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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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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이 아니라 민상이다


시민 모두가 상주인 장례, 현 권력과 지배체제에 대한 불신이자 부인 또는 거부
등록 2009-06-02 04:43 수정 2020-05-02 19:25

꽃, 향, 초는 하나였다. 낮에는 꽃, 해가 지면 촛불이 한반도 남쪽 300여 군데를 아침이도록 밝혔다. 꽃, 향, 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제단에 바친 민심에서 우러나온 제물이었다. 비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사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문을 위해 아침, 점심, 저녁을 거른 채 쏟아져나왔다.

‘상주는 백성이었다.’ 지난 5월27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분향소 인근에서 만화가들이 그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형 초상화 주변에 시민들이 촛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상주는 백성이었다.’ 지난 5월27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분향소 인근에서 만화가들이 그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형 초상화 주변에 시민들이 촛불을 밝히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백성, 서민, 민중, 민초, 시민, 민주가 주인

일주일 동안 한국은 문상이 일상인 ‘조문 공화국’이었다. 결코 강요받은 애국심이나 면피하기 위해 간 초상집이 아니었다. 화투도, 술도, 잡기도 없는 지독히도 건전한 상가였다. 시민들은 정부가 설치한 분향소를 두고 굳이 먼 길을 돌아 시민 분향소를 찾았다. 관에서 만든 것보다 3배 남짓한 200여 개 시민 분향소로 몇백만 명이 넘는 조문객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차벽을 형성한 경찰버스 사이에서 매연 가득한 정치적 명상에 빠져 3~5시간씩 간절히 명복을 빌었다. 그 기다림은 스스로를 향으로 피워올리는 일이자 현 권력에 대한 명백하고 확정적인 부인을 자기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조문객이 상주가 되고 상주가 조문객이 되어 긴 행렬을 이루었다가 스스로 제단을 차리고 곡을 하는 이러한 상례는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케네디 장례에도, 레닌·마오쩌둥·김일성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비명에 떠났든 천수를 누렸든 어쨌든 이들은 체제 내에서 치른 장사였다. 어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 국상에 더 많은 사람이 몰렸다고 입초시에 올리기도 한다. 그 장례는 기본적으로 장기 독재를 집행해온 현직 권력자가 문득 사라져버린 데 따른 공황 현상에서 비롯된 통곡과, 계엄령 아래 진행된 관제 조문이었다는 점을 명념해야 한다.

인간 노무현을 장사 치르는 일을 두고 권력이 생색내듯 말하는 국장, 국민장 따위는 권력의 위선적 품위를 나타낼 뿐 ‘나의 대통령’이라 부르는 민심의 진정성과는 별반 관계가 없다. 놀랍게도 이번 상례를 대하는 다수 대중은 장례 의전의 품격에 관심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 핵심은 이 장례를 바로 자신들이 치르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직접 조문이든 인터넷 조문이든 참여한 시민 모두가 상주인 장례라는 뜻이다.

요컨대 이는 국상이 아니라 민상(民喪)이다. 백성, 서민, 민중, 민초, 시민 그리고 민주가 바로 주인인 장례인 것이다. 적어도 경찰이 포위한 국상은 없는 법이다. 덕수궁을 경찰이 둘러싼 일은, 지금은 궁 밖이지만 당시 새로 지은 양식 건물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될 때 말고는 단 한 번도 없었다. 3·1운동 때도 대한문 앞에서 국상에 맞춘 만세시위가 있었다. 몇몇 기록사진은 이를 생생히 증거하고 있다. 오늘 이를 막는 일은 일제 헌병·순사 권력보다 옹색하고 치졸하기만 하다. 각성된 대중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고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민심에 기초하지 않은 정권이란 치안 권력의 보호 없이는 하루도 온전히 지탱하기 어려운 법이다.

일제 헌병·순사 권력보다 옹색하고 치졸

20세기 한국사는 민상의 역사다. 백성에서 시민까지 주체를 부르는 이름과 성격을 조금씩 달리해왔지만 상례를 축으로 한국사는 요동쳐왔다. 자기희생과 헌신을 전제로 한 억울한 죽음을 통해 한국사는 강력한 발화작용을 일으키면서 계기적으로 박동을 거듭해왔다. 그 주체는 실질적으로 언제나 비정형적 대중들이었다. 광무 황제 고종의 붕어에서 비롯한 3·1운동과 융희 황제 순종의 죽음으로 일어난 6·10 항일만세투쟁이 대표적인 추모 항쟁이다. 광주학살에 대한 80년대 내내 10년 동안의 장례, 6월항쟁 또한 마찬가지다.

고종·순종 장사를 맞은 백성들은 식민지 권력인 총독부 아래서 진행되는 국상을 심정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인정하지 않았다. 독을 먹인 암살로 군주가 사망에 이르렀다고 여긴 사람들이 국상에 조아린다는 건 치욕이었다. 이와 같이 민상의 핵심은 현 권력과 지배체제에 대한 불신이자 부인 또는 거부다. 따라서 그 죽음을 처리하고 갈무리하는 일을 그들에게 맡겨둘 수 없는 건 돌아앉아버린 민심의 당연한 귀결이다. ‘민’이 장사의 주체로 나선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백범 김구가 세상을 떴을 때 분하고 억울했지만 국민들은 이번 장례처럼 자책하지는 않았다. 백주 테러한 노골적 살인자와 배후가 있었기에 대중적 죄의식은 인간 노무현의 경우와는 빛깔과 내용이 달랐다. 이번 조문 행렬의 정서는 간명한 시쳇말로 ‘지못미’였다. 기록된 지난 2천 년 역사상 제왕적 위치에 있던 사람 중 스스로를 버린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중은 여기서 역사적 충격, 민주주의 위기, 인간적 상처라는 삼중의 참혹함을 동시에 경험해야 했다. 그걸 씻어내기 위해서, 또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듯 시민들은 조문 행렬에 동참했다. 분향소에 이르는 긴 기다림이 새로운 정치적 각성의 학습 과정이자 표현이었음은 물론이다.

대중이 역사에서 계기적으로 주체가 되어 나설 때는 반드시 필연적 인과관계가 일정 기간 지속되는 대중적 확신 과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 민상을 발생·유지시켜온 건 공안·사정 정국, 소통 거부와 일방주의 등 이 정권에 대한 시민적 거부에 있다. 다분히 수사학적이기는 하지만 이는 조문 ‘민(심)란’이라고 해도 좋을 게다. 시민들은 눈물 어린 조문을 통해 현 정권을 통렬하게 비토하고 있는 셈이다. 이 현상이 앞으로 선거 등에 뚜렷한 영향을 주리란 건 굳이 분석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민심을 끌어안지 못할 때 정치란 무상한 노릇이고, 민심을 억누르는 법이란 그저 구실로 전락하고 말 뿐이다. 민주주의 후퇴가 있어도 좋다는 게 아니라 기왕이면 민주주의에 더해 밥을 편하게 먹여주고 경제를 살려주리라 기대했던 정권의 거듭되는 실정에 민심은 충분히 넌더리를 내오던 참이었다는 걸 정권은 알아야 한다. 게다가 조문 행렬에 공포를 심어주는 일을 ‘경찰버스로 막아주니 아늑하다는 사람도 있다’는 식의 기형적 오만과 비상식적 언술로 표현하는 것은 슬픔과 분노를 고양시켜 장사의 성격을 더욱 민상으로 강화해주고 있다.

사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공안(公安)정국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공공안녕을 빌미로 소수 기득권을 지켜내기 위한 사안(私安)정국이 있었을 뿐이다. 검경 등 치안 권력을 앞세워, 신영철 대법관 사건에서 보듯 사법부와 민심을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실질적 일당 국회, 이를 경리문서로 셈해주는 감사원과 국세청, 여기에 장단을 맞추거나 앞서가는 보수 언론, 그리고 이에 기생하는 지식인 그룹에 의해 퇴임 뒤 노무현은 두 번째 탄핵을 당했다. 그의 죽음은 권력의 실정을 가리기 위한 보수 대반격에 따른 십자포화의 결과물이다. 그는 ‘논두렁에 내버린 금시계’를 찾아내야 하는 땅꾼으로 추락해 있었다. 첫 번째와 달리 다시 찾아온 탄핵에서 그를 구해줄 대중은 없었다. 그 순간이 온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어떤 기여도 없이 절차민주주의의 이익만을 취해온 염치없는 세력에 권력을 넘긴 책임 등을 목숨으로 감당해 마지막 존엄을 지키고자 했다.

민상이 천하를 바꾸게 될 것

지금 널리 회자되고 있는 ‘노간지’ 추억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서민 풍모와 수더분한 생활어는 대중과 일상적 일체감을 주었지만 보수 언론에서 시작된 비주류를 향한 모멸적 공격에 대중은 쉽게 동의해버리면서 이를 싫어했다. 정작 너무도 자신들과 흡사한 게 이번에는 죄가 되었다. 그 자기혐오와 방기에 대해 시민들은 상주가 되어 민상으로 죄 닦음과 새 다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국민 상주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의 양은 시민이 다시 역사의 주체로 서는 위대한 씨앗이자 거름이 되고 있다. 역사에서 보듯 필시 민상이 천하를 바꾸게 될 것이란 뜻이다.

서해성 소설가·한신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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