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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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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의 진가, 빌럼 왕세자의 사랑…

월드컵 경기장 밖에서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들… 문어는 춤추고 부부젤라는 노래했다
등록 2010-07-21 08:07 수정 2020-05-02 19:26
나이지리아전에서 선수들을 독려하는 아르헨티나 마라도나 감독. 연합뉴스

나이지리아전에서 선수들을 독려하는 아르헨티나 마라도나 감독. 연합뉴스

월드컵은 끝났다. 그런데 또 월드컵 이야기를? 4년에 한 번이니, 용서하시라. 월드컵 경기가 아니라 외적인 상황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해 월드컵과 축구의 의미를 음미해보자.

 

감독들의 희로애락

지난 7월1일, 프랑스 대표팀의 레몽 도메네크 감독이 프랑스 국회의 문화교육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했다. 그는 시종일관 프랑스 축구가 몰락한 원인을 ‘언론 탓’으로 돌렸다. 이에 의원들은 “매우 실망스럽고 신뢰할 수 없다”고 촌평했다. 한편 조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프랑스 정부가 축구협회에 정치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프랑스의 도메네크를 필두로 브라질의 둥가, 그리스의 레하겔, 잉글랜드의 카펠로 같은 명장들이 몰락한 반면 디에고 마라도나는 8강전에서 독일에 0-4로 대패했음에도 자국 내의 인기와 명예는 오히려 치솟았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마라도나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바로 그 아르헨티나에 우리 대표팀이 1-4로 대패했는데, 나는 그 원인 가운데 하나로 마라도나와 아르헨티나의 현대사에 관한 무지를 들고 싶다. 그들의 사랑과 슬픔과 예술과 혼란과 광기와 카니발과 저항은 축구와 뗄 수 없는 역사를 가졌으며, 그 정점에 마라도나가 있다.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의 는 우리가 얼마나 이 나라의 역사와 마라도나에 무지한지를 일깨워준다. 우리의 무지한 스포츠 저널리즘은 경기 직전까지도 아르헨티나가 괴짜이자 신경질적이며 약물쟁이인 감독이 기술만 뛰어난 스타들을 통솔하지 못해 마치 오합지졸이 된 것처럼 보도했다. 그들에게 우리는 ‘알리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대패했다.

우루과이와의 경기를 관람하는 네덜란드 빌럼 왕세자 부부. <br>REUTERS/ KAI PFAFFENBACH

우루과이와의 경기를 관람하는 네덜란드 빌럼 왕세자 부부.
REUTERS/ KAI PFAFFENBACH

환호하는 귀빈들

우승국 스페인의 델보스케 감독은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짝다리를 짚으며 자신만만하게 귀빈들과 악수를 했다. 귀빈은 그 자신이었다. 오히려 시상을 하는 블라터 회장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한편 이번 대회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은 귀빈석의 주인공은 네덜란드의 빌럼 왕세자 부처. 준결승전에서 네덜란드가 우루과이 골문을 세 번이나 뒤흔들 때, 카메라는 귀빈석을 비추었고 화면에는 펄쩍펄쩍 뛰면서 환호하는 빌럼 왕세자 부처가 보였다. 네덜란드 오란예(영어로 오렌지) 왕가를 잇게 될 빌럼 왕세자는 지난 1999년 4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벌어진 유럽왕족연회에서 막시마 소레기에타를 만나 사랑을 키웠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막시마가 아르헨티나의 평민 출신이자 가톨릭교도였던 것이다. 칼뱅주의 신교도인 오란예 왕실로서는 껄끄러운 신붓감이었다. 복잡한 유럽 왕실의 계보에 따르면 이 네덜란드 왕세자는 영국 왕위 계승자이기도 한데 가톨릭교도인 막시마와 결혼함으로써 그 권리를 스스로 버렸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시마의 아버지가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시절, 무려 3만여 명을 학살한 독재정권의 농업부 장관이었다. 네덜란드는 삽시간에 논쟁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더욱이 네덜란드 현행법에 따르면 왕세자의 결혼은 양원과 내각의 동의가 필요하다. 결국 의회는 합리적이면서도 절묘한 결정을 내렸다. 막시마의 부모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으며 이후 국가적인 행사에 막시마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이런 사연을 가진 빌럼 왕세자 부처는 네덜란드 국가 행사가 아니라 FIFA가 주관하는 준결승전에 초대를 받아 실로 오랜만에 기쁨의 순간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승리팀을 맞추는 문어로 유명해진 파울.

승리팀을 맞추는 문어로 유명해진 파울.

뜻밖의 예언자

펠레는 대회 개막을 앞두고 브라질과 스페인을 우승 후보로 꼽았지만 조별리그가 끝나갈 무렵에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 세 팀으로 압축했다. 펠레는 스페인이 16강전에서 포르투갈과 맞붙게 되자 슬쩍 한 발을 뺀 적 있다. 그리고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대결! 네덜란드 사람을 빼놓고는 대부분 스페인을 지목하는 상황이었으므로 ‘펠레의 저주’가 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반면 이번 대회 최고의 스타는 ‘문어’ 파울. 독일 오버하우젠의 해양박물관 소속인 이 예언자는 독일의 일곱 경기와 결승전을 포함해 모두 여덟 경기의 승리 팀을 정확히 맞혔다. 파울의 완벽한 예측은 오히려 축구의 예측 불가능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고 그 불가해함이 바로 축구의 ‘참맛’임을 웅변했다. 크고 작은 경기를 앞두고 수많은 데이터와 분석과 예측이 쏟아진다. 자국의 전력, 상대 전적, 키 플레이어, 포메이션 심지어 경기장의 해발고도와 잔디 상태까지 판단 요소가 된다. 하지만 일단 휘슬이 울리고 나면, 이 모든 데이터와 요소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축구는 데이터로 수렴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세계다. 그 누가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 ‘5경기 풀타임 출전, 15차례 유효슛, 72%의 패스 성공률 그리고 노골!’을 기록할 것이라고 예측했는가. 문어 파울은 축구의 예측 불가능성의 참맛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부부젤라를 부는 남아공 응원단. 한겨레 김진수 기자

부부젤라를 부는 남아공 응원단. 한겨레 김진수 기자

광고의 미학

어느 때보다 상업주의가 판을 친 2010 월드컵. FIFA는 남아공 정부와 조직위원회를 압박해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막대한 수익을 챙겼다. 국내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4년마다 새로운 응원가와 응원구호를 외워야 하는 지구상 유일한 응원 문화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중 최악은 KT의 광고. “골 넣으면 올레!”라고 외치자는 광고다. 글쎄, 아무리 광고지만 그 광고를 만든 사람도 이정수나 박주영이 골을 넣었을 때 ‘올레’ 대신 ‘으흐아흐흐아아아악’이라고 외쳤을 것이다. 반면 이영표를 주인공으로 한 외환은행 광고는 아름다웠다. “그는 한 골도 넣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골의 뒤에는 그가 있었다.” 이 내레이션과 함께 함박 웃는 이영표 선수가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올레!’다.

슬로바키아 골문으로 들어가는 자불라니. REUTERS/ DYLAN MARTINEZ

슬로바키아 골문으로 들어가는 자불라니. REUTERS/ DYLAN MARTINEZ

자불라니 vs 부부젤라

어떻게 스포츠과학이 4년 주기로 발전할 수 있는가. 냉혹한 비평가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의 공인구 ‘텔스타’ 이후로 축구공의 본질적인 패러다임 변화는 없었다고 말한다. 4년마다 스포츠과학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 전 지구적인 용품 시장이 일순간에 열릴 뿐. 물론 과학이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첨단의 축구화는 현대 축구의 화두인 ‘속도’에 대응하기 위해 점점 가벼워진다. 반면 공인구는 점점 다루기 어려워진다. 선수들은 부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회전과 강력한 슛을 시도한다. 의 저자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은 축구의 매력이란 “본질적으로 발의 허약함”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실수가 일어나고 따라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절대 예견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는 해도 자불라니는 너무 심했다. 과학이 실수투성이인 인간의 고유한 영역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

반면 부부젤라는 어떠했던가. 조별리그 초반에 이 소리에 짜증을 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16강 이후 결승전까지 부부젤라는 문어 파울과 더불어 이번 대회 최고의 아이콘이 되었다. 지든 이기든, 심지어 다른 나라 경기임에도 남아공 사람들은 쉬지 않고 부부젤라를 불어댔다. 때로는 그 소리가 일정한 리듬과 강약을 띠면서 울려퍼졌다. 나는 가족과 함께 동네 성당 마당에서 아르헨티나전을 보았다. 그런데 누군가 기계를 서툴게 작동하는 바람에 경기 초반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담당자가 뛰어가 콘솔의 볼륨을 높혔다. 부부젤라 소리가 서서히 커지면서 이윽고 성당 마당을 가득 채웠다. 그제야 비로소 월드컵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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