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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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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주의가 아닌 생태사회주의로!

[장석준의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프랑스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며 빠르게 성장하는 정치세력 좌파당
생산지상주의 극복 위한 테제 채택하며 새로운 행동 낳는 좌파 본령
등록 2013-05-05 06:56 수정 2020-05-02 19:27

허니문 기간임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지지율이 그리 높지 않다. 그렇다고 박 대통령의 위안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사회당(PS) 후보로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나와 당선된 프랑수아 올랑드가 그 사람이다. 그의 지지율은 지난 3월 30% 아래로 추락하더니 가장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는 25%까지 나왔다.
사회당 정부에 실망, 당원 수 증가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요즘 유럽 형편에서 보더라도 기록적으로 낮은 지지율이다. 경기침체는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는데 사회당 정부는 별다른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탓이다. 경제위기 속에서 17년 만의 ‘좌파’ 대통령에 대한 기대로 올랑드를 지지하고 총선에서도 사회당에 표를 몰아준 지지자들로서는 참으로 실망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요즘 두각을 보이는 또 다른 좌파 정당이 있다. 좌파당(PG)이다. 지난해 대선에서 프랑스 안팎에 큰 인상을 남긴 장뤼크 멜랑숑 후보가 이 당 소속이다. 멜랑숑은 ‘좌파전선’(FG) 후보로 많이 알려졌는데, 좌파전선은 좌파당, 공산당(PCF) 등이 결성한 연합 정당이다. 멜랑숑 후보는 한때 지지율이 15%를 넘나들었고, 최종 득표율도 10%가 넘었다(11.05%). 1970년대 프랑스 공산당의 전성기가 끝난 이후 사회당 왼쪽의 대선 후보가 얻은 최고 득표율이었다.
사실 대선 이후 좌파당의 정치적 행진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선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멜랑숑은 일부러 극우파 국민전선의 여성 대표 마린 르펜의 지역구 출마를 선언했다. 1차 투표에서 좌파 후보들 중 최대 득표자가 된 뒤 결선에서 르펜을 물리치겠다는 게 그의 노림수였다. 하지만 막상 1차 투표에서 그의 득표율은 사회당 후보보다 낮은 21.46%에 그쳤다. 멜랑숑은 결선 진출을 포기하고 사회당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결국 결선에서 르펜을 낙선시키기는 했지만, 영광은 멜랑숑의 몫이 아니었다.
현재 좌파전선의 전체 의석수는 하원 총 577석 중 10석에 불과하다. 그중 다수는 공산당 소속이다. 비록 공산당이 몰락했다고는 해도, 노동자 밀집 지역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좌파당보다 많은 당선자를 낸 것이다. 아무튼 대선의 ‘멜랑숑 바람’을 생각하면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다. 소선거구제(비록 결선투표제가 있기는 하지만)인 상황에서 사회당과 선거 연합을 맺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는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의석수와는 상관없이 좌파당은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고 빠르게 성장하는 정치세력이다. 대선 이후 당원 수는 꾸준히 늘어 드디어 1만2천 명이 되었다. 우선 사회당 정부에 실망한 많은 이들이 첫 번째 대안으로 좌파당을 찾고 있으며, 정반대 편에서는 좌파당과 비슷한 시기에 창당한 반자본주의신당(NPA)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도 이 당의 문을 두드린다.
본래 창당 당시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반자본주의신당 쪽이었다. 이 당의 모태는 프랑스의 유서 깊은 트로츠키주의 조직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LCR)이다. 이 조직이 2002년과 2007년 대선에 낸 젊은 후보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상당한 지지(5% 선)를 얻자 이들은 새 대중정당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2008년에 창당한 것이 반자본주의신당이다. 이 당의 등장은 당의 얼굴 브장스노의 인기에 힘입어 세계인의 이목을 끌었다.
공산당과의 연합으로 대선 흥행
그에 비하면 같은 해에 창당한 좌파당은 상대적으로 세간의 관심권에서 비껴나 있었다. 2008년 사회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으레 그렇듯이 당내 여러 분파들은 각자 입장문서(Motions)를 작성해 대의원들의 지지를 구했다. 그런데 당내 좌파는 19%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이는 전년도 사회당 대통령 후보 세골렌 루아얄의 ‘제3의 길’ 노선이 당을 장악해가는 증거로 보였다. 그러자 좌파 일부가 탈당을 결행했다. 리오넬 조스팽 내각 시절(1997∼2002)에 직업교육 담당 장관을 맡은 적 있는 멜랑숑이 그중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인사였다. 이들 탈당파가 독일 좌파당을 모델로 삼아 출범시킨 게 지금의 좌파당이다.
동갑내기 두 좌파 정당, 좌파당과 반자본주의신당의 운명을 가른 것은 연합전선 방침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좌파당은 당세가 미약한 대신 사회당 왼쪽 정치세력들의 광범위한 연합전선을 결성해 사회당과 경쟁하려고 했다. 연합 상대는 공산당과 반자본주의신당이었다. 공산당은 좌파당의 제안을 받아들인 반면, 반자본주의신당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반자본주의신당은 사회당뿐만 아니라 공산당, 좌파당과도 선을 긋고 독자적인 활동에 주력했다. 그럴수록 이 당은 점점 더 대중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그래서 창당 때의 기대와 달리 당세가 계속 위축됐다. 이에 반해 좌파당과 공산당의 연합은 탄력을 받았다. 200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자 2010년 지방선거에도 공동 대응했고, 마침내 ‘좌파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대선에 뛰어들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가 바로 멜랑숑 바람이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반자본주의신당 내부에 격렬한 논쟁을 낳았다. 논쟁 과정에서 일부는 탈당해 독자 조직인 ‘통일좌파’를 결성한 뒤 좌파전선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들은 공산당 등에서 갈라져나온 다른 소수 정파들과 함께 좌파전선 안에서 제3의 축을 형성하고 있다. 더불어 주목할 만한 것은,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국제금융과세연대(ATTAC)의 주요 활동가들이 좌파전선의 지지 대오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좌파전선의 구심은 역시 좌파당이다. 지난 3월 말 좌파당은 제3차 당대회를 열었다. 이번 전당대회는 좌파당과 좌파전선의 향후 활동 방향을 결정한 문서들을 채택해 주목받았다. 그중에서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생태사회주의에 대한 18개 테제’였다. 이 문서는 좌파당이 그야말로 야심차게 준비한 것이었다. 좌파당은 지난해 12월 제1차 생태사회주의자 대회를 열어 이 문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초안 작성 과정에 당 바깥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반자본주의신당의 이론가로 유명한 미셸 뢰비와 ATTAC의 역전 노장 수전 조지가 대표적 인물이다.
핵발전의 단계적 철폐 못박아
‘생태사회주의 테제’는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생산(지상)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창한다. 끝없는 성장 추구는 자원 고갈과 기후변화를 초래해 인간 해방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무한 성장을 전제하는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사회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물론 생태사회주의도 전통적 사회주의처럼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나 부의 재분배를 중요시한다. 하지만 과거에 이 과제들이 생산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면, 이제 이것들은 생태적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사전 조치다. 생태적 계획의 목표는 낭비 없이 대중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하는 것이다.
또한 ‘생태사회주의 테제’는 핵발전의 단계적 철폐를 못박는다. 지난 대선에서 좌파전선이 제출한 공약집(국내에도 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은 ‘핵발전 철폐’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아마 좌파전선의 다른 한 축인 공산당이 핵발전소 폐지에 미온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좌파당은 이번 당대회에서 ‘생태사회주의 테제’를 채택해 탈핵 입장을 확고히 했다. 좌파당의 선명한 입장 덕분인지, 녹색당이 사회당 정부에 참여한 것에 실망한 많은 녹색당원들이 좌파당에 합류하고 있다. 멜랑숑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마르틴 빌라르만 해도 본래는 녹색당 하원의원이던 여성운동가다.
좌파당이 채택한 또 다른 문서 ‘대담해지자!’는 생태사회주의 지향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전략을 제시한다. 그 핵심은 시민혁명이다. 프랑스 대중정치에 ‘혁명’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하는 순간이다. ‘대담해지자!’가 내놓은 시민혁명의 목표는 새 헌법을 제정해 제6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다. 제6공화국에서는 대통령제 대신 내각제를 채택해야 하고 전면적 비례대표제 도입, 남녀동수제 등 대의제를 혁신해야 하며, 대중의 직접 참여 통로를 확대해야 한다. 또한 이제 정치 영역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기업 내부의 민주화를 당면 과제로 추진해야 한다. ‘대담해지자!’는 그 주요 참고 사례로, 금융위기 이후 아이슬란드의 국민투표와 제헌의회, 아랍 혁명,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 등을 든다.
‘생태사회주의’ ‘시민혁명’ ‘제6공화국’ 등 좌파당이 내놓은 이 일련의 비전은 사회당 정부의 무대책이 점점 더 인내 불능 수준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프랑스 사회에 인상적인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좌파당의 앞길이 장밋빛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좌파전선을 이끌고 확대한다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과제가 아니다.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균열이 있다. 좌파전선 내 제3세력이나 좌파당이 사회당의 우경화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는 데 비해, 공산당은 여전히 사회당을 견인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쪽이다. 이런 입장 차이는 각급 선거 결선투표에서 사회당과 선거 연합을 할지 말지의 논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높다. 좌파당 안에서도 이미 창당 주역 중 한 사람인 마르크 돌레즈(전 사회당 하원의원) 등이 사회당에 대한 멜랑숑의 ‘좌경적’ 입장과 ‘생태주의 편향’을 비판하며 탈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좌파당에는 미래가 있다
하지만 이런 도전에도 불구하고 좌파당에는 미래가 있다. 무엇보다 오랜만에 좌파의 본령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비전을 과감히 던지고 그래서 전에 없던 논란과 고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일 말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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