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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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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연방공화국이 아니면 야만일 뿐이다

2005년 대선에서 잠재력 보여준 PNI 등 팔레스타인 좌파 정당 발전 가능성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중에게도 테러와 전쟁 아닌 유일한 대안
등록 2013-07-03 06:05 수정 2020-05-02 19:27

아랍의 봄이 진행되던 와중에도 팔레스타 인은 봄기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지 금도 그렇다. 이스라엘의 봉쇄가 계속될 뿐 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도 좀처럼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 에서는 2006년부터 지금까지 웨스트뱅크의 자치정부와 가자의 하마스 정부가 서로 자 신이 유일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며 대치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오는 8월에 두 정 부를 하나의 팔레스타인 정부로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이스라엘과 영구 전쟁 고집하는 하마스
한데 이 모처럼의 합의에 다시 먹구름이 끼고 있다. 취임 2주밖에 안 된 라미 함달라 자치정부 총리가 지난 6월23일 전격 사퇴하 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무드 아바스 대통 령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통합 정부 수립을 책임지기로 한 함달라 총리의 사퇴는 통합 과정이 쉽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이런 혼란의 주된 책임은 팔레스타인의 양대 정치세력, 즉 파타와 하마스에 있다. 2006년 총선 이후 팔레스타인 의회인 입법 평의회는 이 두 정당이 지배하고 있다. 그중 파타(‘승리’라는 뜻)는 과거 임시정부 역할을 하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이끌어 온 정치세력이다. 2006년 총선 전까지는 자 치정부에서도 제1당이자 여당이었다. 고 야 세르 아라파트가 이 당의 역사적 지도자였 으며 세속적 좌파 민족주의가 그 이념이다.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에 참관 자격으로 가 입해 있기도 하다.
파타는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을 위한 무 장투쟁을 가장 먼저 시작한 유서 깊은 정치 조직이다. 하지만 오슬로협정 이후부터는 이 스라엘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는 투항 세 력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자치정부 내에서 장기간 권력을 독점하다보니 각종 부패 사건 에 연루돼 있기도 하다. 이 당 소속인 아바 스 대통령의 무능과 독단도 문제다. 그래서 파타의 인기는 계속 추락하고 있다.
파타에 대한 환멸에 반비례해 급성장한 또 다른 거대 정당이 ‘이슬람저항운동’, 즉 하마스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하마스는 이슬 람 근본주의 정당이다. 이들은 본래 이집트 의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내 동조 세력으로 출발했다. 팔 레스타인에 정교일치의 수니파 이슬람 공화 국을 건설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파타와 달리 하마스는 이스라엘과의 영구 전쟁을 고집한다. 이스라엘에 하마스가 절멸의 대 상인 것처럼, 하마스에 이스라엘은 공존이 불가능한 불구대천의 원수다.
사실 현재 입법평의회의 최대 정당은 하마 스다. 총 132석 중 하마스가 74석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내각책 임제를 취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총리를 지명 한다. 아바스 대통령은 2006년 총선으로 하 마스가 원내 제1당이 되었음에도 이들이 주 도하는 내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이 내분 상태를 즐기며 계속 부추겼다.
팔레스타인 노동운동에 뿌리 둔 인민당
급기야 2007년 6월 아바스 대통령은 ‘제3 의 길’이라는 소수 정당에 속한 미국 유학파 경제학자 살람 파야드를 수반으로 한 중립내 각을 구성했다. 애초에는 하마스도 이 안을 지지했다. 하지만 파야드는 총리직 수락 조건 으로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할 것 을 요구했고, 하마스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하마스는 가자지구에 웨스트뱅크의 자치정 부와는 분리된 독자 정부를 세웠다. 반면 웨 스트뱅크에서는 파타와 이스라엘의 지지를 받으며 파야드 내각이 출범했다. 이 준내전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국내 언론의 단편적인 보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팔레스타인 정치의 이면이 있다. 파타와 하마스 외에도 팔레스타인 인민을 대변하는 또 다른 정당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좌파 정당들이다.
그중 가장 유서 깊은 것이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이하 인민전선)이다. 1953년에 처음 출범한 인민전선은 PLO 내에서 파타와 자웅을 겨루며 무장투쟁의 한 축을 맡아왔다. 인민전선의 이념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나세르식 아랍 사회주의의 독특한 혼합이다. 인민전선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이들에게 팔레스타인 혁명은 통일 아랍 공화국을 건설할 중동 전체 혁명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요르단이나 모로코 같은 아랍 세계 내부의 왕정에 대해서도 적대적이다.
1969년 인민전선에서 마오주의 세력이 떨어져나와 새로 만든 또 다른 좌파 정당이 있다.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이하 민주전선)이다. 민주전선은 PLO 내에서 파타, 인민전선에 이어 제3당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민주전선의 이념 역시 마르크스레닌주의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해방에 대한 관점이 인민전선과는 다르다. 이들은 아랍인과 유대인 두 민족이 공존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 한다.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비타협적 투쟁으로 맞서지만, 유대인들과의 공존에 대해서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좀더 충실한 시각을 갖고 있다.
민주전선과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또 다른 좌파 정당이 ‘팔레스타인인민당’(이하 인민당)이다. 이 당은 팔레스타인 공산당의 후신이다. 현실사회주의권이 무너진 1991년에 공산당이 당명을 개정한 것이다. 인민당은 인민전선과 민주전선에 비해 당세는 약하지만, 팔레스타인 노동운동에 뿌리를 둔 거의 유일한 정치세력이라는 점이 돋보인다.
좌파 정당들이 이렇게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음에도 현재 입법평의회 내에서 이들의 의석은 얼마 되지 않는다. 2006년 총선에서 인민전선은 4.25%를 득표했고, 민주전선과 인민당의 선거 연합은 2.92%만을 얻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한 이념적 동요도 한 요인이다. 오슬로협정과 그 산물인 자치정부 출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우왕좌왕한 탓도 있었다. 가령 인민전선은 최근까지도 자치정부 선거를 보이콧해왔다. 이것은 그만큼 파타나 하마스의 주도권을 강화해주는 결과를 낳았다.
PNI, 2005년 대선에서 19.48% 얻어 2위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인민전선과 민주전선 모두 웨스트뱅크나 가자지구보다는 해외의 팔레스타인 난민 정착촌에 더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다. 민주전선은 시리아와 레바논 정착촌에서는 강력한 제1당이지만,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에는 거의 조직 기반이 없다. 인민전선은 그나마 자치 구역 안에 거점을 갖고 있지만, 웨스트뱅크나 가자가 아니라 예루살렘 인근 라말라 지역에 한정돼 있다. 또한 인민전선이나 민주전선 모두 팔레스타인인들 중에서도 무슬림보다는 기독교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힘들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민전선과 민주전선은 1987년부터 시작된 인티파다(웨스트뱅크와 가자에서 벌어진 팔레스타인 민중의 대중투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좌파 정당 중에서는 그나마 인민당의 전신인 공산당이 오랜 노동운동 경험 덕분에 대중투쟁 지도부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념·정치적 공백 상황이 하마스와 이슬람 근본주의가 급성장하게 된 주된 배경이었다.
그러나 좌파가 파타-하마스의 답답한 양극 구도를 깰 역동적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2005년 대통령 선거 결과가 미약하나마 그 가능성의 한 자락을 보여줬다. 이 선거에서 ‘팔레스타인민족이니셔티브’(PNI)의 대통령 후보인 무스타파 바르구티(의사)가 19.48%를 얻어, 62.52%의 지지를 얻은 아바스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비록 아바스와의 표차는 컸지만, 그래도 20%에 가까운 지지율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바르구티 후보가 두 차례나 이스라엘 점령군에 체포되는 등 온갖 수난을 겪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더욱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2002년 PNI를 창당한 이들은 바르구티를 비롯해 대개 인민당 탈당파다. 이 조직은 파타도 하마스도 아닌 민주적인 제3세력의 건설을 지향한다. 예루살렘 동부를 수도로 한 완전한 독립 팔레스타인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게 이 조직의 목표다.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로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을 한정한 오슬로협정의 한계를 과감히 뛰어넘겠다는 것이다. 또한 PNI는 자치정부 내의 독재와 부패를 일소할 민주개혁을 약속한다. 현재의 이중 권력 상황에 대해서는 하마스까지 포함한 거국 비상 정부 구성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또한 인티파다를 ‘군사화’(하마스의 방식)하는 데 반대한다. 대신 평화적 수단에 의해 대중투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오리엔탈리즘 비판으로 유명한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 석학 고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지한 당이 다름 아니라 PNI였다. 자치 구역 내 사회운동 세력도 이 당을 지지한다. 현재 입법평의회에서 PNI의 의석은 단지 두 석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난 대선에서 이 당이 보여준 대중정치의 잠재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희망의 징조임이 분명하다.
시온주의도 이슬람 근본주의도 아닌
물론 아직은 여린 싹이기는 하다. 좌파 정당들의 분열과 정체 상태는 이런 싹이 자라나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장애물도 극복 못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2005년 대선에서 인민전선은 바르구티 후보를 지지하며 선거운동에 힘을 보탰다. 이런 사례는 좌파 연합전선이 등장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팔레스타인 좌파가 제시하는 비전, 즉 과거 같은 테러리즘이나 전쟁이 아닌 대중의 힘에 의한 해방, 시온주의도 이슬람 근본주의도 아닌 민주적 사회적 연방공화국의 이상은 이제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중에게도 유일한 이성적 대안이다. 아니면 야만뿐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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