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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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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디스토피아, 그래도 희망을 꿈꾼다


‘노동 OTL’ 1부를 읽고…
1970년대의 미싱이 전동 드라이버로 대체됐을 뿐, 여전히 일해도 빈곤한 역설 바꾸는 계기 되길
등록 2009-10-01 09:35 수정 2020-05-02 19:25
노동OTL

노동OTL

“사회학자의 꿈이지요.”

현장에서 한 달간 직접 일해본 뒤 기사를 쓰겠다는 의 ‘야심찬’ 기획에 대한 필자의 첫 대답이었다.

1년 단위로 연구성과를 평가하는 탓에 참여관찰은커녕 심층면접조차 어렵다. 한두 달만이라도 현장조사를 하고 싶은 간절함은, 제출해야 할 5~6개의 과제와 기타 관련 업무까지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주말·휴일·휴가까지 반납해야 하는 일상 앞에서 희미해진다. 필자만이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난 한 달이 운명이 아닌 오직 ‘실험’이어서 다행”이라는 첫 기사를 “이 글이 내 일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바꿔 읽으면서, 너무 힘들어 “‘기자인 게 들통 나라’ ‘단전돼라’ 애절하게 주문했다”는 기사가 1970~80년대의 노동 현실과 겹쳐지면서 ‘꿈’이라고 말한 것이 슬그머니 부끄럽다. 뭉크의 가 떠오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 그것에 밀착한 연구조차 하지 못하면서 ‘사회학자의 꿈’이라니. 필자 역시 매일 “악몽”이기를 바라며 사는 사람들의 일상에서 어느덧 멀어진 것인가.

내가 아니라 안도하며 느끼는 부끄러움
지난 9월9일 경기 안산의 안산역에서 노동자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곳에서 반월·시화공단행 버스로 갈아탄다. 노동자 10명 가운데 4~5명이 비정규직이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지난 9월9일 경기 안산의 안산역에서 노동자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곳에서 반월·시화공단행 버스로 갈아탄다. 노동자 10명 가운데 4~5명이 비정규직이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미국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에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전세계적인 산업구조 변화와 기술발전이 지식노동을 낳고 인간의 삶의 질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기술과 지식이 만개해 인간의 노동이 자율적이고 창조적으로 바뀐다는 새로운 르네상스의 비전은 달콤하다. 무조건 믿고 싶다.

하지만 10명 중 4~5명꼴로 비정규직인 한국 사회는, 탈산업사회가 시장에서 유리한 것만 인정하게 되어 결국 일자리를 잃는 많은 사람들을 방관할 것이라던 비관론의 손을 들어준다. 자본의 구미에 맞는 대로 노동시간과 고용형태가 바뀌어 기업은 새로운 교대제·분할근무·당번제·주말작업을 이용하고, 파트타임·임시계약·용역이 대세가 된다는 주장이 점괘처럼 들린다.

게다가 경제위기의 충격조차 ‘양극화’한 2008년의 경험은 또 다른 충격이다.

1997년 경제위기 때는 정규직과 유사한 상용 일자리가 가장 많이 줄어들고 뒤이어 일용직·임시직·자영업이 무너졌다. 모두가 고통을 나눠가진 것이다. 그러나 2008년 경제위기 때는 상용 일자리만 밤새 안녕하다. 남성보다는 여성 일자리가 수십 배 더 감소했고 청년층 일자리 역시 위태롭다. 지난 10년간 비정규직과 근로빈곤(working poor) 계층은 경제위기의 충격마저 온전히 겪고 있다.

정규직 노동에 익숙하고 성장이 곧 고용이자 복지이던 시기의 지식으로는 현상 해독조차 어렵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옛말일 뿐 ‘젊어서 비정규직으로 고생하면 죽어도 비정규직’이다. 속 천공(하늘)의 섬 라퓨타에 사는 사람과 라퓨타에서 버린 음식물로 연명하는 지상의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극이 한국에서는 불과 10여 년 만에 만들어졌다.

또한 통계수치가 외형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숫자에 가려진 노동과 삶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까지 알 수는 없다.

따라서 현상에 대한 이해와 원인 분석, 대안 모색을 위한 또 다른 접근이 필요하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현장에 밀착한 연구조사다. 그런 점에서 의 기획 기사는 때맞춘 출발이다. 그것이 연구자의 몫이어야 한다는 비판을 잠시 접는다면 말이다.

종사상 지위별 일자리 증감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종사상 지위별 일자리 증감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현장에 밀착한 연구조사 필요

이번 기사의 가장 큰 장점은 ‘바뀌었으나 바뀌지 않은’ 노동 현실을 공장 안의 일자리만이 아니라 공장 밖의 삶으로까지 넓혀 ‘일자리의 질’ 측면에서 보여준다는 점이다. 일자리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차원까지 포괄해 일자리의 질을 정의한 유럽연합 등의 국제기준에도 부합하다.

가령 “1970~80년대 공장 노동이 ‘여공’과 ‘미싱’”이고 “지금은 전동 드라이버”이겠으나 일자리의 질은 비슷하다. 보람도 사회적 자존감도 없고 일하는 동안 인간임을 잊어야 한다. 1분을 지각해도 30분치 시급을 공제하고 일자리 가격은 최저임금에 의해 결정된다. 반장의 눈치를 보느라 옆자리 동료에게 말 걸기가 어렵고 하루이틀 지나면 활발했던 사람조차 말을 잃는다. 과거 노동의 세계엔 앉아 일하는 미싱사와 서서 일하는 시다, 두 부류가 있었다면 현재 노동의 세계엔 “서서 일하는 저주받은 자와 앉아 일하는 복된 자” 두 부류만 있다. 과거 노동자들의 취미가 가리봉 시장 쇼핑과 술 먹기였다면 현재 노동자들에게는 PC방이 추가된다. 그래도 청춘 남녀들은 잔업이 끝나면 몸단장하고 눈을 빛내며 공장을 나선다.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 기숙사의 겨울 새벽 4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던 노동자의 자식들이 부족한 잠을 쪼개 미장원에 간다.

일부 일자리만의 현실일까? 조지 리처는 에서 상당수 일자리가 자율성과 창조성, 자존감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다양성을 제거한 동질성, 자율을 거세한 통제, 여기에 환경파괴, 비인간적 노동환경까지 경제적 효율성의 대가로 사회적 비효율성이 커진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만약 그렇다면 저임금 단순노동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노동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일괄 라인의 로봇 작업으로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성별 일자리 증감

성별 일자리 증감

또한 이 기사는 유토피아를 희망하면서도 디스토피아의 우려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1970~80년대 노동자들은 적어도 미래를 꿈꾸었다. 동생의 학비를 위해 진학을 포기한 누나, 하루 종일 거친 욕설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시다, 목에 낀 때를 벗기느라 삼겹살에 소주를 들이붓던 건설노동자 모두 잘살게 될 것이라고 희망했다. 50~60대 아주머니들이 당시의 노동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것은 노동이 수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노동자는 미래가 없다. 바로 옆자리의 어머니·아버지뻘 노동자의 현실이 자신의 미래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크다. “한번 빠진 수렁은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사회”이고 “빚-비정규직-빈곤노동의 악성 트라이앵글”에서 평생 쳇바퀴를 돌아야 할지 모른다. 날품노동과 정규직, 반장을 구별하는 옷 색깔은 평생을 구분하는 사회적 낙인일 수 있다. 노동빈곤이 사회적 빈곤인 현실에서 희망은 사치일지 모른다.

70~80년대 노동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이유

대안은 있는가? 지구인의 몸에서 튀어나온 외계인의 지배에 맞서는 것이 사람의 몫이듯, 경제에 휘둘리는 사회의 자기 보호운동이 인간의 역사를 만든다고 칼 폴라니는 웅변하지 않았는가. 대안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며 역사는 인간에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한다. 부족하더라도 ‘보호 없이 일자리 없고, 일자리에 차별 없다’는 정책 실현이 그것일 수 있다.

우선 실직 때 실업급여도 받지 못하는 35%의 취업자를 위해 제2의 사회 안정망을 만들어야 한다. 실직할 경우 빈곤가구가 될 확률이 52.9%인 것처럼 한국에서 실직은 곧 빈곤이다. 실직시의 생활보호와 직업훈련 대책을 사회보장에서 배제되는 800만 취업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이미 시작하고 있는 일이다. 자민당 정부 때 ‘생활안전 취직지원금’ 명목으로 고용보험을 받지 못하는 취업자들에게 1인당 6개월간 176만엔(약 2200만원)을 대부해줬다. 6개월 뒤 6개월 이상의 취업이 이뤄지면 거의 대부분을 상환 면제한다. 상환때도 금리 1.5%로 10년간 갚으면 된다. 노동금고라는 별도의 은행을 신설하고 보증도 필요 없어서 신용불량자가 될 여지가 매우 적다. 민주당 정부는 이 것도 안된다며 정부가 100% 지원하는 실업부조제도로 바꾸겠단다. 국제화의 이점 중 하나는 전세계적으로 실시되는 좋은 정책을 연구하고 검토해 손쉽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규·비정규 노조 가입률 변화

정규·비정규 노조 가입률 변화

다음으로 일자리의 질이 낮아 일해도 빈곤한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의 기준에 합의를 이끌어내고, 공공 부문 일자리부터 하루 8시간 노동에 사회보험, 퇴직금, 휴가 등은 필수이며 최소 120만원 이상의 월급여가 보장되는 일자리로 바꾸어야 한다. 1년 이상 계속 사용하는 일자리는 고용 보장이 원칙이어야 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공정 거래를 근절하고 간접 고용의 확대를 막아야 한다. 서울·경기 지역의 제조업 일자리는 파견업체를 통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업체에서 저 업체로 사람을 배달하고 인건비 따먹기가 기업의 이윤창출 원천인 것만은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는 한국 기업에 미래가 없다.

마지막으로 법뿐만 아니라 노사관계를 통해 비정규직과 사회적 취약계층을 보호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부부관계를 법만으로 보호할 수 없듯 노사관계도 마찬가지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단체협약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비정규직까지 포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비정규직 조직률이 3.4%이고 그나마 지속적으로 줄어들어서는 자율적 보호를 기대하기 어렵다.

법과 노사관계 통해 보호해야

의 기획 기사 ‘노동 OTL’이 대안을 향한 길 찾기의 중요한 출발이기를 희망한다. 걸리고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출발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오아이스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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