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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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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중의 한 사람, 함딘 사바히

존엄당 사바히, 아쉽게 이집트 대선 결선 진출 실패했지만 선전
노동자 권리, 세속주의, 아랍 단결 외치는 좌파 나세르주의 부활
등록 2012-06-15 01:15 수정 2020-05-02 19:26

지난 5월23∼24일 이틀간 이집트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지난해 타흐리르 광장에 쏠린 세계인의 이목이 다시 한번 이집트로 향했다. 다들 아랍 혁명의 중간 결과가 이집트에서 어떤 차기 권력으로 모습을 드러낼지 숨죽여 지켜보았다.
후보들 중에서 특히 서방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암르 무사였다. 오랫동안 외교관으로 활동했고 아랍연맹 사무총장을 지낸 그는 미국과 유럽의 엘리트들이 보기에 가장 무난한 후보였다. 무소속이라는 점에서 군부를 비롯한 옛 지배층과 혁명 민심을 중재할 적임자로 보이기도 했다. 여론조사에서도 무사는 여러 후보들 중 단연 앞서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짐작과는 달랐던 이집트 대선 결과
무사를 뒤쫓는 후보로는 압델 모네임 아불 포투가 거론됐다. 그 역시 무소속이었다. 다만 본래 당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무슬림형제단의 주요 지도자였다. 그러나 대선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무슬림형제단의 초기 방침을 무시하고 독자적 행보를 벌였다는 이유로 조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는 온건 이슬람주의자 이미지를 무기로, 이슬람주의 지지자들과 혁명 청년 등 다양한 집단을 자신의 지지자로 규합하려 했다.
많은 서방 관측통은 이집트 대선이 무사 대 아불 포투의 구도로 진행될 것으로 전망했다. 어쩌면 그러길 바란 것인지 모른다. 둘 다 서구 자유주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라 아랍 혁명이 단순한 대의민주제 복원으로 일단락되는 것을 보장해줄 카드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여론조사 결과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예측이 무엇보다 무슬림형제단의 조직력과, 이에 못지않은 무바라크 잔당들의 영향력을 얕보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무슬림형제단의 대중정당인 자유정의당은 애초의 방침을 바꿔 자체 후보를 내기로 했다. 당의장인 무함마드 무르시가 자유정의당이 최종 선택한 후보였다. 무르시 후보는 선거운동 초반에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막판이 되자 놀라운 속도로 지지율을 높여갔다. 몇 달 전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한 자유정의당의 저력이 대선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됐다. 실제로 개표가 시작되자 무르시 후보는 일찌감치 1위 자리를 굳혔다. 결국 576만 표, 24.78%를 얻어 무르시가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하지만 또 다른 예상치 못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혁명의 와중에 무바라크 정권의 마지막 총리를 지낸 무소속 아흐마드 샤피끄 후보가 2위로 치고 나왔다. 샤피끄는 전 정권 참여 이력 때문에 한때 선관위로부터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겨우 이의 신청이 받아들여져 후보로 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가 결선투표에 진출하리라고 예측한 이는 많지 않았다. 결과는 달랐다. 샤피끄 후보는 550만 표(23.66%)를 얻어 당당히 6월16∼17일 결선투표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집트 정치 ‘전문가’들의 수모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개표 과정에서 샤피끄 후보와 2위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인 후보가 있었다. 애초에 양대 주자로 주목받은 아불 포투가 아닌 또 다른 후보였다. ‘좌파 나세르주의’를 표방하는 존엄당(아랍어로 ‘카라마’당)의 후보 함딘 사바히였다.

유럽 사민주의와 유사한 좌파 민족주의
사바히 후보도 애초 서방 언론으로부터 전혀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선거 전 막바지에 지지율을 급상승시켜 482만 표(20.72%)를 얻어 3위를 기록했다. 그만큼 서방세계는, 혁명 발발 직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아랍 민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바히 후보는 카이로 같은 대도시, 즉 2011년 혁명 중심지에서 높은 득표율을 보였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는 아불 포투 후보에게 몰릴 줄 알았던 혁명 참가자들의 지지가 사바히 후보 쪽으로 쏠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찌 보면, 이번 선거에서 혁명 민심의 대변자는 사바히였던 셈이다.
사실 존엄당과 사바히 말고도 혁명의 주역이라 할 만한 정치세력은 더 있다. 대선 전에 실시된 총선에서 의석을 확보한 정치세력들 중에는 ‘이집트블록’과 ‘혁명계속연합’이 여기에 해당한다. 240만 표(8.9%)를 얻어 총 508석 중 35석을 확보한 이집트블록은 세속파 자유주의 정당들의 결집체로, 사회민주당과 또 다른 중도좌파정당 국민진보연합당 등이 참여하고 있다. 74만 표(2.8%)를 얻어 9석을 획득한 혁명계속연합은 혁명을 주도한 좌파 성향 청년층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국민진보연합당 탈당파가 만든 사회주의대중연합당, 사회당, 청년혁명연합 등이 포함돼 있다.
대선 후보들 중에도 사바히 외에 다른 혁명 지도자가 있다. 무소속으로 나온 인권변호사 칼레드 알리다. 그럼에도 광범한 노동자, 빈농 그리고 청년층의 지지를 모은 것은 사바히 후보였다. 그 배경에는 사바히가 속한 이집트의 독특한 정치적 흐름, 좌파 나세르주의가 있다.
서방 제국주의와 투쟁하며 국민국가를 건설한 나라들을 보면, 독특한 좌파 민족주의 전통이 지금도 그 나라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은 각 나라에서 대체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도에 해당하는 중도좌파 위상을 점한다. 가령 터키에는 케말 아타튀르크로부터 비롯된 공화인민당의 케말주의가 있고, 인도에는 국민회의당이 대표하는 간디-네루 전통이 있다. 이집트의 나세르주의도 빼놓을 수 없는 사례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잘 알려졌다시피, 1952년 불과 34살의 나이에 군사혁명을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집트에 공화국을 출범시킨 풍운아였다. 이후 그는 1970년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이집트뿐만 아니라 국제질서를 격동시켰다. 영국과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던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해 신식민주의 질서를 청산했고, 이 과정에서 이들 나라 및 이스라엘과 전쟁도 불사했다. 또한 아랍권 전체를 하나의 연방으로 통합하자는 범아랍주의를 표방하며 실제로 시리아와 함께 연방을 건설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의 네루,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가나의 은크루마 등과 함께 비동맹운동을 출범시켜 미국·소련 중심의 세계질서에 균열을 냈다. 나세르는 반세기 전 ‘아랍의 우고 차베스’였다.

팔레스타인과 연대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나세르는 이집트 내에서는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를 강조하며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했다. 이슬람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정교분리 원칙을 명확히 했고, 이 과정에서 무슬림형제단을 탄압했다. 나세르는 만년에 접어들어 자신의 이런 통치 기조를 ‘아랍 사회주의’라 표현했다. 이후 이집트에서는 나세르가 국내외 정치에서 시도한 이상을 아랍 사회주의 혹은 ‘나세르주의’라 통칭하게 되었다.
1970년 나세르가 돌연 사망한 뒤에도 권력은 계속 그의 군사혁명 동지들이 독점했다. 안와르 사다트와 호스니 무바라크 모두 그의 옛 동지들이었다. 그러나 마치 멕시코의 장기집권당 제도혁명당이 멕시코 혁명 이념의 계승자를 자임하면서도 실제로는 좌파 민족주의 기조를 헌신짝처럼 내다버린 것처럼, 나세르의 후계자들도 나세르 노선은 내팽개치고 그의 철권통치만 이어받았다. 신자유주의 물결에 이집트 사회를 ‘개방’했고, 미국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과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었다.
좌파 나세르주의는 이런 역사적 배신에 맞서며 시작됐다. 나세르의 이상을 깃발 삼아 포스트-나세르 체제에 저항하는 흐름이 ‘좌파 나세르주의’라 불리며 이집트 사회에서 좌파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좌파 나세르주의의 발전 과정이 곧 사바히 후보의 인생 역정이었다.
사다트 정부가 한창 나세르 노선의 폐기를 추진하던 1977년, 카이로대학 총학생회장이던 사바히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반사다트 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그는 민주나세르주의당과 지금의 존엄당을 결성하며 사다트-무바라크 체제에 끈질기게 맞섰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구속과 투옥을 반복해야 했고, 심지어 2000년 의원에 당선된 뒤에도 감옥 신세를 져야 했다. 이런 그였기에 지난해 반무바라크 시위가 시작되자 즉각 혁명 대오에 동참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이번 대선에서 사바히의 슬로건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지지를 염두에 둔 구호였다. 사바히 후보의 공약도 국가자본주의 체제로의 복귀와 최저임금제 도입, 사회복지 강화 등을 골자로 하는 경제 개혁이 핵심이었다. ‘타흐리르’(‘해방’이라는 뜻으로, 2011년 혁명의 상징이 된 카이로 중심 광장의 이름)라는 명칭의 강력한 부유세를 주장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또한 이슬람주의자들과는 달리 정교분리의 세속주의를 고수하며 무슬림과 콥트기독교도 사이의 연대를 강조했다.
세속주의를 주장하는 점에서 사바히 후보가 적어도 무슬림형제단에 비해 서방세계에 가깝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미국의 중동 정책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사바히와 존엄당은 자유정의당보다 더 강경한 태도다. 사바히의 마지막 감옥행은 2003년 이라크전쟁에 대한 반대투쟁 때문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 기간 중에는 직접 가자에 체류하며 팔레스타인 민중과의 연대를 시위하기도 했다. 나세르 범아랍주의의 충실한 계승은 미국·유럽의 엘리트들에게는 어쩌면 이슬람주의보다 더 위험한 것일 수 있다. 더 이상 아랍의 저항을 ‘서구 계몽주의 대 이슬람 근본주의’ 식의 구도 속에 가둬둘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집트 세속 좌파의 지구촌 신고식
물론 사바히 후보와 그 지지자들은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이는 패배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집트 밖 세상에 이집트 세속 좌파의 존재와 그 잠재력을 알리는 첫 신고식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혁명의 주역들은 자신을 실체화할 힘을 지녔고, 그 힘은 이집트 역사에 뿌리내리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당장 6월로 다가온 이슬람주의와 군부 잔당 사이의 답답한 양자택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혁명의 앞길이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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