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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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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장석준의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신자유주의 추종하다 파산한 아이슬란드 경제 올해 2.4% 성장 1인당 33만달러 외채 상환 요구 막아낸 시민들의 ‘주방도구 혁명’
등록 2012-12-07 14:28 수정 2020-05-02 19:27

“북유럽에서 혁명이 진행 중이다.” 이 말에 대개 ‘제정신이냐’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혁명은 라틴아메리카 같은 곳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게 지난 수십 년간 세계인의 상식이었다. 게다가 북유럽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복지 천국 아닌가. 그런 곳에서 무슨 혁명인가. 신문이나 TV에서도 ‘그리스가 난리다’ ‘베네수엘라가 시끄럽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북유럽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보도는 없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북유럽의 작은 섬나라, 간혹 화산 폭발 소식으로나 이름을 알리는 나라, 지구 위 모든 국가 중 가장 북쪽에 있는 나라, 아이슬란드가 그 무대다.
GDP 9배 부채 갚겠다고 머리 조아려
아이슬란드는 인구가 30만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최근까지도 국민 대다수는 어업으로 먹고살았다. 그런 나라가 2000년대 들어 1인당 국내총생산(GDP) 수치에서 다른 북유럽 국가들을 제치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7년에는 7만달러까지 치솟았다. 마법의 도깨비방망이는 은행업이었다.
시작은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아이슬란드는 유럽경제지역(EEA·유럽연합(EU) 국가들에 몇몇 EU 미가입국을 더한 자유무역 지대)에 가입했다. 이와 함께 이 나라는 금융 규제를 풀고 공기업을 사유화하기 시작했다. 밀턴 프리드먼 추종자인 우파 독립당 소속 다비드 오드손 총리가 자유화 조처를 총지휘했다. 어느덧 정·관계는 총리와 마찬가지로 시장지상주의 경제학으로 무장한 영미 유학파들이 점령했다. 이런 변화의 산물로 글리트니르·카우프싱·란즈방키 3대 은행이 부상했다.
이 은행들은 미친 듯이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덩치를 키웠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길거리에서 ‘아이스세이브’(icesave)라는 예금상품 홍보전을 펼치며 무차별적으로 돈을 끌어왔다. 덩달아 아이슬란드의 GDP 수치가 올라갔지만, 부채 증가 규모는 그것보다 더 극적이었다. 2003년에는 부채가 GDP의 2배를 넘어섰고 2007년에는 9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독립당이 주도하던 정부는 아이슬란드 경제는 건전하다며 자화자찬만 늘어놓았고, 이제 중앙은행 총재 자리를 꿰찬 오드손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2008년 월스트리트로부터 심판의 나팔 소리가 울려퍼졌다. 1년 전까지도 건전하다던 아이슬란드의 3대 은행이 일제히 파산했다. 이 은행들의 부도로 1인당 GDP 세계 5위의 부자 나라 국민은 졸지에 한 사람당 약 33만달러(약 3억5천만원)의 외채를 갚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스도 위기에 빠졌다고는 하지만 부채가 GDP의 2배를 넘지는 않는다. 그런데 아이슬란드는 무려 9배다. 망한 걸로 따지면 아이슬란드가 더 심하게 망했다. 그렇다면 지금쯤 이 나라에서도 구제금융 협상 난항이니 긴축재정으로 인한 사회 위기니 하는 기사가 넘쳐나야 한다. 한데 정반대다. 북유럽의 영웅 서사시는 지중해의 난파선 신화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슬란드 은행들이 무너지자 이들의 투기 게임에 참여한 영국·네덜란드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국·네덜란드 재무장관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향후 15년간 35조유로를 갚아나가기로 방침을 세웠다. 그대로 놔뒀다면 이후 그리스에서 벌어진 것처럼 아이슬란드에서도 국민이 금융세력의 도박 빚을 짊어져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인들은 이를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추위가 한창 절정이던 2009년 1월, 성난 시민 수만 명이 의회를 에워싸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인구 30만여 명의 나라에서 이것은 예사롭지 않은 광경이었다. 최루탄이 등장하고 연행자가 속출했지만 시위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결국 독립당 소속 게이르 하르데 총리가 이끌던 정부는 의회 해산과 총선을 약속했다. 이것만으로도 일종의 준혁명이었다. 시민들이 냄비와 프라이팬을 들고 나와 시위를 벌였다고 해서 이 사건에는 ‘주방도구 혁명’이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거리의 혁명이 선거 혁명으로
총선은 2009년 4월에 실시됐다. 그간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던 독립당은 제2당으로 밀려났다. 제1당으로 올라서서 내각을 구성하게 된 것은 중도좌파 사회민주연합이었다. 사실 사회민주연합도 따지고 보면 위기의 공범이었다. 이들도 하르데 총리의 연립내각에 참여했다. 하지만 독립당에 비해서는 주범이 아니라 종범으로 보였다. 또한 연정에 적극 참여한 간부들이 물러나고 레즈비언인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가 당의 얼굴로 나서서 세대 교체의 인상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사회민주연합은 29.79%를 얻어 총 63석 중 20석을 획득했다.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연정 파트너가 필요했다. 위기 주범인 독립당과의 좌우 연정은 이제 불가능했다. 이때 새로운 파트너로 떠오른 것이 좌파녹색운동(VG)이었다. 이 당은 지난 선거에서 14.3%를 얻었는데, 이번에는 21.7%로 지지를 크게 늘렸다(12석 획득). 한편 1월 시위에 참여한 이들이 직접 결성한 정치운동체 ‘시민운동’도 4명의 당선자를 냈다. 결국 시민운동의 지지를 받으며 시귀르다르도티르 총리의 사회민주연합-좌파녹색운동 연립정부, 즉 ‘좌파-좌파’ 연정이 들어섰다.
독립당-사회민주연합 연정에서 사회민주연합-좌파녹색운동 연정으로 바뀐 것은 거리의 혁명이 선거 혁명으로 이어졌다는 의미를 지닌다. 좌파녹색운동은 민주적 사회주의, 생태주의, 여성주의를 당의 이념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에 반대한다. 이 당의 뿌리는 아이슬란드 공산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슬란드 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 흐름에서 갈라져나온 다른 좌파 세력들과 ‘민중연합’이라는 정당 연합을 결성해 활동했는데, 1968년 민중연합이 아예 하나의 정당으로 출범하게 된다. 민중연합은 EU·NATO 문제 등에서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견해를 달리하며 아이슬란드 좌파의 한 축을 이뤘다. 1996년 대통령에 처음 당선된 이후 네 차례나 재선을 거듭한 올라퓌르 라그나르 그림손 현 대통령이 바로 민중연합 출신이다.
민중연합이 사라지고 좌파녹색운동이 등장한 것은 1999년의 좌파 대통합 바람 때문이었다. 이때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비롯해 모든 좌파를 통합한 거대 정당이 필요하다고 해서 등장한 게 지금의 사회민주연합이다. 민중연합도 상당수 이 흐름에 빨려들어 갔다. 하지만 통합에 반대하며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다시 만든 정당이 좌파녹색운동이다. 독립당-사회민주연합 연정의 거품 호황기에 이 당은 좌파 야당으로서 착실히 성장해갔다. 그리고 2009년 시민 혁명 물결 속에서 거리의 요구를 대변할 세력으로 정권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북반구의 쿠바냐, 아이티냐
새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파산한 3대 은행은 위기의 시작과 함께 곧바로 국유화됐는데, 아직도 이 상태로 남아 있다. 자산의 110%를 넘는 가계부채는 모두 탕감됐다. 3대 은행의 경영 책임자들에 대해서는 수사가 시작됐다. 2010년 6월 대법원은 해외 통화에 연동돼 도입된 외채는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덕분에 아이슬란드 국민은 (적어도 국내 법 테두리에서는) 외채 상환 부담에서 해방됐다. 결과적으로 GDP의 13%에 달하는 채무가 면제됐다. 아이슬란드 경제는 성장세로 돌아섰고 올해는 성장률 2.4%를 기록했다. 유로존 성장률이 0.2%인 상황에서 이것은 경이적이기까지 한 결과다. 이 수치의 비교만으로도 그리스 국민은 채권국들에 할 말이 많다.
새 정부가 모든 것을 알아서 잘 처리한 것은 아니다. 결정적 순간에는 대중이 다시 거리로 나서야 했다. 우선 시귀르다르도티르 총리와 사회민주연합이 문제였다. 신임 총리와 그 소속 당은 위기 이후에도 유로존 가입 방침을 고집했다. 게다가 좌파녹색운동 소속 스테인그리무르 시그푸손 재무장관이 2009년 말 영국·네덜란드와의 협상 결과라고 내놓은 것은 지금 그리스 국민을 옥죄고 있는 구제금융·긴축정책 합의와 별로 다른 게 아니었다. ‘아이스세이브’ 피해 보상을 위해 2023년까지 아이슬란드 GDP의 절반을 영국·네덜란드 재무부에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당장 좌파녹색운동 안에서 반발이 일었다. 좌파녹색운동 의원 5명이 협상안 비준에 반대표를 던졌다. 이번에도 역시 겨울이었지만, 2009년 1월과 마찬가지로 다시 시민들이 의회를 포위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림손 대통령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협상안 비준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이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국제사회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가 북반구의 쿠바가 될 거라고들 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가 이걸 받아들이면 북반구의 아이티가 되는 거요.” 이게 그림손 대통령의 대답이었다.
2010년 3월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는 ‘협상안 반대’가 93%였다. ‘찬성’은 2%도 안 됐다. 심지어 집권 연정 각료들도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장 국제통화기금(IMF)이 이제 구제금융은 없다고 엄포를 놓았고 영국·네덜란드 정부는 국제 사법기구에 제소하겠다고 협박했지만, 이런 으름장 말고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이슬란드의 국제 채무는 지금도 무기한 상환 연기 상태다.
21세기 지구적 좌회전의 출발 될까
이런 소강 상태에서 아이슬란드 경제는 되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아이슬란드에서는 제헌의회가 구성돼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시민들과의 열린 토론 방식으로 새 헌법안을 마련하고 있다. 새 헌법이 반드시 다뤄야 할 의제 중에는 정치적 결정 과정에 대중의 참여를 활성화할 방안과 천연자원의 공적 소유 및 활용 방안이 포함돼 있다.
이것이 지금 북반구의 한구석에서 벌어지는 21세기형 혁명의 모습이다. 최근 역사학자들은 아이슬란드의 화산 폭발이 프랑스대혁명의 원인 중 하나였다는 학설을 내놓았는데, 어쩌면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이 인과관계가 200여 년 뒤 더 거대한 규모로 세계사에서 반복됐다는 평가를 내릴지 모르겠다. 이 작은 섬의 조용한 혁명이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전 지구적 대전환의 첫 출발이었다고 말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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