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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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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질곡진 역사와 함께하다

난민 구제 활동에 앞장선 유대인이자 인도인 소바 네루
등록 2017-05-27 08:23 수정 2020-05-02 19:28
소바 네루는 인도 현대사의 격동기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소바의 말년 모습(위)과 남편과 찍은 젊은 시절 모습. 유튜브 갈무리, www.geni.com 누리집 갈무리

소바 네루는 인도 현대사의 격동기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소바의 말년 모습(위)과 남편과 찍은 젊은 시절 모습. 유튜브 갈무리, www.geni.com 누리집 갈무리

소바 네루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가 20살 되던 해인 1928년, 헝가리 대학들은 유대인 입학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소바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헝가리를 떠나 영국으로 가 런던 정치경제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인생의 동반자가 되는 인도인 비케이 네루(Braj Kumar Nehru)를 만났다. 비케이 네루는 인도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이후 인도의 첫 번째 총리가 된 자와할랄 네루의 사촌이다.

양가 부모들은 자식의 연인을 반기지 않았다. 비케이 네루는 회고록에서 헝가리 처가의 반응에 대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딸이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온 시커먼 남자와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어? 거기다 감옥을 밥 먹듯이 드나드는 집안이라는데”라고 썼다. 카스트 계급 최상층으로 가문에 외국인을 한 번도 받아들인 적 없는 네루 집안도 탐탁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네루 가문은 남들 앞에서 울지 않는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양가 부모가 부다페스트에서 만나 결혼을 허락했다. 소바는 후에 아들의 친구인 역사학자 마틴 길버트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부모님들은 거실에 앉아 있고 나는 침실에서 울고 있었어요. 시어머니가 화장실을 가다 내가 우는 걸 봤죠. 시어머니는 ‘저 애들이 바라는 대로 둬야 해요’라고 말했어요.”

1935년 결혼한 소바는 남편을 따라 인도에 갔고 평생 인도의 전통 의상 ‘사리’를 입었다. 그는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끝난 1949년에야 아들 셋을 데리고 고향 헝가리를 방문할 수 있었다.

소바는 평생 세 개의 이름을 가졌다. 그의 본명은 머그돌너 프리드만(Magdolna Friedman)이었다. 그러나 유대인 억압이 시작되면서 그의 부친이 성을 덜 유대인스러운 ‘포배스’(Forbath)로 바꿨다. 결혼한 뒤로는 네루 일가의 성을 따랐고 이름도 힌두식으로 ‘빛, 아름다움’을 뜻하는 ‘소바’(Shobha)로 바꿨다. 평생 그의 별명이 된 ‘포리’(Fori)는 결혼 전 성 포배스에서 온 것이다.

소바의 시댁인 네루 가문은 영국의 식민 지배, 분할, 독립으로 이어지는 인도 현대사의 중심에 있었다. 결혼 직후 인도에 도착한 소바는 가족과 함께 당시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돼 있던 자와할랄 네루의 면회를 갔다. 그때 눈물을 흘리던 소바를 보고 자와할랄은 나중에 쓴 편지를 통해 부드럽게 훈계했다. “네루 가문은 남들 앞에서 울지 않는다. 우리는 의연함을 지킨다.”

소바는 외교관으로서 미국 주재 인도대사를 역임한 뒤 인도 주지사로 일하던 남편 곁에 머물렀다. 그러나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이 결정된 뒤 수도 델리는 난민으로 넘쳐났다. 파키스탄에서 쫓겨난 힌두교도, 파키스탄행 기차를 탄 무슬림들 사이에는 살인적 분노가 가득했다. 소바는 가족이 모두 함께 기차에 타도록 돕는 일을 맡고 있었다. 한번은 펀자브주를 지나던 기차의 탑승객 모두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홀로코스트 피해간 유대인

소바는 현장으로 나가 적극적으로 무슬림 여성들을 보호했다. 서펀자브에서 쏟아져 들어오던 힌두교, 시크교 여성 난민이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고용운동도 펼쳤다. 여성 난민에게 자수와 뜨개질을 가르쳤고, 이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파는 상점을 열어 여기서 생긴 수익금을 난민 복지에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소바는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과 가까워졌다. 소바는 운전사가 모는 차를 탈 때면 언제나 앞 조수석에 탔고, 남편 네루가 주지사로 부임한 지역에선 동네 시장을 찾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계급의식이 공고한 인도에서 ‘고귀한 여성’ 소바의 행보는 파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소바가 인도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헝가리에 있던 소바의 유대인 가족과 친지들은 홀로코스트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독일인 가정부 덕에 목숨을 건졌고, 군인이던 오빠는 체코슬로바키아까지 헤엄쳐 가 몸을 피했다. 소바의 많은 친구들이 사라졌다. 소식을 듣게 된 이들은 대부분 러시아인에게 성폭행을 당하거나 독일인들 손에 죽었다. 1949년 어머니와 함께 헝가리를 방문한 아들 아속 네루는 “어머니는 친구들을 만나러 매일 나갔고 울면서 돌아왔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소바는 평생 인도인으로 살았지만 홀로코스트를 비켜간 유대인이라는 죄책감과 정체성을 숨질 때까지 간직했다. 90대에 접어들어 소바는 역사학자 마틴 길버트에게 유대인 박해에 대해 읽을 만한 역사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까지도 길버트는 소바를 인도인으로 알고 있었다. 이후 길버트는 소바를 위해 직접 유대인의 역사에 대해 여러 차례 편지를 써주었다. 편지들은 나중에 ‘포리 숙모에게 보내는 편지: 유대인 5천 년 역사와 그들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소바는 길버트에게 미국 주재 인도대사인 남편과 미국에 머무르던 시절, 환영 연회에서 만난 독일대사와 악수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소바는 독재자 인디라 간디에게 고언을 건넨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자와할랄 네루의 딸인 간디는 아버지 뒤를 이어 총리가 됐지만 아버지와 반대의 길을 갔다. 1975년 간디는 부정선거로 피선거권을 박탈당하자 인도 헌정 사상 처음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간디의 사촌이자 친구였던 소바는 이에 대해 ‘너무 많이 나갔다’며 맞섰다. 또 산아제한 정책이라는 명분으로 강제로 정관수술을 당한 빈민 남성들의 목록을 만들어 간디에게 들이밀었다. 남편 네루는 “부인이 조심성이 없었고 자신보다 인디라 간디와 친밀한 관계였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마지막까지 세상을 궁금해한 사람

미국에 머무를 때 사귄 친구들과 우정은 말년까지 이어졌다. 소바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가까웠다. 그가 101살이 됐을 때 투자자 조지 소로스는 직접 찬디가르로 찾아와 생일을 축하했다. 소바는 100살을 넘긴 뒤에도 방문자들에게 ‘세상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새로운 게 무엇인지’를 물었고 민주주의, 인도의 성장, 신기술 등에 대해 이야기하길 즐겼다.

4월30일 108살의 나이로 숨진 소바는 세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유대인 여성이었고, 동시에 가장 영민한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파키스탄 분리(1947년), 간디의 암살(1948년) 등 인도 현대사의 혼란 속에서 네루 가문과 인도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었다.

김여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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