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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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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노동자는 어디에 있나

회사에서 단순하고 부수적인 역할 떠맡고 이직 잦은 20·30대 여성노동자들
등록 2022-05-01 08:46 수정 2022-05-02 02:24
2020년 5월7일 인천 미추홀구에서 우유를 배달하는 여성노동자. 한겨레 박종식 기자

2020년 5월7일 인천 미추홀구에서 우유를 배달하는 여성노동자. 한겨레 박종식 기자

퇴근길, 골목에 세워진 택배회사 트럭에서 물건을 내리는 젊은 여성을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다. 긴 머리를 올려 묶고 택배회사 조끼를 입은 여성이 트럭 짐칸에서 상자를 내리는 모습이 낯설어 눈에 담아두었다. 여성 택배노동자를 보는 것이 처음임을, 그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보이는 순간에야 그동안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으면, 말하지 않으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택배노동자 중에 여성노동자가 단 10명이어도, 아니 1명이어도, ‘있다’고 말해야 한다.

2022년 봄에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들은 ‘여성, 노동, 건강’을 제목으로 4차례의 온라인 강좌를 기획했다. ‘2030 여성의 노동과 건강’을 주로 이야기하려 했는데, 막상 이야기하려니 20대와 30대 청년 여성의 노동에 대해 뜻밖에도 활동가들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음식쓰레기 처리, 설거지, 간식 주문

노동의 세계에서 청년 여성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한국여성노동자회가 1990년대생 여성노동자 4632명을 온라인 설문조사하고 이 가운데 19명을 심층인터뷰한 조사 결과를 2021년 11월 발표했다. 2030 청년 여성의 노동 경험을 말하는 가장 최근 자료였다. 일터의 조직문화는 청년 여성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부수적인 역할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설문조사 결과에서 확인됐다. 또한 설문 응답자 가운데 이직 경험이 있는 3064명의 내용을 요약하면, 평균 3차례 이상 이직했고, 일한 곳 대부분이 설사 정규직 일자리여도 사업장 규모가 작고 최저임금을 받는 곳이어서 경력을 쌓을 정도로 오랜 기간 일하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에서 청년 여성노동자에게 맡기는 일을 보면, 직장의 관심이 다른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2022년 3월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발표한 자료를 보면, 여성노동자는 직장에서 ‘간식 주문하기’ ‘회의 장소 정리하기’ ‘문구류 사다놓기’ ‘설거지’ 같은 일을 주로 한다고 말한다. 2022년 1~2월 직장갑질119에 들어온 전자우편 제보 336건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많았다. ‘환경을 보호한다고 종이컵 대신 머그컵을 사용’하면서 회의할 때는 여성노동자가 설거지한다. ‘코로나19 때문에 배달음식을 먹는 경우’ 배달 용기에 남은 음식물을 치우는 일도 여성직원이 한다. 젊은 여성노동자는 ‘허드렛일’하도록 요구받는다.

이것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왜 바뀌지 않는가.

“미혼기 직장 여성은 흡연율과 음주율, 아침 식사 결식률이 전 생애주기 중 가장 높아 건강 행태가 좋지 않고 스트레스, 우울 등의 증상 호소율도 높은 시기다. 또한 자신이 건강하지 않다고 인지하는 비율은 생애주기 중 가장 낮아 자신의 건강에 대한 과신과 아직 젊어서 건강과 건강관리의 중요함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불건강한 건강 행태를 낳을 우려가 있다.”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인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이 2005년 펴낸 ‘직장 여성의 건강관리’라는 교재에 쓰인 내용이다. ‘직장 여성’이라고 부르지만 ‘직장’은 떼어버린 채 ‘젊은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만 한가득이다. 이 교재에는 이런 글이 이어진다. “출산 양육기 직장 여성은 미혼기 직장 여성에 비해 건강 행위가 조금 나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이 시기에 결혼이나 양육 등으로 사회적, 가정적으로 부여받은 역할로 건강에 대한 책임감이 증대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여성을 일과 노동과는 연결하지 못하는 웃픈(웃기고도 슬픈) 글이다.

무엇을 더 이야기해야 조금씩 벽이 뒤로 밀릴까.

2020년 산업재해를 인정받은 노동자는 10만8379명이고 남성이 77.8%, 여성은 22.2%였다. 2020년 2천만 명의 임금노동자 가운데 10만 명만 산업재해를 입었다.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의 30%가량만 산재보험으로 치료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산재 은폐’라는 해괴한 단어가 고유명사처럼 쓰인다는 점에 비춰보면, 10만 명이 얼마나 적은 수인지 알 수 있다. 특히 남성노동자가 많이 일하는 건설업, 중공업 같은 산업에서는 보통 대형사고가 일어나고 이런 사고가 산재보험에 들어와 통계가 된다. 그러나 청년 여성노동자의 노동과 건강은 아직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여직원과 여성노동자 사이에서

‘타자 치고 커피 타고 수다 떨다가 손가락 골병들 확률이 더 높을까, 현장에서 넘어져서 멍들고 부러질 확률이 더 높을까?’ 언젠가 여성노동자의 산재를 다룬 인터넷 기사 에 덧붙은 댓글이 인상적이라서 적어뒀다.

50대, 60대 여성노동자가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우리는 반찬값을 벌러 나온 것이 아니라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고용·임금의 최저선이 낮아질 때마다 그 선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년의 여성노동자가 빗자루를 들고 앞치마를 두르며 싸워왔다. 학교급식조리사의 폐암이 직업병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밥하는 일’이 얼마나 강도 높은 노동인지를 사회에 알렸다.

이제는 청년 여성노동자의 노동을 더 많이 기록해야 한다. 일하는 청년 여성이 스스로 이야기하면 된다. 노동에 진심인 청년 여성노동자와 회의 뒤 설거지하는 ‘여직원’의 거리에 대해, 노동하는 청년 여성이 말해야 한다.

만화 <송곳>에서 전자부품 공장을 다니는 20대 여성노동자가 말한다. “일은 아무나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했지만 아무나 견딜 수 없을 만큼 고되고 지루했다. 사람들은 무표정했고 불친절했다. 상관없었다. 난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 테니까. 한 주가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바뀌어 있었다.”

숨 막히는 당신의 이야기를

지루한 노동 이야기를 이제는 당사자가 말하면 좋겠다. 안 중요한 이야기, 나만 알고 묻어둔 이야기, 내 노동의 구체적이고 사소한 단계, 과정, 결과를 이야기해야 한다. 유리천장, 미투운동도 계속돼야 하지만 공장으로 가는 버스 안 이야기도 나와야 한다. 새벽마다 다른 공장으로 가는 승합차 안의 파견노동도 이야기돼야 한다. 화장품 가게가 문을 닫아서 직장을 잃었을 때 얼마나 막막했는지, 창문도 없고 공기청정기도 없는 콜센터에 앉아 마스크를 한 채 ‘쏠’ 음으로 전화받을 때는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아프면 도태되고 밀어내는 조직문화에서 아프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말해야 한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

*노회찬재단×<한겨레21> 공동기획 내 곁에 산재: 일터에서 다치고 아픈 이들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는 칼럼입니다.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가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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