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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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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위기의 중요한 변곡점


프랑스 대선과 그리스 총선 계기 ‘유럽 활용·변형론’ 유로존 위기 해법 부상
위기 해결 위한 재정 확대 실패하면 ‘유럽 탈출·해체론’ 대안으로 힘 실릴 수도
등록 2012-05-05 06:28 수정 2020-05-02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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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총선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4월 초,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채 금리가 급등했다. 잠시 진정되는 듯 보이던 유로존의 재정위기가 다시 표면 위로 화염을 내뿜었다. 이 와중에 유로존의 열쇠를 쥔 두 나라가 현재 선거 중이다.

독일과 함께 유럽연합(EU)의 기둥 격인 프랑스에서는 4월22일 치러진 대선 1차 투표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후보와 니콜라 사르코지 현 대통령이 결선 진출 자격을 획득했다. 5월6일 결선투표가 실시될 예정인데, 모든 여론조사 결과는 올랑드의 낙승을 예고하고 있다. ‘위기의 진원지’ 중 하나인 그리스에서는 차기 총선이 5월6일로 확정돼 선거 국면이 시작됐다. 여론조사 추이에 따르면, 그리스 공산당·민주좌파·급진좌파연합이 총 151석의 의석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적극 개입으로 초국 자본 통제해야”

공교롭게도 두 나라의 차기 정권 향배가 모두 5월6일에 결정된다. 따라서 이날은 유로존 위기의 전개에도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결과에 따라 향후 몇십 년간 세계인의 운명에 큰 그림자를 드리울 흐름이 시작된 날로 세계사에 기록될지 모른다. 한데 과연 정권 교체만으로 재정위기가 해결될 조짐을 보일 수 있을까? 좌파가 집권한다고 해서 기존 우파 정권들과 다른 획기적인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까? 과연 유럽 좌파들은 그런 대안을 준비하고 있는가?

기존 재정위기 해법은 이미 교과서적 틀을 갖추고 있다. 혹자는 이를 ‘긴축, 자유화 그리고 사유화의 삼위일체’라 이름 붙이기도 한다. 그 뼈대는 유로존 내 중심부 국가들이 위기 국가들에 구제금융을 제공하고(사실은 그 명목으로 자국 채권은행들을 구제하고), 그 담보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즉 공공부문 사유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에 요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위기를 해결하려는 좌파의 대안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유로존을 유지하며 EU의 제도적 틀을 활용해 위기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다(‘유럽 활용·변형론’). 다른 하나는 재정위기 국가들(대개 유로존 내 주변부 국가들)을 통화 연합이라는 올가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유로존에서 탈퇴하고, 나아가 통화 연합 자체를 해체하자는 제안이다(‘유럽 탈출·해체론’).

유럽 활용·변형론부터 살펴보자. 이 견해의 대표적 논자로는 영국의 스튜어트 홀랜드를 들 수 있다. 홀랜드는 신자유주의의 태동기인 1970년대에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주체인 초국적 자본을 제어할 좌파적 구조개혁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앞으로는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국가가 전략적 국유화와 계획 협약 등 더욱 적극적인 경제 개입을 통해 초국적 자본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 노동당은 홀랜드의 제안을 선거 공약에 담았지만 집권 이후 진지하게 추진하지는 않았다. 그 뒤 역사는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초국적 자본의 승리로 기록됐다. 이런 실패를 맛본 뒤 홀랜드는 영국 한 나라가 아닌 EU 전체로 관심을 확장했다. 일국적 구조개혁 대안이 실패했다면 이제는 EU라는 다국적 틀을 통해 초국적 자본을 제압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후 그는 자크 들로르 EU 집행위원장의 자문역을 맡아 끊임없이 유럽 차원의 불황 극복책을 제안했다.

두 종류 EU 채권 발행 통해 가능

이번에 그가 그리스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 아테네대학 교수와 함께 제시한 대안도 이런 일관된 노력의 연장선 위에 있다. 홀랜드는 현 유럽의 재정위기는 오직 미국 뉴딜식 해법으로만 진정시킬 수 있다고 진단한다. 대공황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는 지금의 EU처럼 주정부의 투자 지출을 강제로 줄이거나 과세 부담을 늘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연방정부가 책임지는 재무부 채권을 발행해, 그 자금으로 각 주의 투자를 늘리고 경기를 활성화했다. 홀랜드는 EU도 이런 대응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공황 때 미 연방정부가 수행한 역할을, EU 기구들이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두 종류의 EU 채권 발행을 통해 가능하다. 하나는 ‘연합채권’(Union Bonds)이다. 연합채권은 시장 매매용이 아니라, 회원국 채무를 EU 차원으로 이전하기 위한 수단이다. 유럽안정성장협정(SGP)이 정한 국가 채무 한도인 국내총생산(GDP) 60% 수준을 넘어선 국채를 모두 연합채권으로 전환해 유럽중앙은행(ECB)이나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으로 이전하자는 것이다. 연합채권의 이자율은 기존 채권에 비해 저리로 책정되고, 각국 채무의 SGP 초과분을 EU 기구로 이전함으로써 국제 신용평가회사들이 EU 회원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이 불가능해질 것이란 얘기다.

또 다른 수단은 ‘유로채권’(Eurobonds)이다. 유로채권도 ECB 같은 EU 기구가 발행한다. 이는 시장 매매용으로, 중국 등 신흥국 중앙은행이나 국부 펀드가 구매할 것을 염두에 두었다. EU는 채권 발행 수익을 모두 전 유럽적인 경기부양책에 투입한다. 홀랜드는 특히 보건, 교육, 도시 재생, 환경, 녹색기술, 중소기업 지원 등에 집중 투자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중국 등 신흥국들은 유로화 붕괴를 막아 국제 통화 질서의 다원성을 유지할 수 있으니 좋고(달리 말하면 달러 패권을 약화할 수 있어서 좋고), 유럽 국가들은 현 위기를 극복할 ‘제2의 마셜 플랜’을 추진할 수 있어서 좋다. 따라서 실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게 홀랜드의 논지다.

이런 전 유럽적 재정 확대를 통한 위기 해결 처방은 EU 무대에서 실제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다. 차기 프랑스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은 올랑드 후보도 지지자 중 한 명이다. 프랑스 사회당의 노장 미셸 로카르 등 유럽 중도좌파의 거물들이 공동 서명해 지난해 7월 발표한 정책 제안에도 홀랜드 안과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EU 주류 인사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벨기에의 브뤼셀 소재 싱크탱크 ‘브뤼젤 재단’도 비슷한 제안을 내놓은 바 있다.

채무불이행 선언도 대안으로

하지만 ‘결정적 장애물’이 있다. 바로 독일이다. 지금까지 독일 정부는 자국 납세자들의 추가 부담, 자국 국제 수지 변동을 동반한 어떤 정책도 거부해왔다. 이것이 이제까지 앙겔라 메르켈 정부가 프랑스의 협력을 얻어 ‘긴축, 자유화 그리고 사유화의 삼위일체’ 공식을 재정위기 국가들에 강요한 근거이기도 했다. 그래서 활용·변형론자들은 독일 정부를 우회한 제도 설계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유럽 좌파 일각에서 유럽 탈출·해체론이 점점 더 관심을 끌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위기의 현장인 그리스 등지에서 더욱 그렇다. 실제 이런 대안을 가장 앞장서서, 가장 정연하게 발전시키는 것은 코스타스 라파비차스 영국 런던대학 교수 같은 그리스 출신 경제학자들이다.

이들은 재정위기 국가 정부(물론 좌파 집권을 전제로)가 능동적으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뒤 국가 채무에 대한 국제적 감사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감사에는 노동계와 시민사회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실제로 그리스 국채의 막대한 부분은 채권은행들이 그리스가 SGP의 국가 채무 한도를 넘어섰음을 알면서도 대출한 ‘시장 실패’의 소산이다. 또한 그리스의 국내법 조항을 어기며 발행된 채권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상당한 규모의 채무 탕감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반드시 동반돼야 할 것이 유로존 탈피다. 라파비차스 등은 그리스가 유로화를 버리고 자국 통화인 드라크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제적 선례도 존재한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대 미국 달러화에 페소화를 고정했다가, 21세기 벽두에 치명적인 경제위기에 빠졌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좌파 페론주의’ 정부는 페소화의 통화주권을 회복한 뒤, 평가절하와 외채 재조정을 통해 경제를 회복시켰다. 탈피·해체론자들은 그리스 역시 자국 통화로 돌아가서 평가절하를 단행해 채무 부담을 줄이고 국내 산업을 육성해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과정에서 일정 기간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 어떤 혼란도 현재 EU와 IMF가 그리스에 강요하는 긴축정책보다는 오래가지 않고 그 고통 역시 덜할 것이란 게 탈피·해체론자들의 주장이다. 혼란을 최소화하고 역사 발전의 계기로 반전시키기 위해 위기국 정부는 채무불이행 선언, 유로존 탈퇴와 함께 노동 중심의 구조개혁을 병행해야 한다. 또한 은행을 국유화하고 제조업을 집중 육성하며, 기업활동 및 경제정책 결정에 대한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참여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를 비롯한 위기국들의 이런 선택은 현 유럽 통화 연합의 해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유럽 내 새로운 사회세력 관계에 바탕을 두고 국제 연대 노력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돼야 한다는 얘기다. 이미 그리스에선 이런 해법이 ‘아르헨티나 모델’로 불리며 급진좌파 내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그리스 공산당이 유로존 탈퇴를 당론으로 확정했고, 급진좌파연합 내에서도 일부 분파가 이를 지지하고 있다.

활용·변형론 원활한 작동 여부 변수

활용·변형론이든 탈출·해체론이든 모두 이미 몇몇 명망가나 학자의 주장을 넘어서 현실정치의 의제로 올라와 있는 것이다. 아직은 둘 모두에 시간은 열려 있다. 하지만 새 프랑스 정부에서 활용·변형 시나리오의 원활한 작동 여부가 탈출·해체론이 최후의 대안으로 채택되는 것을 결정한다는 함수관계는 존재한다. 이 점에서 좀더 다급한 쪽은 활용·변형론이고, 아마 그 여유 시간은 1~2년쯤 될 것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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