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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건물 보존 미묘한 메아리


남산 옛 중앙정보부 6국 철거 내년 6월 이후로 늦춰… 서울시장 선거 쟁점 떠오를 듯
등록 2009-11-26 06:32 수정 2020-05-02 19:25

올해 허물기로 돼 있던 서울 남산 옛 중앙정보부(중정) 건물이 그 생명을 시한부로 연장받았다. 서울시는 “균형발전본부 청사(옛 중정6국)를 올해 안에 철거할 계획이었으나 내년 6월 이후로 늦추기로 했다”고 지난 11월19일 밝혔다.

내년 6월까지 철거가 미뤄진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 끌려온 이들이 심하게 치도곤을 당하곤 했는데, 그 때문에 고기육(肉)자를 써 ‘육국’이라고도 불렸다. 군부독재 시절 학원사찰의 거점이던 이 건물에는 현재 서울시 균형발전본부가 입주해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내년 6월까지 철거가 미뤄진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 끌려온 이들이 심하게 치도곤을 당하곤 했는데, 그 때문에 고기육(肉)자를 써 ‘육국’이라고도 불렸다. 군부독재 시절 학원사찰의 거점이던 이 건물에는 현재 서울시 균형발전본부가 입주해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시는 지난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통해, 올해 서울시 균형발전본부 청사 철거를 시작으로 2011~2012년 소방재난본부와 교통방송 건물까지 철거해 공원과 지하 주차장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계획을 보면, 중정과 관련한 모든 ‘흔적’은 2015년까지 남산에서 사라지게 된다.

시민단체· 지적 뒤 나온 발표

이에 학계와 전문가 등은 시민단체 ‘역사를 여는 사람들 ㄱ’(이하 ‘ㄱ’)을 만들어 남산의 중정 건물 등을 보존하자는 운동을 펼쳐왔다. 역사 교육을 위한 박물관으로서의 보존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또한 774호 표지이야기776호 특집 기사를 통해 기존의 ‘유적’을 온전히 보듬은 평화공원으로 남산을 재편할 밑그림을 기사화한 뒤, 기획연재 ‘돌아온 산, 남산’을 통해 ‘ㄱ’과 공동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과의 인터뷰에서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를 보존한 독일을 비롯해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불행한 역사를 기념관으로 만든 사례는 해외에도 많다”며 “남산의 옛 안기부 청사를 평화와 인권의 기념관으로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물론 서울시는 지난 10월까지도 올해 안 철거 의사를 공공연히 밝혔다.

그러던 서울시가 방침을 바꿔 다음달부터 ‘남산 예장자락 재정비사업 타당성 조사 및 기본설계 용역’ 사업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내년 6월까지 계획된 이 조사로 모든 철거가 보류되며, 조사의 진척도나 결과에 따라 철거가 더 미뤄질 수도 있다.

“타당성 조사는 철거 이후 조성될 주차장의 수용 규모, 여러 시설들의 적절한 교통 흐름 예측 등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시 실무자는 설명한다. 특히 “균형발전본부 청사가 철거될 경우 신청사 입주 때까지 임대료를 내고 별도 건물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 등을 고려해 철거 시기를 늦춘다”고 강조한다.

명쾌하진 않다. 불과 10개월 전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 발표 당시, 기존 시설의 예상 임대비조차 계산하지 못했다면 더 비판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정이 추가됐다는 분석이 뒤따르는 이유다.

백현식 서울시 남산르네상스담당관은 “임대비 등의 문제로 철거 계획은 올 4월에도 한 차례 미뤄진 적이 있다”며 “이번 타당성 조사는 중정 건물을 철거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도 “용역 조사 기간에 각계 의견을 듣고 감안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8월부터 건물 보존 운동을 본격화해 온 ‘ㄱ’은 고무된 표정이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소설가 서해성씨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오세훈 시장이 내년 6월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부담을 가졌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후보들에 보존 공약 요구할 것”

‘ㄱ’은 현재 시민 모금을 진행 중이며, 옛 중정 건물 4곳을 직접 사들인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자연유산을 사들여 보관하는 내셔널 트러스트에 비견될 수 있는 역사 신탁(History Trust) 운동이다. 서해성씨는 “직접 구입한다기보다 공동 주인으로서 보존 비용, 사용료 등을 함께 나눈다는 개념으로 추진 중”이라며 ”건물 철거가 서울시장 선거 시기 이후로 미뤄진 만큼 차기 후보들에게 이 건물들의 보존을 공약으로 요구할 방침”이라고 말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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