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그가 다닌 학교에 야구부만 있었어도…


해외 원정 나가서도 대중교통 이용하는 비인기 종목 선수들의 비애
실업팀 적고 연봉도 볼품없지만, 묵묵히 제 길 가는 선수들에게 관심을
등록 2013-06-19 05:06 수정 2020-05-02 19:27

“전세기요? 우리에겐 꿈이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한 비인기 종목 선수의 자조 섞인 목소리다. 대한축구협회가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6차전 레바논 원정을 떠나는 대표팀을 위해 전세기를 띄운다고 하니 부러운 눈치다. 축구협회는 서울에서 7·8차전을 치러야 하는 대표팀 선수들의 피로를 덜어주려고 귀국편 전세기를 편성했다. 월드컵 본선 진출이 걸린 문제이니 축구협회로서는 올인할 수밖에 없다. 연간 예산 1천억원 안팎을 주무르는 부자 축구협회니까 가능한 얘기다. 반면 비인기 종목에서는 실업의 간판이거나 태극마크를 달아도 이동 문제마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스포츠 종목 간 명과 암이다.
지하철 타고 간 아이스하키 선수단
지난 3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12~2013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대회. 일본팀과 경기를 한 한국의 실업팀과 동행했다. 따로 대표팀을 구성하지는 않지만 한·중·일 세 나라의 최고 선수들이 대결한다. 그런데 숙소인 비즈니스호텔에서 경기장으로 가는 선수들에게 전세버스는 없었다. 선수들은 많은 장비를 개별적으로 들고 멘 채 지하철로 향했다. 버스를 대절하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는 구단의 판단으로, 선수들은 지하철을 타고 경기장을 오갔다. 연습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칫 퇴근 시간과 맞물리면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서서 가기 일쑤였다. 똑같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선수단을 신기한 듯 쳐다보던 일본 승객들의 시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선수들은 “익숙해서 괜찮다”며 불평 한마디 없었다. 국가대표로 세계대회에 참가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래된 유니폼을 챙겨입고, 헬멧은 색깔이 제각각이다. 다행히 올해 초 새로 들어선 협회 집행부가 바짝 신경을 쓰며 장비를 완전히 개선했다. 이전에는 체류비를 줄이려고 시차 적응이나 현지 연습도 없이 경기에 투입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선수들은 “다른 건 다 참겠는데, 몸이 안 풀린 상황에서 경기해야 하는 건 힘이 든다”고 했다.
원시적 에너지와 순수가 넘치는 럭비로 눈을 돌리면 더 심하다. 5월 2013 HSBC 아시아 5개국 럭비대회에 참가 중이던 한국 15인제 럭비 대표팀을 만나려고 인천 송도의 훈련장을 찾은 날, 훈련 장면 사진을 찍는 기자에게 대표팀 코치진이 단체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선수 책자를 만들어야 해서요.” 사진 전문가나 작가를 불러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렇게까지 형편이 여유롭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실제 대표팀 감독의 인터뷰용 사진을 요청해도 럭비협회의 답변은 “찍어놓은 게 없다”가 전부였다. HSBC 아시아 5개국 럭비대회가 15인제로는 아시아 최고의 국가 대항전이지만, 협회 누리집에는 대회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와 감독의 자세한 소개나 제대로 된 사진 등은 없었다. 대표팀 관계자는 “국제대회인데 영어 소개조차 없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아쉬워했다.
소외될수록 의지는 더 강해진다. 15인제 럭비 대표팀은 지난 5월18일에 끝난 HSBC 아시아 5개국 럭비대회 디비전1 A그룹에서 2위를 차지했다. 1위 일본은 외국인 선수 5명을 포함시켰지만, 한국 대표팀은 토종 선수로만 경기를 해서 2위를 이뤄냈다. 아이스하키 대표팀도 지난 4월 세계대회에서 강호 헝가리를 30년 만에 물리치는 등 투혼을 발휘해 세계 17~22권 팀으로 구성된 디비전1 A그룹에 잔류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끼리 똘똘 뭉쳐’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일본 럭비 실업팀 산요에서 뛰는 유영남은 럭비 베스트 15에 뽑혀 일본 팬이 더 많다. 아이스하키도 한류 바람이 느껴진다. 실업팀 한라의 조민호나 상무의 김현중은 일본에 팬클럽이 있다. 이들의 경기를 보려고 한국을 찾기도 한다. 일본에서 만난 한 팬은 “선수들과 직접 대화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공부한 게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번졌다”고 했다.
비인기 종목의 선수들은 가슴속에 응어리가 있다. 안정적으로 선수 생활을 할 실업팀이 적고, 연봉은 볼품이 없다. 많이 받는 선수도 1억원이 안 된다. 그렇다고 이들이 하루아침에 프로야구·프로축구의 스타 선수들처럼 후한 대접을 받을 수도 없다. 어쩌면 운명적으로 특정 종목의 선수를 하게 됐고, 묵묵히 제 길을 가는 이들에게 조금의 관심이 큰 힘이 될 수도 있다. “야구에만 올인하지 말고, 아무리 인기 없는 종목도 중계하고 홍보해야 재미를 알게 되는 것 아니냐”는 한 원로 럭비 선수의 한탄에 얼굴이 붉어진다.
프로야구 선수가 벼슬인가
지난 3월 대만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때 한국 야구대표팀 선수들은 값비싼 팀복을 단체로 맞췄다. 팬들의 관심은 높았고, 고액의 중계권료를 지급한 종합편성채널은 생방송으로 경기를 실어날랐다. 인터넷이 안 돼 불편하다고 불평하는 선수들의 말에 한국야구위원회는 호텔 쪽과 논의해 초고속 인터넷을 따로 깔았다. 버스로 1시간을 가서 시범경기를 한다고 했을 때 투덜댄 선수들도 있고, 결국 8강에도 오르지 못한 채 돌아왔다. 지하철을 타고 경기장에 가고, 텅 빈 관중석에서 경기하는 아이스하키나 럭비 선수들한테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남지은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