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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하는 말 “누구세요?”

시즌1 마지막 회- 어디까지가 내 몸일까
등록 2021-05-02 09:26 수정 2021-05-07 01:44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5월이라니 실화냐? 아직 2020년이라고 날짜를 잘못 쓴다. 뭔가 사기당한 듯해 누구 멱살이라도 잡고 싶다. 나는 10년 전 어느 때를 맴돌고 있는데 거울을 보면 40대 중반 여자가 서 있다. “누구세요? 되도록 만나지 맙시다.”

몸속 세균이 달라지면 나도 달라진다

단어가 입안에서만 맴돌 때가 있다. 치과에서 ‘마취’라는 낱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간호사를 빤히 보며 웅얼거렸다. “그거 있잖아요, 통증 없애는 거. 무통주사요.” 애 낳냐? 고유명사들은 통장 잔고 사라지듯 순식간에 종적을 감춘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큰 배 있잖아.”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배가 막 가라앉아.” “타이타닉?” “그치. 그 영화에 나온 남자 배우.” 나이 들수록 낱말이 사라져버린다고 걱정하니 친구가 “옛날에도 너는 그랬다”며 위로했다. 점점 고유명사는 대명사로 대체될 테니 ‘이거, 그거’라 해도 척척 알아들을 친구를 아껴야 한다. 내일모레 50살이라 생각하면 황당하다.

내가 나라고 믿었던 나와 실제 나 사이의 괴리가 점점 벌어진다. 내가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여야 어른이 된다. 아프고 죽을, 필연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라는 걸 깨달으며 나이가 든다. 어쩌면 약한 나를 껴안아야만 세상과 연결될 수 있을지 모른다.

동네에 새 할머니가 있다. 아침 7시쯤 엉덩이까지 축 늘어지는 배낭을 메고 공원에 나온다. 새들 먹으라고 조, 수수 따위를 뿌린다. 길고양이 사료도 채워 넣는다. 그 할머니 곁엔 늙은 개가 있다. 개가 사람보다 더 느리다. “아침마다 나오세요?” “내가 나이 들고 여기저기 아프니까, 아픈 것들, 배고픈 것들을 그냥 못 보겠어.” 산수유는 어느 참에 지고 없다.

어디까지가 내 몸일까? 빌 설리번의 책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을 보면, 내 몸이라도 온전히 내 것은 아니다. 브로콜리나 커피를 좋아할지, 고수에서 비누 맛을 느낄지, 잘 중독될지, 자주 우울해질지 등에 유전자뿐 아니라 환경이 큰 영향을 미친다. 장내엔 세균 1만 종이 사는데 이 세균이 없으면 나는 없다. 몸속 세균 무게를 다 합치면 1.3㎏, 뇌 무게에 맞먹는다. 무균실에서 키운 쥐는 사료를 줘도 바짝 마르고 면역계는 엉망으로 망가졌다. 스트레스 수치가 솟구치고 신경증 증상을 보였다. 이 쥐에 정상 쥐 맹장에서 채취한 세균을 묻혀주자 살이 붙고 스트레스 수치도 줄었다. 정상 체중 생쥐의 세균을 묻혀주면 체중이 30%, 비만 생쥐의 세균을 주면 50% 늘었다. 식생활에 따라 장내세균 구성이 달라지고 이 세균들의 취향에 따라 입맛이 변한다. 세균 입맛이 당기는 음식으로 내 손이 간다. 장내세균은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을 만들어 뇌와 소통한다. 멸균 쥐에게 우울증 환자의 장내세균을 접종하면 우울 증상을 보였다. 내 몸속 세균이 달라지면 나도 달라진다.

고통은 죄의 결과인가

나는 공생의 증거다. 내 몸엔 내 유전자만 있지 않다.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공생자 행성>에서 진화의 핵심 추진력은 공생이라고 주장했다. 내 세포 속에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일종의 발전소다. 미토콘드리아가 없다면 내 몸은 에너지를 만들 수 없다. 미토콘드리아가 없다면 이 글도 쓸 수 없다. 이 미토콘드리아의 디엔에이(DNA)는 내 디엔에이와 다르다. 산소호흡 하는 세균의 디엔에이를 닮았다. 미토콘드리아는 원래 독립된 세균이었는데 융합해 내 세포와 한 몸이 됐다는 증거다. 린 마굴리스는 더 나아가 모든 생물의 뿌리는 세균이라고 주장했다. 세균들의 융합으로 동물도 식물도 탄생했다. “우리가 특별한 혜택을 입은 존재라는 집요한 환상은, 그저 그런 포유류라는 우리의 진정한 지위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린 마굴리스) 지구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나 세균이나 살아 있는 시스템에 속한 연결된 조각들이다. 세균이 없다면 인간도 없다.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지구는커녕 타인과도 연결될 수 없다. 성경에 등장하는 욥은 재수 없는 사람이다. 부자인데다 김태희급 미모의 자녀를 뒀고 그 옛날에 성평등을 실천하는 의인이었는데 갑자기 모든 걸 잃었다. 신의 뜻 말고는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온 불행이다. 가축은 불타고 가족은 죽고 자신은 심한 피부병에 걸렸다. 고립된 욥에게 세 친구가 찾아온다. ‘네가 죄지어 벌받았으니 회개하라’고 설득한다. 욥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곱씹어도 잘못한 게 없다. 욥이 반박할수록 친구들의 협박성 충고가 세진다. 욥은 그 충고에 절규한다. “자네들은 언제까지 나를 슬프게 하고 언제까지 나를 말로 짓부수려나?” 욥은 끝까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서 이 불행에 대해 말이라도 해보소.’ 신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그런데 신은 회개를 강요하는 친구들이 아니라 대화를 요구하는 욥의 곁에 있다.

이 이야기는 고통받는 사람 곁에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관계 뒤로 숨었다. 고통이 죄의 결과여야만, ‘선한’ 자신은 고통당하지 않을 수 있다. 세 친구가 욥에게서 불행의 원인을 찾고 싶었던 건 욥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다. 불행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려 불행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거다. 충고인 척 인과관계를 따지는 태도는 아픈 너와 아직 아프지 않은 나 사이의 거리를 떨어뜨려 놓으려는 시도다. 그러니 이런 충고를 들으면 아픈 사람은 더 외롭다.

늙어가는 건 더 많은 공감의 기회

그런데 마음속에 불안이 있지 않나. 시련은 대개 그냥 찾아온다. 불행의 원인은 종잡을 수 없거나 개인 너머에 있다. 그때 필요한 건 가르침을 주는 ‘선인’이 아니라 같이 있어줄 ‘그저 그런 포유류’다. 함께 있어주기는 충고보다 훨씬 어렵다. 타인의 불행이 자기 일이 되어야 하니까. 그 공감은 자신도 실은 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늙어가는 건 더 많이 공감하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72살 엄마는 염색하지 않는다. 이제 허리가 아프다. 가끔 툭툭 이런 말을 내뱉는다. “뒤돌아보니 낙엽만 우수수.” 내 반려견 몽덕이가 중성화수술을 받고 온 날이다. 분홍색 배에 붕대를 맨 몽덕이가 축 처져 자고 있었다. 개를 쓰다듬으며 늙은 엄마가 말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짠하지.”

김소민 자유기고가

*‘김소민의 아무몸’ 시즌1을 마칩니다. 8월 말 몸에 관한 새로운 기획으로 시즌2를 시작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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