 기술 ‘이더넷’이 처음 구현됐다. 컴퓨터 화면에 ‘데스크톱’을 만들고 아이콘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보여주는 그래픽 디스플레이도 이 연구소에서 만들어졌다. 이는 애플과 매킨토시, 마이크로소프트 운영체제가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 영감을 주었다.

테일러는 애초 심리학자였다. 공학 관련 박사 학위도 없고 인터넷 네트워크나 컴퓨터 실무 기술 지식도 당연히 부족했다. 그가 연구실에서 다뤄야 할 이들은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나 버클리대학 등 이른바 명문대를 나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고집 세고 우수한 젊은 과학자였다. 테일러에게는 그들이 협업하고 목표를 공유해 그에 걸맞은 결과를 내도록 이끄는 능력이 있었다.

‘알토’팀의 앨런 케이는 [LA타임스] 인터뷰에서 “테일러는 모두가 프로젝트를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테일러 후임 연구소장으로 재직한 빌 스펜서는 이렇게 회상했다. “테일러는 출근하면 사무실에 있지 않고 나와서 8~10시간 동안 모든 연구원들을 개인적으로 만났다.”

조직원들의 가능성을 최대한 고양시키는 것이 테일러의 관리 방식이었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딜러의 방’이라 불린 아이디어 모임을 열었다. 한 주의 주제를 제시한 연구자를 둘러싸고 동료들이 편안한 의자에 기대어 난상 토론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테일러는 누군가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면 “물론,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해”라고 말하는 상사였다.

테일러는 연구원들이 해야 할 일을 세세하게 적은 구상도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연구가 빠르게 진척되게 하는 촉매 같은 존재였다. ‘알토’팀 버틀러 램슨은 [LA타임스] 인터뷰에서 “‘마스터’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테일러는 언제나 향후 몇 년을 계획해두었고, 우리는 그대로 따라 걸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83년 테일러가 팰로앨토연구소를 떠나 디지털이큅먼트사(DEC)로 옮겨갈 때 연구원 15명이 그를 따라갔다. 다른 이들은 애플이나 아타리(비디오게임 회사), 마이크로소프트로 흩어졌다. 1996년 은퇴할 때까지 테일러는 이 연구소에서 초창기 인터넷 검색엔진 ‘알타비스타’ 만드는 일을 도왔다.

“40년 동안 누구와 일할지 선택할 수 있었다”

은퇴 이후 테일러는 실리콘밸리와 스탠퍼드대학 캠퍼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자택에서 살았다. 그는 토마토를 기르면서 개 두 마리와 함께 지냈다. 종종 컴퓨터게임을 했지만 휴대전화는 없었다고 한다.

테일러는 생전에 그가 착안한 발견에 특허를 낸 적이 없고 특별히 돈을 많이 벌지도 못했다. 1999년 미국 정부가 주는 최고 기술훈장인 국가기술혁신메달을 받았지만 “가능하면 실리콘밸리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며 시상식에 다른 사람을 보냈다. 테일러는 2000년 실리콘밸리 지역신문 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40년 동안 누구와 가까이 일할지 선택할 수 있었다. 나 말고 누가 그럴 수 있었겠나. 그게 내 인생이었다. 고의적으로 상업적인 세계와 거리를 둬왔다. 당신들이 성공적인 회사를 만들기 위해 같이 일해야만 하는 머저리들과는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킨슨병을 앓던 테일러는 지난 4월13일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

김여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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