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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계 성차별의 벽을 허물다

베트남전쟁 이면을 취재한 미국 언론인 앤 모리시 메릭
등록 2017-06-03 06:27 수정 2020-05-02 19:28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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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당시 여성 언론인들이 취재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성차별주의에 맞서 변화를 이끌어낸 미국의 선구적 여성 언론인 앤 모리시 메릭이 지난 5월2일 미국 플로리다주 네이플스에서 치매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

1960년대 미국에서 베트남전쟁은 “프리랜서의 천국”으로 묘사되곤 했다. 기사 게재를 보장하는 언론사나 에이전시의 문서 몇 통과 비행기 삯만 있으면 누구든 취재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전세계에서 수많은 이가 베트남전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동시에 많은 여성 언론인에게도 베트남전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때 처음 여기자의 출입을 제한하는 공식적 군사지역 경계가 사라졌다. 베트남전은 주로 게릴라전으로 이뤄졌고, 그것은 ‘최전방’이 따로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은 도처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전투 지역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사실상 취재 제한 명령

총 467명의 여성 특파원이 베트남전에 파견됐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여기자가 상관에게 자신을 베트남으로 보내줄 것을 설득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여야 했다. 그중에는 미국 'ABC뉴스'의 현장 프로듀서 앤 모리시 메릭도 있었다. 메릭은 1967년 처음 'ABC뉴스'의 베트남 사이공(호찌민) 특파원으로 파견됐다. 처음에는 3개월 출장만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3개월은 9개월이 됐고, 결국 메릭은 베트남에서 7년을 보냈다.

베트남에 있는 여기자들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1964년부터 베트남의 미군 지휘를 맡던 미군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란드 장군의 ‘웨스트모란드 포고령’이 떨어지고부터다. 웨스트모란드 장군은 우연히 작전지역에서 의 24살 여기자 덴비 포셋을 만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포셋 기자는 베트남 서부고원 지역에서 위험한 작전을 진행하던 미군들 속에 취재차 파견 나와 있었다.

웨스트모란드 장군은 전장을 누비는 여기자들의 ‘안전’을 우려하며, 여기자들이 전장에서 밤을 보내는 걸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말하자면 낮에 전장에서 취재를 하되, 밤에는 기지로 돌아가 잠을 자라는 거였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 전선이 나타날지 모르는 급박한 전쟁 상황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는 큰 장애물이었다. 더구나 현실적으로 전쟁이 한창인 지역에서 밤에 기지로 귀환할 방법을 찾기도 힘들었다. 사실상 취재 제한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포고령의 시발점이 된 덴비 포셋 기자는 최근 'CBC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 지역 어딘가에 있는데 ‘오, 이제 돌아가야겠어. 집에 가야겠군’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전쟁 지역에 무슨 택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남성 기자들에게 그런 규율 같은 건 없었습니다.”

메릭은 독일 주둔 미군 대상 타블로이드 영자지 의 앤 브라이언 마리아노 기자, 그리고 6명의 다른 여기자들과 함께 웨스트모란드의 명령에 저항하기로 했다. 메릭은 2002년 동료 기자 8명과 함께 쓴 에 이렇게 썼다. “웨스트모란드의 명령은 우리의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데 치명타였다. 우리는 싸워야만 했다.”

메릭은 당시 사이공의 유일한 여성 ‘TV’ 특파원으로서 이들 그룹의 대변인을 맡았다. 이들은 미 국방부에 장군의 명령을 철회할 것을 호소하며, 로버트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결국 장관 대신 국방부 차관 필 굴딩을 만났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명확한 결론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예일 볼’의 기자석에 앉은 첫 여성

이후 메릭은 굴딩 차관을 따로 만났다. 이들은 함께 술을 마시며 전쟁에 대한 의견 등을 나누었고, 결국 굴딩은 집으로 돌아갈 때쯤 “웨스트모란드의 포고령은 폐지될 것이며 당신들은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메릭은 앞서 언급한 책에 이렇게 썼다. “덧붙여,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일 내가 그와 잤는지 궁금해한다면, 그 대답은 ‘아니요!’다.”

메릭과 동료 여기자들이 한 일은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 걸프전, 보스니아 분쟁 등 전쟁 지역을 취재한 여성 언론인을 위한 길을 닦았으며, 이후 세대의 여성 종군 기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AP통신'의 첫 여성 해외 특파원으로 유명한 전설적인 국제분쟁 취재기자 이디스 레더러는 'NPR라디오' 인터뷰에서 “나는 (AP의 첫 여성 해외 특파원으로) 1972년 베트남에 도착했다. 메릭이 길을 닦아놓은 덕분에 차별에 직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베트남에 있는 동안 메릭은 전쟁 이면의 이야기를 발굴하려 노력했다. 메릭이 생각하기에 미국 TV 뉴스 속 베트남전은 “저녁 시간의 오락거리를 위해 매일 밤 약간의 총격전을 담은 조각 영상들로 토막 나”() 있었다. 메릭은 전쟁을 경험하는 현지인, 간호사, 병사들의 감정 등 다른 측면의 이야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남성들은 나가서 그런 기사를 쓰려 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연성 기사가 전쟁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메릭은 1933년 10월28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존 모리시는 광고 책임자였고 어머니 캐서린 해리엇 매케이는 배우였다. 메릭이 ‘여성’ 언론인으로서 처음 전국적 관심을 받은 것은 대학 때였다. 그가 코넬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만 해도 아이비리그는 대부분 남성들로 가득 차 있었고 언론계 역시 그랬다. 1954년 메릭은 대학신문 의 역사상 첫 여성 스포츠 기자가 됐다.

또한 여성에게는 ‘불가침 영역’이던 ‘예일 볼’(예일대학의 유서 깊은 풋볼 경기장)의 기자석에 앉은 첫 여성이 됐다. (당시 사진을 보면, 남성들로 빽빽한 기자석 사이로 모자에 꽃을 단 드레스를 입고 걸어가는 메릭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남성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일은 놀라운 사건이었고, 메릭이 남성 로커룸에서 선수 인터뷰를 진행한 일과 함께 전국적으로 크게 보도됐다.

몇몇 조소를 담은 보도는 당시 남성 지배적 언론계에서 여성 언론인에 대한 시각이 어땠는지 보여준다. 이들은 메릭을 두고 “레이디 스포츠 에디트리스(‘에디터(editor)’의 여성형)” “스포츠 기사를 쓰는 인형(sportswriting doll)” “컵케이크” 같은 표현을 쓰며 그의 성취를 조롱했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시민권운동 취재

에 따르면 당시 은 사설을 통해 “그녀는 다트무어의 녹색이나 하버드의 진홍색 유니폼에 대해 패션 리뷰를 쓰고, 선수들이 어떤 액세서리를 하는지 쓸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기사 어딘가에서 경기 점수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비아냥거렸다.

메릭은 1955년 코넬대학(철학 전공)을 졸업한 뒤, 대학 때 명성에 힘입어 의 프랑스 파리판 스포츠 기자로 일했다. 1961년 ABC 방송국에 프로듀서로 취직해,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시민권운동과 대통령 예비선거, 케네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초기 우주비행 계획 등 미국을 변화시킨 많은 사건을 포함한 굵직한 분야를 담당했다. 이후 1960년대 베트남전에 배치돼 'US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의 특파원 웬델 S. 메릭을 만났고, 1969년 그와 결혼해 딸을 낳았다. 부부는 1973년까지 전쟁 지역에서 딸아이를 키우며 베트남에 머물렀다. 웬델 메릭은 1988년 사망했다. 이후 메릭은 의사인 돈 S. 자니섹과 재혼했다. 유족으로 딸 캐서린 앤과 손주 4명이 있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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