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15만원 남았다, 희망은 남지 않았다


비정규직 공장 노동자로 살아본 한 달 가계부…
최소한의 ‘행복의 조건’ 지키니 1년 모아야 원룸 보증금 나와
등록 2009-09-22 06:07 수정 2020-05-02 19:25
노동OTL

노동OTL

가난은 ‘실험’하고 싶지 않다. “가난은 냄새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말에 동의할뿐더러, 한 달 번 돈이 적다 하여 가난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공장 일을 시작하면서 경기 안산으로 거주지까지 옮겼다. 무엇보다, 공장 노동자이자 독거 노총각으로서의 욕망과 실제의 수지타산이 어떻게 맞아떨어질 수 있는지 알고자 했다.

‘행복의 조건’을 정했다.

1. 화·목요일, 무조건 야간 잔업을 빠진다.

회사가 휴식을 허락하지 않아 여가를 즐길 수 없다면 행복은 애당초 봉쇄된다.

2. 일주일에 한 차례 과일과 고기를 사먹는다. 아침 식사를 하도록 최선을 다한다.

가장 부유한 5분의 1이 전체 육류와 어류의 45%를 소비한다는 지구에서 시급 4천원짜리도 좀 먹어야겠다.

3. 주방과 욕실이 딸린 집에서 산다.

말했다. 가난은 실험하고 싶지 않다. 일하는 동안 고시원에서 지내야 한다면 이 프로젝트는 접는다.

4. 한 달에 한 차례 연극이나 영화를 본다. 데이트는 가능할까.

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여가 수단이다. 공장에 얼마나 많은 청춘남녀가 있는지 아는가.

5. 한 달에 한 차례 도서관과 수영장에 간다.

거의 매주 해오던 35살 노총각의 취미다. 얼마면 되겠니. 해야겠다.

물론 이는 누군가에겐 최소한의 ‘생존’ 조건이고, 또 어떤 이에겐 ‘생활’의 필수 조건밖에 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선 빈곤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자유와 쾌락을 향유하자는 주장(마쓰모토 하지메, )도 폭넓은 주목을 받는다. 소비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일하는 ‘자본주의의 노예직’을 거부하자는 것이다. 필요 없다. 오롯이 ‘수지타산’만 궁금해하기로 한다.

경기 안산 안산역 앞 고시원 밀집 지역이다. 이 도시엔 고시원이 많다. ‘가난한 노동’과 깊게 관련한다. 안산역 일대엔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거주한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경기 안산 안산역 앞 고시원 밀집 지역이다. 이 도시엔 고시원이 많다. ‘가난한 노동’과 깊게 관련한다. 안산역 일대엔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거주한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고기는 일주일에 한 번, 영화는 한 달에 한 번

가장 먼저 타협해야 할 것은 주거였다. 다행히 1년 전부터 안산에서 거주하는 친구가 있어 방을 나눠 쓰기로 했다. 방 2개, 주방, 욕실, 베란다 등이 갖춰진 16평 정도의 다세대주택이다. 4500만원짜리 전세인데, 한 달에 20만원을 내기로 했다. 거기다 대부분의 식료품비를 대기로 했다. 친구는 전기·수도세·관리비 등 10만원가량을 냈다.

지난 8월7일 이사해 9월5일 퇴거했다. 그 사이 식료품비로 13만900원을 썼다. 라면, 햇반, 우유, 토마토 주스, 수박, 자두, 바나나, 생수 그리고 맥주와 간단한 안줏거리다. 일주일에 3만2천원 남짓을 쓰며, 과일은 한 차례 이상 먹었다. 다만 수박이 대부분이었고, 딱 한 번 자두 5천원어치를 사먹었다.

공장에서 오전에 허기로 ‘무아지경’에 빠지는 시점이 점점 빨라지자 3주차부터 바나나를 구입해 2개씩 먹고 다녔다. 그래도 번번이 첫 휴식 시간 이전에 얼이 달아났다.

말 그대로 아침 식사를 해먹는 일이 곤욕이었다. 난 아침 6시20분, 친구는 6시30분께 일어났다. 30분 아니 10분이라도 더 자려고 아침을 거르는 일은 전혀 무모하거나 어리석지 않다. 공장 근무가 시작된 8월11일, C타임(오후 1시~3시30분) 뒤 휴식 시간 10분, 소변이 마려웠으나 오직 앉아 쉬기 위해 참은 적도 있다.

한 달 동안 모두 네 차례 아침 식사를 챙겼다. 하루는 전날 먹다 남은 피자, 하루는 전날 먹다 남은 튀김닭으로, 하루는 전날 사놓은 700원짜리 빵으로. 9월1일 단 한 번 주방기구를 이용했다. 전날 친구와 아침 식사 당번을 정하자고 했다. 누구든 20~30분은 빨리 일어나야 한다. 라면을 끓이고 햇반에 반찬까지 올려 서로의 코앞에 갖다주기로 했다. 가위바위보에서 내가 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튿날 결국 5시50분에 일어나 먹었다. 친구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설사, 난 출근하자마자 설사를 했다. 점심 때도 했고, 퇴근 뒤에도 했다. 그러곤 다신 그런 ‘비생산적인 일’을 시도하지 않았다.

남성 노동자는 불편하면 거른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40~50대 여성 노동자들은 새벽 5시30분 정도에 일어나 가족의 식사를 준비했다. 밤 9시에 일을 마치고 들어가면 아침에 할 수 없던 설거지까지 할지 모른다. 남성 노동자들은 불쌍했고, 여성들은 위대했다.

그래서 유료든 무료든 아침 식사도 제공한다는 일부 회사들이 부러웠다. 아침 8시30분에 일이 시작하지만, 출근버스가 공장 마당에 내려주는 시간은 7시40분 정도다. 보통 빈둥대는데, 어떤 이들은 8시부터 라인에 서서 작업을 준비한다. 회사에서 아침만 주더라도 30분~1시간가량을 아낄 수 있다. 그것이 공짜라면 한 끼를 3천원으로 계산했을 때, 한 달 20일 근무일 동안 6만원을 아낀다.

‘공장 노동자’ ‘독거 노총각’ 임인택 기자의 한 달 가계부

‘공장 노동자’ ‘독거 노총각’ 임인택 기자의 한 달 가계부

회사에서 아침밥만 챙겨줬더라도

한 달 외식비로 19만8310원이 들어갔다. 구직 기간 4일 동안 오가며 사먹은 4천~5천원짜리 점심에, 금요일 또는 주말에 먹은 삼겹살값, 식사비도 포함돼 있다. 일하는 동안 시급 4천원이 넘는 식사는 사먹지 않겠다고 치기 어린 다짐을 했다. 대단히 어려웠다. 집 앞 뼈해장국이 4천원이라 일찍 퇴근할 때마다 그곳에서 식사를 했다. 그마저도 귀신같이 안산 거주 3주차에 4500원으로 올랐다.

사실 외식비엔 라인의 20대 공장 노동자들에게 금요일 근무가 끝날 때마다 사준 고깃값과 술값이 포함된다. 8천원짜리 삼겹살집에 들어갔다 7천원짜리로 옮기기도 했다. 치 떨리는 야근 1시간(6천원)을 해도 고기 1인분을 사먹을 수 없다니, 노동이 끔찍한 것인지 자본이 끔찍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어쨌건 이때 먹은 것은 n분의 1로 계산해 지출로 잡았다. 실제 가족이 없는 대부분의 노동자가 주말 한 끼 정도는 식당을 찾는다. 귀찮기도 하지만 밥을 해먹으려면 더 많은 돈을 들여 식료품과 주방기구를 갖춰야 한다.

8월23일 일요일, 서울 용산 멀티플렉스에서 영화를 보았다. 공장밥에 길들여진 뱃속에 카르보나라 스파케티와 포르시타 피자를 넣었다. 그리고 저녁에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 영화 티켓 비용을 뺀 5만4940원이 내 카드 명세표에 기록됐다. 불과 10시간 만의 일이다. 하루 밤 9시까지 11시간 일을 해도 메울 수 없는 금액이지만, 공장에 부는 가을바람이 한강 강바람을 대신할 순 없다.

그날 본 는 액션도, 스릴도, 심지어 여배우의 미모까지도 어중간한 영화였다. 세계 5위의 기업을 물려받은 양자로부터 회사를 뺏으려는 음모·혈투가 뼈대였는데, 도대체 5위의 기업을 만들기 위해 물 아래서 갈퀴질 하는 노동자는 보이지 않고, 오직 경영권에 눈 붉힌 이들만 가득했다. 거북했다.

약값 1만500원에 교통·통신비 5만원까지 치면, 내가 한 달 동안 쓴 생활비는 45만3150원이다. 여기에 방값 20만원을 더하면 65만3150원이다. 집에서 가져온 쌀, 반찬, 선풍기, 돗자리, 과일, 새 목욕용품 세트, 담뱃값 일부는 공제하지 않았다. 8월치 급여는 총 66만7070원. 9월1~4일 일한 대가는 10월11일 입금될 예정이다. 14만1천원이 예상된다. 수지타산은 정확히 15만4920원이 남는다. 살 만한가.

그들은 고시원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안산·시흥 비정규직 노동자 실태조사(2007)를 보면, 가구 지출 비중으로 양육·교육비(25.3%)와 주거비(21.9%)가 가장 컸다. 밑천 없는 이가 날품에만 의탁해 안전한 주거 공간을 확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고시원에서 원룸 → 주택 → 아파트로 옮겨가는 궤적은 그래서 필연적이고, 희망이다.

안산에서 자취가 가능한 주거 공간은 보증금 300만~500만원에 월세 20만~30만원짜리가 보통이었다. 친구가 없었다면, 15만원씩 1년 이상을 모아야 겨우 싼 원룸 보증금이 마련된다. 물론 정착 뒤 소비는 점점 더 줄 것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