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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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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로 맞아 촛불로 보내다

[특별기획]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열쇳말 ④ 촛불… 대통령 당선의 결정적 계기로 시작돼 임기 내내 ‘시민 미디어’가 되고
추모의 불길로 타오른 ‘참여정치’의 상징
등록 2009-05-26 11:49 수정 2020-05-03 04:25

5월23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촛불이 켜졌다. 생전 웃는 모습 곁에 누군가 방명록을 뒀다. 이미 시민들의 글이 빼곡하다. 떨리는 손 다잡은 흔적이 물고기처럼 펄떡댄다. ‘정신애’라는 이름이 감정에 겨운 글로 말한다. “스무 살 때 촛불 들어 지켜냈습니다. 다시 한번 촛불을 들어 이제 가시는 길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촛불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7년을 함께했다. 들어 올렸다 내렸으며 이제 다시 그의 곁에 모이고 있다.


시민의 촛불, 노무현의 자원이 되다

그때, 돼지저금통에 담긴 것은 정치자금만이 아니었다.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오랜 열망은 전혀 새로운 방식의 선거 참여를 탄생시켰다. 2002년 11월28일 경기 부평역 광장에서 지지자들에게 돼지저금통에 모은 돈을 전달받은 노무현 당시 대선 후보가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그때, 돼지저금통에 담긴 것은 정치자금만이 아니었다.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오랜 열망은 전혀 새로운 방식의 선거 참여를 탄생시켰다. 2002년 11월28일 경기 부평역 광장에서 지지자들에게 돼지저금통에 모은 돈을 전달받은 노무현 당시 대선 후보가 즐거워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모든 일은 촛불에서 시작했다. 하굣길의 여중생 두 명이 죽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렸다. 2002년 6월이었다. ‘앙마’라는 네티즌이 다 같이 모여 추모하자고 제안했다. 지도부가 없어도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것을 그 전에는 몰랐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 4만5천여 명이 모였다. 촛불. 위태롭게 흔들리는 작고 여린 그것을 사람들은 품에 당겨 안았다. 사건, 무명씨의 제안, 인터넷 토론, 광장의 촛불, 기성정치를 압도하는 시민의 힘…. 이때부터 ‘촛불 정치’의 문법이 틀을 갖췄다.

“반미면 어떻습니까.” 민주당 대선 후보 노무현이 말했다. 1400도로 타오르는 수만 개의 촛불 앞에 섰다. “미국에 대해 우리 정부가 좀 더 자율적이어야 합니다.” 촛불이 박수를 보냈다. 대통령 후보가 ‘반미 집회’에 참여해도 되느냐고 대선 캠프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촛불 현장을 찾았을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반미가 아니라 시민이었다. 2002년 6월 이후, ‘시민으로서의 촛불’은 결정적 국면마다 그의 자원이 됐다.

2002년12월 대선 패배 이후, 한나라당은 ‘효순·미선 촛불 집회로 인한 반미 정서’를 패인으로 꼽았다. 반미 정서까진 모르겠으나 촛불 집회가 이회창 후보의 패배, 노무현 후보의 승리와 밀접했던 것은 사실이다. 우파의 ‘촛불 콤플렉스’도 함께 시작됐다. 심지어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의 배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다고 우파 인사들은 의심한다. 현명한 의혹은 아니다. 촛불의 작동 방식을 여전히 이해 못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촛불을 움직인 게 아니라, 기성 정치 구조 전체를 불신하는 시민들이 촛불을 붙이고 끄고 또 붙였다.

“정치는 여전히 특정 정치가 계급의 직업적 행위이고, 이에 진입하는 경로 자체를 바로 그 계급이 독점하고 있다.” 에 노혜경이 그렇게 적었다. 같은 책에는 “정치 혐오의 진흙탕에서 피운 정치 사랑의 연꽃”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정치개혁을 꾀했던 노무현 노선에 대한 시적 개념화다. 실제로 2002년 12월19일 그가 대통령이 됐을 때, 언론은 ‘노사모의 승리’라고 적었다. 민주당의 승리라 기록했다면 부정확한 표현이 됐을 것이다. 민주당에 앞서 자리를 차지한 ‘노사모’는 정당 질서에 복속되지 않은 평범한 시민들을 대표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만 졸업한 노 전 대통령에게 최고 엘리트들이 장악한 정당·관료 조직의 장벽은 높았다. 그는 기성의 정당·관료 정치와 항상 긴장했다. 그가 싸운 것은 지역주의 이전에 ‘엘리트주의’였다. “명문가, 명문학교 출신들은 깊이 반성해봐야 합니다. 기회주의 처신으로 개인적 이익을 도모해왔고, 그 가운데 부당하게 특권을 누려왔던 과오들이 너무 많습니다.” 대선 직전 출간된 이라는 책에서 그는 엘리트로 표상되는 기성의 권력 작동 방식을 비판한다.

이 점에서 그는 ‘양김’과 단절한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기성 정당의 역학구조에서 탄생했다. 두 대통령은 나란히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보수정당 또는 분파의 힘을 빌렸다. 대통령 김영삼은 1990년 3당 합당을 거친 민자당 창당의 산물이었다. 대통령 김대중은 평생의 숙적 김종필과 손을 잡은 ‘DJP 연합’의 결실이었다. 정치권력의 상층을 어떻게 분할하고 통합할 것인지가 이들의 화두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대편을 봤다. 정치권력의 밑바닥, 정치 구조의 외곽에서 정치적 자원을 길어 올렸다.

촛불은 노무현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7년을 함께했다. 5월23일 밤, 봉하마을 빈소 앞에서 시민들이 추모의 촛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촛불은 노무현 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7년을 함께했다. 5월23일 밤, 봉하마을 빈소 앞에서 시민들이 추모의 촛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촛불에 대한 우파의 뿌리 깊은 공포

‘노사모’는 이미 2002년 대선 이전부터 주권재민과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정치인 노무현은 그 의지를 실현할 인물로 여겨졌다. 그들이 “자율성을 존중하는 느슨한 연대”를 구현하고,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소통과 지역 소모임 형태의 풀뿌리 조직을 갖췄을 때, 촛불의 진화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2004년 3월부터 석 달에 걸친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은 그 정점이었다. 최대 13만 명이 운집했던 이 촛불은 의회의 결정을 무력화하고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사실상 압박했다. 정당의 외곽, 거리와 광장과 인터넷에 편재한 시민의 힘을 신뢰했던 노 전 대통령의 판단은 옳았다. 정치인 노무현과 그가 표상하는 가치를 지켜준 것은 정당이 아니라 시민이었다.

그 가공할 위력을 우파는 일찍부터 두려워했다. 촛불을 일컫는 우파의 용어는 따로 있다.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은 대중의 감정을 휘어잡기 위해 마구잡이로 외쳐대는 흥행이다. 몇 가지 특징은 있다. ‘반엘리트’ ‘반지식인’ ‘부흥사적 도덕주의’ 같은 것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대중이건, 대통령 지망자들이건 그런 난폭한 포퓰리즘 풍토에 흠씬 젖어 있다.”(2002년 4월6일, 류근일 칼럼)

비록 비난의 맥락에 담기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이 보수 논객은 포퓰리즘에 흠씬 젖은 대통령 지망자가 반엘리트주의와 도덕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2002년의 촛불 시민과 2004년의 촛불 시민은 바로 그 반엘리트주의와 도덕주의를 강력히 지지하기 위해 광장에 나왔다.

촛불은 그러나 끝없이 흔들린다. 2003년 6월, 이라크 파병 반대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 2007년 3월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다. 촛불은 대통령 노무현과 소통하는 ‘시민 미디어’였다. 그 풍경은 더이상 낯설지 않았다. 다만 4년 간격을 두고 타오른 두 촛불은 ‘노무현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촛불은 그의 행보에 물음표를 붙였다. 노 전 대통령은 그 촛불에 현명하게 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 시스템의 상부 구조로 퇴행했다.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이뤄 바닥난 정치자원을 보충하려 했다. 직접·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이 흔들렸고, 시민들의 촛불도 사라졌다.

100만 명이 모인 2008년 촛불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반 이명박 정부’를 내걸었다. 이명박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노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오판했다. 시민들이 불신하는 것은 기성 정치 구조 전체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촛불을 보고 다시 한번 노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 세상에 존재하는 ‘노무현의 모든 유산’을 척결하려 했다. 그 가운데는 노 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검찰 수사도 포함된다. 그의 죽음은 촛불에 대한 우파의 뿌리 깊은 공포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공포는 다시 촛불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제 무엇을 지킬 것인가

계속 타오를까? 언제까지 어디까지 번질까? 지난해와 같은 대규모 촛불을 낙관하는 이는 많지 않다. 정권의 탄압이 있고, 촛불이 내세울 구호도 여전히 막막하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촛불이 다시 일어나는 기폭제가 되겠지만, 추모의 물결이 얼마나 확산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5월23일 대한문 앞에 적힌 방명록의 글은 대부분 후회와 반성의 고해였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제와 그리운 게 원통하다고 적었다. ‘자혁·자현 아빠’도 글을 남겼다. “그때 차라리 그들을 막지 말 걸 그랬습니다. 당신을 탄핵한다는 이들에게서 당신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왔을 때는 이런 일이 생길 걸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벌써 당신이 그립습니다.” 자혁 아빠가 ‘당신’을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세상을 떠났다. ‘당신’이 좋아서 때로는 미워서 촛불을 들던 사람들은 그래도 ‘당신’없는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다시 촛불을 든 자혁 아빠는 이제 그 촛불로 무엇를 지킬지 고민해야 한다. 저기, 사람들이 간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바로잡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이던 2002년 효순·미선양 추모 촛불집회에 참석한 것으로 보도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기에 바로잡습니다. “반미면 어떻습니까”라는 그의 발언은 그해 9월 초 대선 유세현장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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