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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데’의 잃어버린 낭만에 대하여

좌절한 ‘봄데’ 팬, 작전이 난무하는 현대 야구에서 단순하게 치고 달리던 로이스터의 롯데를 향수하다
등록 2011-04-29 18:51 수정 2020-05-03 04:26

양승호.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감독. 요즘 부산에서 가장 외로운 서울 남자. 세계에서 가장 극성스러운 팬을 가진 야구팀의 신임 감독인 그가 데뷔 시즌 첫 15게임에서 거둔 성적은 4승2무9패. 4월20일 기준으로 꼴찌에 반게임 앞선 7위. 3년 연속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킨 외국인 감독을 쫓아내고 ‘우승을 위해’ 영입한 감독임을 고려한다면, 부산에서 유니폼 입고서는 택시 잡기 어려운 성적표다. 133게임 중 아직 채 20게임도 하지 않은 상황, 로이스터 시절에도 시즌 초반 나락으로 떨어진 뒤 중반부터 치고 올라간 경험이 있어 낙담하기는 이르다고 달래보려 해도 불길한 징후들이 보인다. 다시 암흑기로 돌아가진 않을까? 선수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으며, 팬들은 슬슬 뚜껑이 열리기 시작했고, 곧 사직야구장 그물에 러닝셔츠를 입은 ‘사직아재’들이 여름철 매미처럼 매달릴 기세다.

야구팬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던 게임

자연히 로이스터 야구에 대한 팬들의 향수가 시작되었다. 롯데 자이언츠의 수많은 팬페이지에는 로이스터의 귀환을 외치는 목소리가 가득하고, 로이스터 퇴출을 주장하며 폭언을 일삼던 팬들마저 그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사랑이 끝나봐야 사랑이었음을 안다. 요즘 사직아재들의 마음이 그렇다. 그래, 사실 우리는 로이스터와 연애했던 것이다.

한겨레 박미향 기자

한겨레 박미향 기자

로이스터 야구는 무엇이었을까. 로이스터 자이언츠의 야구는 좀 신기했다. 여전히 롯데는 이상하게 이기거나 ‘띨띨하게’ 지기도 했지만 승패를 떠나 처음 느껴보는 재미와 흥분이 있었다. 번트를 대지 않으며 아웃카운트 하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기다리거나 골라내지 않고 초구부터 ‘개잡는 스윙’으로 두려움 없이 휘두르고 달리는 그 유명한 ‘두려워하지 마라’(No Fear)는 정신, 1회초에 6점을 내주고 1회말에 7점을 뽑아버리는 파괴력, 10 대 0으로 지고 있어도 “아직 우리에겐 3개의 아웃카운트가 남아 있다”고 소리치던 야구. 말 그대로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야구라는 스포츠가 주던 가장 원초적인 흥분을 자극해준 게임. 오늘 지면 내일 바로 복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스포츠, 그래서 오늘 지더라도 ‘잘 지는 게’ 중요했던, 지고 있을 때 1루까지 설렁설렁 뛰는 선수를 용서하지 않던 감독. 로이스터는 야구감독이 ‘디렉터’(Director) 가 아니라 ‘매니저’(Manager)임을 우리에게 알려준, 롯데가 경험한 거의 최초의 ‘관리자’였다. 온갖 작전과 짜내기, 분석과 데이터가 난무하는 현대 야구에서 믿고 맡기며 그저 단순하게 치고 달리는 것으로 이겨내는 로이스터의 야구엔 순진한 감동이 있었고, 작전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 직장인은 로이스터의 고전 야구에서 낭만을 느꼈다.

병역 문제로 전성기를 날리고 돌아온 2루수, 혼자서만 상대팀과 싸워야 했던 4번 타자, 아직도 야구하나 싶던 중간계투 요원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던 실수투성이의 20대 주전포수, 강공 사인에 쭈뼛거리며 “진짜 쳐도 돼요?”라는 표정으로 벤치를 쳐다보던 후보선수. 로이스터는 이 겁 많고 어수룩하고 상처받은 선수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발견하게 했고, 그들과 함께 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장렬하게 전사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스토리. 패배감에 젖어 자멸하는 오합지졸 사이에 재림한 메시아, 젊은 롯데 팬에게 로이스터는 의 안 감독이었고, 의 키팅 선생이었다.

로이스터가 롯데에 이식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멘털’(mental)이었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 자신과 동료와 감독을 믿고 야구하는 것. 그는 야구라는 멘털 게임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고, 롯데라는 팀을 정확히 진단해낸 명의였다. 감독 교체설이 나오던 2010년 말, 롯데 선수들은 “감독님과 계속 같이 야구하고 싶어서 이기겠다”고 했고, 팬들은 모금운동을 해 감독의 연임을 지지하는 신문광고를 내고 외야 스탠드에 대형 걸개그림을 걸었다. 선수와 팬들이 감독을 지키려고 힘을 모았던 시절, 로이스터 자이언츠의 시절엔 그런 낭만이 있었다. 한국 야구의 오래된 편견과 맞서 싸우며 꼴찌팀을 개조한 흑인 감독과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유명한 지역사회의 팬들이 이루어낸 정서적 연대. 어쩌면 롯데 팬이 즐긴 것은 롯데의 가을야구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팬을 두려워하는 선수들, “뒤집혀 불타는 구단 버스에서 제 발로 기어나와보지 않은 선수는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없다”고 외치던 폭도 같은 팬들, 그런 팬을 피해다니는 감독에게 익숙해져 있던 꼴찌팀이 만들어내던 풍경이 선수, 팬, 감독이 서로 신뢰하는 훈훈한 풍경으로 변화하는 연대감. 지난 3년간 롯데 팬들이 느낀 행복의 종류는 그런 것이었다.

천천히 그러나 자신감 있게

어쩌면 롯데 구단과 양승호 감독은 중요한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프로야구 30년 역사 동안 단 2번밖에 우승해보지 못한 팀한테, 올 한 해 우승하지 못한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올 시즌 초 롯데 팬들의 분노는 롯데가 자주 지기 때문이 아니다. ‘나쁘게’ 지기 때문이다. 초반 부진에 조급해진 감독은 실수한 선수를 ‘질책성’ 교체하며 더그아웃을 뻘쭘하게 만들었다. 로이스터의 질책성 교체는 실수한 선수가 아니라 두려워하는 선수에 한정되었다. 연패가 이어지자 초조해진 감독은 신뢰하는 어린 투수를 혹사시키기 시작했다. 로이스터는 다음 10게임을, 다가오는 여름을, 더 멀리는 선수 개인의 미래를 생각하며 선수의 몸을 보호했다.

4월12일 롯데-두산전, 1점 뒤지고 있는 9회 마지막 공격. 무사 1·2루에 타석엔 강민호. 양승호의 선택은 보내기번트였다. 로이스터라면 선택은 강공이었다. 확률은 낮더라도, 지금 이 순간 팬들이 바라는 것은, 그리고 팀에 필요한 것은 팀의 젊은 스타 포수가 때려내는 역전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양승호의 번트 사인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로이스터의 강공 사인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야구에서 최고의 전략은 자신감이다. 고개 숙이지 않고 눈치 보지 않으며 평범한 땅볼에 1루까지 죽을 힘으로 뛰는 멘털이다. 팬들을 감동시키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양승호 감독은 조금 천천히 갈 필요가 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낭만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늦지 않은 시점에 양 감독이 부산에서 공짜 택시를 타길 바란다.

‘사직아재’ 김준 저자 twitter.com/delalo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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